‘요즘 흔한 인싸’들이 주기적으로 겪는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인태기’다. ‘인생 권태기’라는 뜻도 있지만 ‘인스타그램 권태기’의 줄임말로 더 많이 쓰이며, 단어 그대로 SNS에 권태로움을 느끼는 심리 상태를 뜻한다. SNS에 ‘권태로움’이란 감정을 느낄 정도로 밀접하게 사용했던 유저들이 겪는 경우가 많다.

나 역시 SNS를 많이 하는 편이다. 아마 내 칼럼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의 대다수가 SNS에서 날 아셨으리라 추측해본다. 칼럼에 대한 피드백 역시 이메일보다는 SNS 쪽지로 더 많이 오는 편이니까. 칼럼 홍보가 주목적은 아니지만, 꽤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나에겐 지금 이 시대가 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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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태기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올리는 게시물의 반응보다도,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을 보는 것이 SNS를 이용하는 더 큰 이유였으니까. 여기엔 내가 평소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근황, 또 새로 좋아하게 된 아티스트나 브랜드 등의 정보나 무드를 빠르게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SNS의 똑똑하고 상업적인 알고리즘은 이를 적극 활용하여 나에게 관련된 쇼핑 정보 등을 추천해주었고, 때문에 휴대폰 속에 머무는 시간이 꽤 긴 게 사실이다.

몇 년 전부터 SNS가 심리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있어왔다. 사람들은 SNS를 이용하면 이용할수록 우울하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남들은 저렇게 사는데, 나는 여기서 뭐하는 건가-하는 자괴감. 그래, 그럴 만하지. SNS에는 예쁘고 잘생기고 시간도 돈도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 천지다. 심지어 이 좁은 대한민국 땅에서 말이다. 영화<버닝>에 나왔던 그 대사가 딱 맞다, 대한민국엔 개츠비들이 너무 많다고. 몇 년 전 카카오스토리 역시 대세의 SNS서비스였을 때, 우리는 이것들 ‘카.페.인 우울증’이라고도 불렀었다. 카카오스토리,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이 야기하는 우울증이라 붙여진 이름이었다.

최근 SNS마켓에 대한 여러 논란이 많았었다. 팔로워가 많은 유저들이 판매하는 제품들에 소비자들이 불만을 호소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그녀들의 일상을 동경했던 누군가들은, ‘스마트 컨슈머’인- 왠지 내가 ‘아는 사람’같은 그 언니의 제품을 구매했었다. 그러니 여기에서 느끼는 배신감이 더욱 컸던 것이다. ‘난 언니의 애기 얼굴. 남편 얼굴도 알고, 강아지가 아팠던 것도 알고! 내 피부 고민에 공감해주고 답변도 줬으면서... 근데 어쩜 언니가 나한테 그럴 수 있어?...’라고 느낄 수 있는 거다. 물론 모든 소셜마켓들이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일부의 이야기다. 최근 이러한 논란들- 그리고 과거 몇몇 ‘SNS 셀럽’들과 관련한 사회면 뉴스들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일깨움을 주지 않았나 싶다, 보여 지는 게 다가 아니라고.

아마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이런 환경에 더욱 더 많이 노출될 확률이 크다. 우리는 TV프로그램을 시청하기 위하여 광고를 수동적으로 시청하게 된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SNS를 통하여 ‘자발적으로’ 광고들을 접하고 있다. 시장은 우리를 점점 소비하게 만들 것이고 그건 매우 다양한 형태가 될 것이다. 여기엔 우리의 본성을 자극하여 유혹하는 것들이 존재할 수밖에. 섹스, 질투심, 증오... 뭐 이런 것들일 테지. 그럼 그때마다 항상 이렇게 우울감을 느낄 것인가? 우린 여기에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 거기엔 능동적인 자각이 필요하다. 생각하지 않으면, 슬퍼지는 건 당신 쪽일 지도.

어제 나는 명상을 하다가 한 가지 질문을 만났었다. ‘나는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는 가’라는 질문이었다. 미래나 생활에 대한 두려움? 뭐 그럴 수도 있다. 이건 그냥 현대인이라면 대다수가 갖고 있는 고민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당장 나는 내 일과 돈벌이가 있고, 오히려 그것을 방해하는 나의 게으름이 더 큰 문제인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의 궁극적인 두려움이란 뭐였을까.

<Michael Stewart의 죽음>, 장 미쉘 바스키아

나는 또 물었다, 그럼 난 왜 게으르면 안 되냐고. 거의 기계적으로 대답했다, 돈을 벌어야하니까? 그건 명쾌한 대답이 아니었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찬찬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는 부지런한 사람이니까. 정말 나는 그러한가? 그러려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 나는 그러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뭐였을까? 외로워지기 싫어서였다. 계속 사랑받고 싶어서. 그럼 난 게으르면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인가? 거기에 난, ‘아니, 난 게을러도 사랑스러울 수 있을 것 같은데.’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한편으로 마음이 나아졌다. 사실 요 며칠 우울하고 다운된 기분이 지속되었었다. 그렇구나, 했다. 원래 감정은 날씨처럼 어느 날은 이유도 없이 맑았다가 또 이유도 없이 소낙비가 쏟아진다. 물론 예보는 어느 정도 항상 전해진다. 내가 그 소리를 듣지 않을 뿐... 그런데 자꾸 장마라서 조금 더 깊은 명상을 통해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게을러도 사랑스러울 수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왜 자꾸 스스로를 옥죄는 가에 대해서도 물었다. ‘특별해지고 싶어서’였다.

나는 SNS하면서 특별히 누군가를 부러워하거나 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내 주변엔 실제로 화려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기에, 부러움의 대상은 휴대폰 속이 아닌 실제 그들이어야 했을 거다. 내 삶, 혹은 나에 대한 불만은 카페인 우울증처럼 ‘상대적’인 것과는 조금 달랐다. ‘쟤는 저렇게 사는데 왜 나는 이러고 살아’가 아닌, ‘왜 나는 내가 꼭 특별한 삶을 살아야하며, 특별한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던 걸까.’가 내 문제의 핵심이었다.

“나는 매일 아침마다 최고의 즐거움을 경험한다.그것은 내가 살바도르 달리라는 것이다.”라는 명언을 남긴 살바도르 달리 (1904-1989)

거기에 대해서 나 스스로 오만하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그래, 내가 뭐라고- 왜 나는 항상 사랑받아야하나? 물었다. 내가 사랑받았던 적이 없었나? 그건 아니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남자도 있었다. 그런데 왜 나는 ‘항상’ 사랑받아야 하며, ‘항상’ 특별한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았을까. 그리고 그러기 위하여- 즉, 사랑받기 위하여 왜 그렇게 애를 쓰고 살았나.

물론 남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해서라기보다, 나 자신의 자아성취감을 위하여 노력한 것이 더 컸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 자신의 행복을 바라며 먹었던 나의 마음가짐들이, 나의 행복을 갉아먹고 있던 것이다.

<질투>, Munch

SNS 때문에 자괴감을 겪고 우울해지는 이들에겐, ‘다들 그러고 살지 않아’라고 말해주고 싶다. 밀란 쿤데라 소설 <정체성>에서 이런 내용이 언급된다. 사회가 보여주는 모습들은, ‘누구나 행복하게 섹스하고 살아, 너 빼고.’라는 이미지로 자괴감을 주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다고. 그런 자괴감들은 시장경제를 활성화 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차를 타면 넌 멋져 보일거야- 라던지(...)

난 만일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는 이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너도 저 ‘다들’과 같아, 라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말이다.

피상적인 정보에 익숙한 우리는, 피상적인 것들을 느끼는 것에 익숙하다.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자기 자신이 멋지거나 사랑스럽지 않더라도, 우린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존재일지 모른다. 존재다, 라고 확신할 수는 없다, 매우 주관적이고 솔직한 심정으로 그렇다. 다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이 글을 읽은 모든 분들이 아까보단 조금 더 행복해지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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