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적으로 미소 짓는 가화들 / 심장과 성기와 항문을 발랑 / 얼굴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 - 최승자 시, <여의도 광시곡> 중에서

[공감신문] 꼭꼭 걸어 잠가두었던 문이 열린 건 십 수 년만의 일이었다. 거기에 갇혔던 아이는 조금씩 문 밖을 살피기 시작했다. 마치 현관 밖 비둘기 한 마리가 두려워 스스로를 가둔 파트리크 쥐스킨트 소설 속 주인공 같았었다. 

서울 어느 광장에서 흔히 보이는- 사람들의 토사물 속 어마어마한 나트륨으로 뚱뚱해진 비둘기가 있을 줄 알았다. 그의 질병적인 날갯짓은 여느 대학 호수들처럼 에이즈 빼고 다 유발시킬 것만 같았다. 그런데 내 문밖의 비둘기는 그렇지 않았다. 고로 평화의 상징이라던 본질적 비둘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릴 적 포켓몬스터 만화에서 보던 오색 빛에 총명스러운 피죤이, 그리고 사랑이!

'Old Dutch Capuchine', Art of Pigeons by Gary Romig, 2010

나는 드디어 천천히, 바깥 공기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활을 그리며 공기를 제압하는 비둘기의 날갯짓에 미소를 띠었다. 그러나 한 가지 미소로는 불충분했다. 이렇게나 멋진- 게다가 오랜 시간 기다려준 비둘기에게는 더 다양한 찬사가 필요했다. 그래야 그를 잡아둘 수 있으므로, 아니 그래야 그의 날갯짓에 이는 훈풍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사람들은 어릴 적 나에게 끼가 많다고 했었다, 아니 요즘도 처음 만난 사람들에겐 가끔 듣는다. 그건 단지 재주가 많다는 의미가 아니다. 누가 우리 앞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더라도 그가 끼가 있는 지 없는 지, 느낌으로 알 수 있다. 표정이 그 답을 준다. 

끼가 많다는 것은 즉, 다양한 표정이 있단 뜻이다. 버스나 지하철, 비즈니스맨들이 많은 곳을 지나갈 때면, 사람들은 나를 힐끔- 또 힐끔 본다. 희한해보여서다. 모두들 비슷한 표정 속에서, 나 혼자서만 다른 온도의 표정을 짓기 때문이다. 활기차거나 침울하거나 분노에 쌓여있거나 혹은 설레거나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요즘 평범한 길거리에서 이런 표정을 보기 힘드니 그럴 만도 하지. 표정은 겨우 얼굴에만 있지 않다. 목소리, 뒷모습, 손짓에도 있다. 

내가 표정이 다양해진 건 사진작가인 아빠의 영향이 크다. 비슷한 각도로 고개를 치켜들고 시선을 내리깐다 하더라도, ‘목의 표정’에 따라 피사체가 표현하는 분위기가 달랐다. 관능적인 모델의 목에선 나약함이 풍겨났고, 역동적인 모델의 목은 솟구치는 핏줄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했다. 어릴 적 아빠의 촬영장을 따라다닐 때에 이른바 ‘프로’들을 보자면- 눈빛은 물론이거니와 자연스러운 입모양을 보일 줄 알았다. 

소설에서 ‘입술을 깨문다’ ‘입술이 파르르-’ ‘입술이 파래졌다’ ‘입 꼬리가-’ 이런 표현이 나오는 이유와 비슷하다. 얼굴 기관 중 입술만 유난히 붉은 건, 그곳의 혈관만 밖으로 도드라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떨림은, 다른 곳은 몰라도 입술에선 숨기기 힘들다. 어쨌든 나는 이런 디테일을 집어내는 아빠 덕분(?)에, 모델도 아니면서 다양한 표정의 다름을 익히는 환경에 놓였던 것이다.

우리는 서로 자극을 주고 또 반응한다. 누군가 A를 말했을 때, 대부분이 카스테라나 단팥빵처럼 묵직한 덩어리를 던졌다면 나는 거기에 레이어드 된 크루아상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얼굴 근육이 유연하게 연습되어진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그들의 자극에 나는 또 남다른 반응을 던졌고, 그것은 또 자극이 되어 호기심이라는 반응을 유발시켰다. 물론 그들의 자극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성질만 있던 건 아니다. 

아주 어린 시절 ‘내가 짓궂게 놀리면 쟨 어떻게 반응할까?’같은 귀여운 것들부터 시작되었다. 게다가 어릴 적 난 체구도 매우 작았고(13살 때 키가 139cm였다), 또래 친구들의 전형적인 단어를 쓰지도 않았으니 어련했었겠나. 성인이 된 후 다녔던 학원에서도, 나 놀리는 맛에 출근한다는 선생님도 계셨었다. 

이런 표정이 ‘끼’라는 것이다. 끼의 타입도 다양하다. 나는 좀 장난을 유발시키는 타입이었다면, 누군가는 성욕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이렇게 하면 쟨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호기심은 굉장히 섹슈얼하다. 그 어떤 종류의 성욕도, 출발을 위해선 호기심이라는 신발을 신을 수  밖에 없다. 초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며, 특히나 요즘처럼 끼를 숨기다가 퇴화된 이들로 점철된 사회에서는 더 더욱이다.

 

‘살인적으로 미소 짓는 가화들 / 심장과 성기와 항문을 발랑 / 얼굴에 달고 다니는 사람들 // 혹은 (...) 심장과 성기와 항문을 꼭꼭 잠그고 / 막대그래프처럼 걷는 사람들 / 차트 같은 표정의 얼굴들’ - 최승자 시, <여의도 광시곡> 중에서 

Ghost art work by Angela Deane

그러던 중 나는 몇 가지 일들로 감사나 만족하는 표정을 숨기기로 하였다. 다른 표정의 끼는 여전했지만, 쾌활하게 기뻐하는 모습엔 잠시만 안녕을 선고했다. 나에게 그런 표정을 유발시키는 것들에게 상처를 받아서였다. 현관 밖에서, 나의 만족스러운 표정이 문 열길 바라던 비둘기들은 별로 기다리지 못하고 떠나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날아든 비둘기 한 마리가, 남다르게 오랫동안 머무는 게 아니겠는가? 그 인내력이 대단한 피죤은, 한나라는 동생이다. 

우린 입맛이 상당히 다른 데, 내가 우울해하면 한나는 내가 좋아하는 위스키나 사시미를 사준다. 작고 사소한 것부터 값비싼 것까지 선물을 자주 해준다. 처음 문 밖으로 발을 내민 나는, 감사나 만족의 감정을 한 서너 가지로밖에 표현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가 말했다. ‘언니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내가 태어난 것 같아.’ 난 한나의 날갯짓을 계속 보고 싶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그 문을 빠져나와 다양한 표현- 즉, 반응을 꺼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사랑스러움이다. 끼가 진화하면 사랑스러움이 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내가 이걸 선물하면 저 사람이 얼마나 좋아할까?’ 이런 상대방의 수고로움에- 풍부하고 다양한, 구체적이면서도 남다른 반응으로 답하는 것! 그것이 사랑스러움이다. 사랑스러운 이들은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한나는 나에게 사랑한다고 해준다. (오해마시길. 우정과 가족적 느낌의 사랑이다) 한 발 늦게, 요즘 주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한나도 점점 더 사랑스러워진다. 

사랑받고 자란 티가 나는 사람들이 있다. 감사와 만족의 표현이 풍성한 사람에게 그런 말들을 한다. 만족감을 표현했고, 또 그러한 만족감을 유발시킬 만한 사건- 또 표현- 또 그러한 사건의 연속. 그들에게 그건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라 점점 사랑스러워진 것이다. 

그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까지 알고 있다. 나에게 ‘이것’을 해주기 위하여 행했던 상대방의 수고로움이다. 그래서 무조건 적으로 ‘너무 좋아’라고 하진 않지만, 그 수고를 알아주지 않았을 때 상대방이 느낄 실망감을 이해한다. 그리고 그런 무지無知가 반복되거나 당연한 것으로 치부된다면, 그 비둘기의 날갯짓은 다른 곳으로 향하기 위한 움직임이 되리란 것도. 

생색내는 건 그리 멋져 보이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처럼 문을 걸어 잠갔던 이들에겐 보여줄 필요가 있다. ‘이거 비싼 거야’가 아니라, ‘이거 구하느라-’ 혹은 ‘네게 필요해 보이는 이걸 생각하기 까지’같은 말을 통해서. 이것은 너를 사랑한단 뜻이니까, 지금 이런 너의 사랑스러움을 보기 위하여.

art work by Mark Ryden

나의 ‘풍요롭게 만족스러운’ 표정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나온다. 훈련이 덜 된 것이 라기 보단(뭐 그럴 수도 있고), 그들의 수고가 더욱 크게 와 닿기 때문에.  

고기도 먹어본 놈이, 술도 마셔본 놈이, 사랑도 받아본 이가 더 사랑스러워진다. 어느 과학자들이 말하기로, 진화는 우발적인 사건에 의해서 벌어지는 거랬다. 끼의 우발적인 진화인 ‘사랑스러움’에서 ‘사랑’은, 우연으로 일어난다. 아인슈타인은 ‘별, 인간, 식물, 우주의 먼지뿐만 아니라 벌레 등 우리 모두 보이지 않는 저 먼 곳의 피리 부는 사람의 곡에 맞추어 춤을 출 뿐’이랬다. 

그 모든 것들의 복합적인 향연으로 당신 문 밖에 흘러 든 비둘기가 있다면,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우린 거기에 춤추어야할 운명일 테니까. 그렇게 우발적으로, 사랑스러워 지시길! 직접 해보니 말할 수 있는데, 이건 정말 멋진 일이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