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리에서 난 글을 거꾸로 쓰기 시작했다. 아무도 내 생각을 알지 못하도록.’ - (영화<세비지 그레이스>중에서)

[공감신문] 얼마 전 본 영화가 충격적이었던 건 등장인물들의 비주류적 성향도, 발가락 주름까지 선명히 드러나는 성애 장면 묘사도, 그보다 충동적인 핏빛 살인도 아니었다. 이 모든 걸 아주 선명히 각인시켜버리는, 아주 단순한 흑백 사진 한 장. 이러한 비극을 살다간, 실존 인물인 베이클랜드家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영화 <세비지 그레이스>는 그들의 잔혹한 운명을 그려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살인 사건의 실제 인물인 Barbara Daly Baekeland. 아들 안토니와 성관계 했으며, 1972년에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사실 살인사건은 아는 사이에서 더 많이 벌어지며, ‘근친상간’은 다른 영화들을 통해서도 많이 봐왔었다. 매우 자극적인 묘사가 아닐 지라도(오히려 그랬다면 상당히 많은 관객들이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그들 관계 사실 자체가 이미 충격적이다. 프랑스 영화는 이런 관계에 대해 특히 많이 다룬다. 영화 <몽상가들>에서는 이사벨와 테오 남매, 매튜 세 사람이 관계를 맺고, <투 마더스>에서는 중년 여성인 릴과 로즈가 서로의 아들과 관계한다. 

커피는 아메리칸식, 음식은 아시안식, 영화는 일본식이 아니면 대부분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도 프랑스 영화를 곧잘 받아들이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프랑스식 사랑은 내 취향이 아니다. 사랑은 미국식, 혹은 한국식이다. 

이전에도 쓴 적이 있었지만- ‘빨치산’은 불어의 partisan에서 왔다. party를 함께하는 사람, 그러니까- 동지라는 뜻이다. 프랑스의 빠르티산들은 혁명적으로 사랑했다. 그들은 거의 늘 부유했고 웅장했기에 ‘권리’를 말할 수 있었다. 한반도의 어느 작은 나라처럼 오랜 시간 핍박을 받거나 찢어지게 가난했다면, 권리 같은 걸 찾을 정신이 없었을 거다. 빠르티산? 후후... 먹고 살기 힘들어서 제 새끼도 파는 마당에 누굴 믿는담.

한국의 동지는 ‘가족’이었다. 혁명이 아닌 ‘개척’정신을 가진 미국의 이민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족, 부부, 남매에게 애착보다 중요한 것은 어쩌면 굳건함과 믿음, 성실함이었다. 이들은 절대적인 한 팀을 이루어서 끝끝내 살아남는 동지애를 선보여 왔다. 이들 부부 사이를 끈끈하게 묶는 건, 오로지 섹스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는 다르다. ‘가족끼리 그러면 안 된’다는 건 프랑스식 사랑과 거리가 멀다. 물론 모든 프랑스인들이 다 그렇진 않을 거지만, 집집마다 올라오는 밥상의 식재료가 달라도 ‘한식’이라 부를 수 있는 것처럼 굳이 나누자면 그렇다는 거다. 

영화 '몽상가들' 중에서

프랑스인들은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존중해왔다. 금지를 금지하라, 구속 없는 삶을 즐기라했던 68혁명은 전 세계에 히피열풍을 일게 했으며- 당시 비틀즈 멤버들은 인도에서 요가를 하며 정신을 수양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혁의 중심에, 혁명적인 프랑스가 있었다. 3대째 내려오는 할머니의 까르띠에 시계를 차고는 중세시대에 지어진 건축물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어제와 다른 모습으로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온고지신일지도.

200년 전 나폴레옹은 미성년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근친상간은 범죄가 아니라며 법을 폐지했다. 사실 프랑스 이외의 유럽 전역에서의 사랑이 비교적 다양성을 띠는 건, 그들의 부유함과 더불어 그리스의 신들 영향 때문일지 모른다. 인간들에겐 금지되었었지만, 그리스 신들은 근친상간을 아주 많이 저질렀었다. 한마디로 근친상간은, 신의 영역이었단 뜻이다. 오이디푸스나 엘렉트라 증후군에서 이름들도 다 그리스식이다. 그리스와 인접한 이슬람과 무역했던 고려시대까지, 유교가 들어오기 전 우리나라도 근친상간이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전에 욕에 대한 칼럼을 쓴 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의 뜻이 근친상간에 관한 거였다. 국어에서 쌍시옷이 들어가는 것들의 대부분- 그리고 ‘motherf***er’같은 영어 표현에서도. 그래, 가족끼리는 그러면 안 되지. 그래서 궁금했다. 프랑스는 그럼 도대체 무슨 욕을 해?

프랑스는 영어를 제일 못하는 나라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사실, 일부러 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국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를 알고 나면 대부분은 수긍할 만큼, 불어가 매혹적이긴 하지. 그런 프랑스인들에게 엄청난 모욕감을 주고 싶다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빨레 푸랑세 꼼윈 봐쉬 에스빠뇰!’(Parler français comme une vache espagnole). ‘스페인 소가 프랑스어 하는 것 같네!’라는 뜻이다. 이거, 이들한테 욕 맞다.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지속적인 아무르(amour) 파티, 거리에서 당당히 몸을 팔며 화가의 뮤즈가 되었던 여인들. 그녀들은 화대를 받는 그 순간에도 우아하게 ‘Salut(잘가)’를 던졌을 것이며- 남자들 역시 끝인사의 품격까지 지불한 것이다. 

우리도 우리만의 이해와 위로의 역사가 있다. 미신, 과학- 이런 잣대를 집어치우고, ‘무당’이 그러하다. 무당들은 죽은 자와 산 자를 잇게 하였으며, 죽은 자와 ‘접신’하였다. 이해, under... stood... 상대방보다 낮은 자리에서 선다는 것. 무당들은 칼날 보다 높고, 죽은 자보다 낮은 곳에 서서 그들을 위로했다. 

영화 '파란만장' 중에서

난 한국인이지만 막걸리보다 아이리쉬 술이 좋다. 한국에 태어났지만 스페인어의 무드가 마음에 들어 스페인어를 시작했다. 이처럼 위로, 사랑, 모욕의 취향과 방법도 개인마다 다를 테지. 술잔을 채워주거나, 맛있는 걸 사주거나, 그냥 안아주거나. 소설<봉순이 언니>에서 읽었던 종마 얘기가 생각난다. 

어떤 소년이 마을 할아버지의 종마를 엄청 사랑했었다. 할아버지가 며칠 외출을 하게 되어 종마를 소년에게 맡겼는데 그만, 종마가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는 게 아닌가. 소년이 해줄 수 있는 거라곤 그에게 시원한 물을 떠다주는 것뿐. 하지만 종마는 끝내 숨을 거두고야 만다. 돌아온 할아버지는 비통해하는 소년에게, ‘아픈 종마에게 찬물을 주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지 몰랐느냐’고 다그친다. 소년을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제가 얼마나 종마를 사랑한 지 아시잖아요!’ 소년은 울부짖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말한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방법을 아는 것이란다.’

종마에게는 종마만의 방법이, 세비지 그레이스 속 베이클랜드 가문의 모자에겐 그들만의 방법이, 나에겐 나만의 방법이 있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 모욕하지 않는 방법, 위로하는 방법을 파악하는 것에도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런 방법을 알 수 있다는 것이 기쁠 때, 진짜 사랑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나만의 방법론적인 생각. 

'Hesiod and the Muse' - Gustave Moreau, 1891

살아있는 누군가가 별이 되게 하는 것, 그런 별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 음악과 술- 그리고 어리석음이 수반되어진- 실수가 용납되어지는 지나치게 순수하며 인간적인 그리스 신들. 나에겐 그런 위로가 있었으면 좋겠다. 구시대적인 그리스식의 위로. 지나치게 건조하고 추운 서울의 풍경에서, 프로메테우스가 훔쳐다 준 따뜻한 불에 마음을 녹일 거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