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의 두께로 낡은 하루가 완성되었다. 가끔 손을 넣어 가라앉은 나를 휘저어본다. (윤명선 시, <오후를 견디는 방법>중에서) 

[공감신문] 사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머뭇거렸다. 어떤 현상에 대하여, ‘내 생각에 그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라고 말하고 싶은데 내가 거기에 떳떳한 입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태연하게, 어차피 이 글을 읽으시는 어느 독자 분의 눈을 맞추고 이야기할 것도 아니기에 거짓으로 막 지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익숙한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에 일단 난 조금 피곤하니까. 

'Staying in with my best friend', Angela Deane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나 TV를 보다 잠드는 것에 익숙했었는데 어느 순간 그 조차 거슬려서 잠들 수가 없게 되었다. 작은 불빛도 거슬릴 때엔 안대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휴대폰 메시지 알림의 진동도 꺼놓는다. 그러다가 최근 빠진 건 ASMR이다. 취향과 기분에 맞는 백색소음을 설정해서 틀어놓고 잔다. 나는 따뜻한 장작불에 공허한 밤을 휘젓는 약간의 바람 소리를 섞어서 즐겨찾기에 추가해 두었었다. 아마도 차가운 계절의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사람의 목소리가 그리워졌다. 외국 출장이 잦은 룸메이트 한나가 없으면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내는 편이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일한다. 밖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지만 일상의 대화가 그리워진 것이다. 분명 나 같은 사람이 꽤나 많을 거란 생각이 스쳤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보니 사람 목소리가 나오는 ASMR이 있었다! 

영화를 틀어놓으면 되지 않느냐고? 영화는 그 세계 안에서 저들끼리 대화한다. 그래서 요 며칠 차분한 목소리의 ASMR을 틀어놓고는 잠에 빠졌다. 나는 거기에 대답할 필요도 없고, 경청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백색 소음일 뿐이니까. 이젠 조금 익숙한 목소리의 누군가는 나에게 ‘오늘도 고생 많았다’ ‘밖에 지금 되게 춥나봐, 오늘 왜 따뜻하게 입고 나가지 않았느냐, 내일은 따뜻하게 입으라’고 말한다. 나는 장작불 소리보다 따뜻한 그 백색소음을 들으며 스르르, 잠에 빠지는 일상을 보냈다. 

영화 ‘그녀(HER)’ 중에서

몇 년 전 영화 ‘그녀(HER)’를 보며, 정말 저런 일들을 눈앞에서 볼 거라 생각하니 끔찍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의 일상이 저것과 무엇이 크게 다르다는 말인가? 나는 그 영화의 주인공처럼 그녀에게 무엇을 궁금해 하거나, 같이 하고 싶은 것이 있거나, 기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찾는다. 이젠 내가 선호하는 음색과 말의 빠르기를 가진 ASMR채널 계정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이것을 들으면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구정 연휴엔 열이 펄펄 끓어 병원을 찾았다. 독한 약 때문에 평소답지 않게 숙면을 취하며 강제 휴식을 하다가, 일할 때가 되니 처방된 나머지 약을 먹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작업을 할 때엔 예민한 상태인 것이 나에게 알맞다. 그런데 좀처럼 둔한 기분이 들어 여러 잔 때려 마신 커피- 수면 패턴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작업을 마치고 스트레칭으로 굳은 몸을 풀어내면 다시 활발해지는 사고. 

그러고 보니 ‘너 오늘 고생했다’ ‘수고했다’ 이런 말 한마디 듣지 못한 나는 야식으로 무얼 먹어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느낀다. 일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반겨주는 이 아무도 없어 허탈하다는 여느 중년 가장의 심정을 조금 이해하는 지경에 이른다. 

ASMR을 튼다. 참신한 말을 건네지 않을수록 더욱 좋다. 그저 흔해빠진 단어들로 채워졌으나, 나에겐 희소한 그런 이야기가 듣고 싶은 거니까.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일어나 생각했다.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다고. 훗날 나 스스로에게 너무 미안해질 것만 같아서. 

생각해보면 그런 징후는 몇 달 전부터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칭찬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꾸 무언가를 새로 배우려 했다. 작년 초가을에 시작했었던 폴댄스도 그랬고, 얼마 전부터 시작한 스페인어도 마찬가지다. 모든 ‘기술’의 성질이 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언어의 기초는 쉬운 편이다. 어렵더라도 선생님들은 쉽게 가르친다. ‘어때요, 쉽죠?’라며 쉽다는 인상을 계속 심어준다. 

그래서 새로운 외국어를 배우기로 마음먹고 스페인어를 시작했다, 아마도 칭찬받고 싶어서. 더 많이 칭찬받을 기회를 만들기 위하여 1:1레슨을 받는다. 한국어를 못해서 영어로 날 가르치는 원어민 선생님은 나에게 ‘잘 했어요’ ‘수고 했어요’라고 하는 대신 스페인어로 ‘Muy bien!'이라고 해준다. 음, 그걸로 됐다. 

'Paws on Paws on Paws', Angela Deane

누군가로부터 ‘와-!’ 같은 감탄사를 듣고 싶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당연한 감정이다. 내가 수행한 어떤 일들이 대단치 않더라도 상관없다.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아침에 일어나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치자. ‘와- 무슨 물을 그렇게 많이 마셔?’ 이런 느낌의 감탄이라도 상관없다. 갓난아기일 때 도리도리 잼잼, 트림을 잘했다고 ‘아이구 잘한다!’라며 칭찬 받던 추억이 아직 나의 미끌거리는 뇌 어느 곳에 향연으로 남아있다. 

이전에도 여러 번 했던 이야기지만, 인간을 여기까지 발전시킨 건 ‘감탄’이라하지 않나.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했다면, 감탄은 인간이 닿을 수 없는 저 먼 우주의 법칙까지 연구하게 했다. 밥 잘 먹고 잘 싼다고 부모의 감탄을 받을 나이에 그렇지 못한 전쟁고아들은 실제로 학습 발달 속도가 느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건 성취욕의 문제인 것이다. 형제들 중 첫째들의 발달이 비교적 월등한 것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 부모들에게는 그 아이가 행하는 모든 것이 최초의 순간이자 기적일 테니까.

외동딸인 나 역시 어마무시한 감탄을 먹고 자랐고, 초등학교 시절 글짓기 대회에서 여러 번 상을 받게 되었었다. 할머니에게 칭찬을 받고 싶었지만 그녀는 글을 읽을 줄 몰랐다. 저녁밥을 지으려 부엌에 들어선 그녀의 뒤에 대고 글을 읽었다. 치그르르르르- 무언가를 볶는 소리 때문에 행여나 그녀가 어느 문장을 놓칠세라, ‘할머니 듣고 있어?’라고 여러 번 되물어가며 그녀를 괴롭혔었다. 할머닌 ‘아이구 잘 썼네’와 더불어 가끔씩 ‘잘나지도 않은 내 얘기는 뭐하러 쓰냐’는 이야기 외엔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아이구~’를 듣는 걸 정말 좋아했다.

요즘 TV에서 인공지능과 관련된 광고를 많이 접하게 된다. 주변에 아직 아이 가진 친구들이 많지 않아 이게 얼마나 상용화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중요한건 지금이 아니다.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될 테니까.

아이들은 인공지능에게 질문을 하고 스마트한 인공지능은 막힘없이 대답한다. 또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방식으로 그와 관련된 정보를 학습하게 한다. 아마도 이런 인공지능 기술이 더욱 보편화되면 부모들은 편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은 성취감을 배우지 못할 것이다. 

쉬이 얻은 정보는 인상적이기 어렵다. 물론 그 정보를 다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대부분 그러하니까. 하지만 적어도 아주 어린 시절 우린, 영어사전을 찾아보는 방법이라던 지, 옥편을 찾는 방법에 대해 배웠었다. 지식과 지혜가 있는 그 곳으로 향하기 위하여 운동화 끈을 묶는 방법을 먼저 배웠다는 것이다.

art work by David Stenbeck

지식과 지혜를 바로 가져다주지 않았다. 대신 그리로 달려가 그것을 획득했을 때에 감탄의 영광을 얻게 해주었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거기까지 해줄 수 있을까? 당신 이름 석 자만 겨우 그릴 줄 알던 우리 할머니보다 더 많은 어휘를 구사하며 참신한 칭찬을 건넬 수 있겠지만- 그녀의 ‘아이구~’에 비하지 못할 거라 감히 장담한다.

훌륭한 부모가 되는 방법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을지 모른다. 다양한 리액션과 감탄만으로도 아이는 크게 성장할 것이다. 청소년기에는 부모의 감탄이 좀 궁색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크게 두 가지 상황에서는 여전한 감탄을 선보인다. 학교 성적처럼 누구나 중요하게 여기는 것- 혹은 부모의 특질을 배운 것들이다. 이를테면 화가의 부모가 그림을 잘 그려 온 아이에게 ‘역시 넌 내 새끼야!’라고 하는 면모들이랄까.

인공지능을 유모삼아 자랄 지금의 아이들은 우리보다 사랑을 못할 지도 모르겠다. 상대방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이 사랑하는 감정의 시작이니까. 그에게로 향하기 위하여 제 손으로 운동화를 묶을 수 있을까? 재빠르게 뒷축을 꺾어 신고 손에 잡히기 쉬운 사랑만을 원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버리면 어쩌나, 쓸데없는 안타까움이 앞선다.

오늘 해야 할 일들을 거의 다 마쳐가는 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수고했다는 말을 듣기에 너무 늦은 시간이다. 또 여전한 하루로 끝나 버릴 것 같은 예감이다. 그래도 오늘은 그 따뜻한 ASMR을 외면하며 잠을 청할 생각이다. 이러한 글을 적은 나의 작은 책임감이다. 
 
그런 또 다른 나에게로 향하는 것이 스스로를 위한 사랑이기에, 뻐근한 발을 집어넣고는 운동화 끈을 끼워 넣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나에 대한 감탄은 또 누가 해줄 수 있지? 끝이 없는 질문의 끝은, 마치 야구하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며 득점을 맞이하는 듯하다. 하지만 홈베이스를 떠날 때의 나와, 돌아온 나의 모습이 분명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 조금의 뿌듯함을 느끼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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