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따운 마하야, 네 팽팽한 젖가슴과 네 탄탄한 허벅지는 오로지 너를 위해 너만을 위
해 신비로 포장한 관능 속에 그대로 남겨두어라 (김상미 시 ‘병 속에 든 편지’ 중에서)

[공감신문] 만일 누가 나에게 당장 한쪽 가슴을 도려내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첫째로 무서울 것이다. 살덩이를 마치 사과 한입처럼 가볍게 베어낸다고 상상하면- 어느 부위라도 그러한 기분이겠지. 그런데 심지어 그 부위가, 가슴이라니. ‘양쪽 말고 한쪽만-’이라 한다면 그것이 과연 안도할 일인가. 

어디가 아파서가 아니라 그냥 편의에 의해서다. 나에게서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을 삭제시키는 거 같은 기분이겠지. 홀로 남은 한쪽 가슴은, 가끔 내가 옆으로 누울 때마다 슬며시 기댈 수 있는 어깨가 없어져 허탈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아마존 여전사로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다행이란 말인가.

그림=Artwork by Mrzyk & Moriceau

헤라클래스 신화에 나오는 아마존의 여전사들은 한쪽 유방이 없었다. 오른손잡이냐 왼손잡이냐에 따라 아이를 안아 젖먹이는 방향이 달라지는 데, 거기에 편안한 쪽의 유방만 남겨두고 한쪽을 제거하거나 애초부터 묶어서 자라지 못하게 했다. 불로 지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들이 굳이 한쪽 가슴을 일부러 억제시킨 이유는, 가슴이 활을 쏘는 데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강인한 아마존의 여인들은 활을 잘 쏘려고 여성성을 제 몸에서 거두어냈다. 

아마존은 그러한 땅이다. 몹시도 강인한 땅. 희랍어에서 ‘없다’는 것을 뜻하는 ‘Ἀ’와 가슴을 뜻하는 ‘μαζών’이 만나, 아-마존(Ἀμαζών)이 되었다. 한쪽 가슴이 없다는 뜻의 지명이다. 

성경처럼 이전 시대 서구 문화권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문헌을 보노라면 할례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요즘에도 전통이라는 이유로 일부에선 여전히 행해진다고 들었다. 할례는 처음에 종교적 의식으로 시작되었으나, 과연 이것을 신이 반길만한 일인가 싶다. 그 의식 자체는 일단 너무 비위생적이며 위험하다. 

칼로 여성의 성기 어느 부분을 도려내거나 꿰매어 버린다. 누군가는 한 달에 한번 월경, 아니 하루에 한번 소변을 보는 것에도 끔찍한 고통을 느껴야 한다. 성적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쾌락은 온전히 남성들의 전유물이 되는 것이다.

누구나 그러하기에, 나도 그래야하는가. 과연 그게 정당한가- 생각했다. 아니다. 나는 아마존의 여전사가 되기를 거부한다. 

작가입니다, 어떤 글을 쓰십니까, 주로 칼럼을 씁니다, 어떤 주제의 칼럼을 쓰시나요, 잡다합니다만 주로 철학이나 사회 문화에 대한 것이 요즘은 많습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내가 누구나 ‘페미니스트’일거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지금처럼 크게 대두되기 전부터 그러했다. 내 글은 읽어보지도 않고 당연히 페미니스트일거라 생각한다. 자신의 목소리를 더 크게 낼 수 있는 직업을 가진 여자이기 때문이다. 글쎄, 내가 페미니스트인가? 

아마도 내 글을 이전부터 쭉- 보아오신 독자여러분이라면 느끼실 테지만 난 아마도 그 쪽과는 거리가 먼 편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그들을 부정하는 건 아니다. 굳이 흑백논리처럼 나누어 싸우자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 뜨거운 ‘미투 운동’은 남과 여 사이의 대립 때문이 아니다. 이건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와의 대립이다. 여성인 직장 상사가 남성 부하 직원에게 성적 수치심이나 모멸감을 주는 경우도 충분히 많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미투 운동에서 지목된 이들 중엔 레즈비언도 있다. 즉, 여성이 여성에게 그러했다는 것이다.

나는 미투 운동에 페미니즘 성격을 부각시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여성이기 때문에 겪었던 불편함이나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처음에 서지현 검사가 사법부에 대한 것들을 폭로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뉘앙스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젠더 불평등이 아닌 권력의 오남용에 대한 이슈였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입을 수 있는 ‘관행’이라는 망토는 놀라웠다. 그들은 그것이 투명 망토인줄 알았나보다. 그 두껍고 조직력이 촘촘한 망토를 입으면 어떤 일을 하더라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아니 눈 감아 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법에 대한 최고의 기관인 곳에서도 그 망토는 대물림되고 있었다. 그녀는 피해자들에게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말하고 싶다했다. 그 피해자는 남성이 될 수도 있으며, 가해자 역시 여성이 될 수 있다. 

군대를 가보지 않았지만, 군대에서 벌어지는 성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언론을 통해 종종 접했었다. 군대야 말로 철저한 계급 사회가 아닌가. 여기에서 벌어지는 성범죄 역시 권력형 성범죄이다. 

조선시대 궁녀들이 모실 수 있는 남자는 오로지 임금 한 사람이었다. 성적 호기심을 넘어, 그러한 욕망이 생길 때쯤- 왕의 눈에 들기를 포기한 궁녀들은 서로 동성애를 즐겼다. 과연 승은(承恩)은 옳은 표현인 것이다. 은혜를 받는다는 뜻인데, 어린 시절 사극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을 했었다. 드라마에서 왕 역할을 맡은 남자 배우가 너무 내 스타일이 아니었는데, 아무리 왕이라도 그렇지- 내가 만일 당시 궁녀였더라면 과연 저게 기쁜 일일까? 과연 저게 은혜일까? 

지금 생각해보니 은혜, 맞을지도. 궁에 들어온 이상, 어쩌면 목숨을 걸고 불장난을 치지 않는 이상 평생 남자를 몰라야했을 수도 있으니까. 몇몇 상궁들은 권력을 이용하여 마음에 드는 어린 궁녀를 일찍이 그렇게 취하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몇몇은 수동적으로 동성애를 경험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배우 이자벨 위페르를 정말 좋아한다. 영화<베일을 쓴 소녀>에서 그녀는, 소녀들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원장 수녀로 나온다. 수녀원의 ‘왕’인 그녀가 소녀들에게 행하는 짓은 매우 역겹다. ‘이 바닥이 이렇습니다’라는 것처럼, 그녀는 종교와 사랑으로 그것을 포장했다. 정말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지만, 혹 TV에서 그 영화가 나온다면 바로 채널을 돌릴 거다. 먹던 치킨도 내려놓을 수 있을 만큼 더러우니까. (하지만 이후로 이자벨 위페르가 더 좋아졌다. 저 여자는 연기로 지구 5등 안에 들 거 같다.)

영화 '베일을 쓴 소녀' 중에서

나는 잔다르크처럼 살고도 싶지만 아마존 여전사의 후예가 되고 싶진 않다. 여자로 태어나 행복함을 느낀다.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 스스로 ‘사회의 2등인 여자이고’라 쓰며 모욕당할 것에 대비하여, 미리 대응할 매뉴얼을 준비한다는 어느 여성 작가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세상은 자꾸 여성을 ‘쌈닭’으로 만든다고. 

나는 그 책을 끝까지 읽지 않고 덮었다. 공감이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모욕을 당하고만 있진 않을 테지만, 미리 매뉴얼을 준비하진 않을 것이다. 싸우지 않고 이길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를 테면 유머라던가. 부드러운 것이, 오히려 더 강한 법이다.

그러니 나는 양쪽 가슴을 움켜쥐고 살 것이다. ‘나 강인해요!’라고 마구 야수성을 드러내는 아마존이 아닌, 은하수가 되고 싶다. 어릴 적부터 기골이 남달랐던 헤라클래스를 먹여 키웠던 풍부한 젖의 길인 은하수. 그렇게 살자고 여성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모두 아마존의 여전사가 될 이유도 없단 뜻이다. 그저 ‘나’다운 여자가 되자는 거다. 

‘네 일이 활을 쏘는 것인데, 그렇다면 숙명을 거부하는 것이냐?’

혹시나 내가 신화 속 아마존에 태어났다면- 이런 질문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이렇게 답했을 거다. 

‘전 강에 가서 꼬챙이로 물고기를 잡아오면 안 될까요?’

시켜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한다면 그거야 말로 굉장한 폭력이 아닐까. 물론 안 된다고 했을 거 같지만. 그럴 바엔 그 곳을 빠져나와 최소한의 나를 지킬 수 있는 곳으로 숨어들 것이다. 평생 이방인 소리를 들을 지라도. 난 이렇게 또 글을 쓰며 또 한 번 화살을 당긴 것이다. 

그림=artwork by kalippodesign

자유와 평등, 정의에 대해 호소하려는 흐름 속에서 어느 순간- 전체주의적인 모습이 튀어나오려는 건 아닌지 방심해선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굉장한 폭력이자, 한 인간의 자유 의지를 꺾어버리는 행동이 될 것이다. 
 

* 본 칼럼은 우리 언론사의 의사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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