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상적인 지식은 혀에만 달콤할 뿐 영양가가 없다. 오래 먹으면 먹을수록 뇌와 뼈의 칼슘이 빠져나가 점점 더 허약해지기만 할 것이다.

[공감신문] 한 인터넷 신문에서 화제였던 어느 초등학생의 시를 본적이 있다. 강약의 기질 없이 간판 글씨처럼 강하게만 꾸욱꾸욱 열심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툰 글씨를 보아하니 저학년인 것 같았다. 그 시는 슬펐다. 

가난과 그리움의 감정이 점철된- 지난날 소소한 행복들을 왜 당연한줄 알았던가 후회하는 화자는 정말, 초등학생이랬다. 사람들은 ‘잘 썼다’고 했지만, 한편으로 난 너무도 어른스러운 이 아이가 슬펐다. 가난이 대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이 창문으로 나간다고? 아이야, 너의 천진난만함은 어느 문으로 빠져나간 거니?

'자화상', 안창홍(1999)

아이들이 쓸 수 있는 시어는 매우 한정적이다. 은유하고 싶은 대상은 주로 좋아하거나 마음이 쓰이는 것들인데, 가족이나 강아지, 먹을 것, 혹은 방귀나 똥 같은 것들이다. 물론 그것들을 무엇에 비유할지 역시 한정적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시는 굉장하다. 마치 식재료가 빈약한 어느 연예인 냉장고에서 15분 만에 뚝딱- 생각지도 못했던 멋진 한 끼를 차려내는 방송 프로그램 쉐프들 같다. 

그래서 어느 동시에서는 ‘할아버지는 몽땅 연필처럼 키가 자꾸만 거꾸로 자란다’고 했다. 또 어떤 아이는 ‘쿠*은 로켓배송! 거짓말! 트럭타고 배송하잖아요!’라고 했다. 아이는 칭찬받기 위해 쓰지 않았다. 대단한 비유가 중요한가? 토라진 연인처럼 쏘아붙이는 저 아이는 분명 시인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게 천진난만함 덕분이다.

이전의 아이들은 더욱 그러 했었다. 매주 TV에선 당대 훌륭한 꼬마 시인들이 투명한 은유를 펼쳤었다. 저들 스스로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MBC에서 방영되었던 <전파견문록>이라는 프로그램이었다. 아마 90년 이후 태어나셨다면 모르실 수 있다. 시간 제약이 없는 일종의 스피드 퀴즈처럼, 제작진이 어느 문제를 제시하면 아이가 그것을 자기만의 표현으로 문제를 낸다. 그럼 어른들이 맞추는 거다. 아이들의 이렇게 표현했었다. 
 

‘이 사람이 가고 나면 막 혼나요.’ …(손님)
‘아빠가 출장을 가도 계속 남아 있는 거예요’ …(걱정)’
‘내 양말에 빵꾸가 났는데 친구가 자기 집에 가재요’ …(콩닥콩닥)
‘차에 친구가 안 타면 안 탔다고 소리치는 거예요’ …(우정)
‘어른들이 어린이가 다 갈 때까지 보고 있어요.’ …(시골)
 

아이들의 눈이, 이렇게나 어여뻤다! 그 눈에 마구 뽀뽀를 해주고 싶을 만큼. 그리고 지금- 이젠 어른이 되었을 저 아이들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아마도 20대의 몸보다 늙어버린 표정으로 세상과 타협하며 튀지 말고 살자,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들에게 너무 많은, 지식이 더해졌기에. 때로 어떠한 지식들은 천진난만함에게서 자리를 빼앗는다. 

A clockwork orange X Salvador Dali, unknown

이탁오라는 중국 명나라 때의 사상가는 ‘동심이란 진실한 마음’이며 거짓을 끊어내는 것이라 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시선은 지식과 거리가 멀다. 사실은 아닐지 언정, 그것을 생각하는 마음이 진실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너무 많은 지식들이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다. 지식 혹은 지식 정보들이 모두 유용하거나 가치 있는 건 아니다. 대부분은 사실 몰라도 되는 것들이다. 정보 전달이 지금처럼 쉽지 않았던 과거 시대의 예술가와 과학자들은 더 많은 진실의 순간들을 마주했었다. 

감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던 뉴턴의 이론을 반박했던 어느 과학자는, 너무도 천진난만한 사람이었다. ‘도대체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에, 그는 대부분 그냥- 그렇게 ‘상상’했다고 했다. 미친놈 소릴 듣는 이 독일 과학자의 상상을 세상 밖으로 증명해낸 사람은, 당시 적국이었던 영국의 과학자 에딩턴이었다. 아인슈타인과 에딩턴,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들의 위대하고 은밀한 노력이 없었더라면- 과연 우린 상대성 이론을 알 수 있었을까. 

몇 시간의 식사를 하고, 한정적인 출판물을 읽어야 했으며, 외지에서 오는 손님도 드물었던 시절이 있었다. 많은 것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아느냐는 거다. 직업상 남들보다 조금 더 많이 읽고 공부하는 내가 알게 된 가장 중요한 지식은, 창의력이 지식보다 백배 더 값어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위에서 인용한 명나라의 사상가나 아인슈타인은 그저 나의 창의력이나 직관들을 효과적으로 피력하기 위해 쓴 것이다. 짜장면으로 치자면- 양파라고 볼 수 있지. 편의점 봉지 짜장면도 짜장 맛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집 맛을 내지 못한다. 그러니 저게 다 양파들이라는 거다.

다양하게 요리된 양파 같이 찬란한 느낌을 주는 모스크바 st.BASIL 성당, [pixabay/CC0 creative commons]

자, 그렇다면 이제 단무지를 한입 베어 무실 차례. 어차피 금방 잊혀질, 혹은 당신의 흥미를 유발시키지 않을 지식들은 쿨하게 거부하시라. 진실로 귀중하며 값비싼 능력은 직관이라고, 아인슈타인 역시 말했다. 너무 많이 아는 건, 우리의 천진난만함을 방해한다. 

준비한 양파를 조금 더 썰어 넣어도 된다면, 이러하다. 이드리스 샤흐라는 자가 말하길, ‘피상적인 지식은 혀에만 달콤할 뿐 영양가가 없다. 오래 먹으면 먹을수록 뇌와 뼈의 칼슘이 빠져나가 점점 더 허약해지기만 할 것이다. 관념의 세계를 떠나 생생한 현실 세계를 부딪치며 체험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동안 우리는 평범하고 쓸데없이 달콤하기만한 것들을 너무 많이 먹어 대서, 마음에 당뇨가 온지 몰랐을 수 있다. 그것은 직관으로 통하는 우리의 시력을 멀게 만들고 그것을 알고자 하는 생동감 있는 발가락을 잘라내게 했다.

길들여진 식성을 바꾸는 것은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계속 그러한 더부룩한 상태에 놓이길 원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조금 더 건강한 것들을 먹어야 한다. 단순하지만 가치 있는 것들을 냉장고에 채워 넣자. 직관이 길러진 쉐프가 된다면, 저 식재료가 어떻게 변화할지 마법을 부릴 줄 알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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