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고은 시, <낯선 곳>중에서

[공감신문] 그는 누군가가 대변해줄 만한 매력이 차고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건 그와 긴밀한 몇몇만이 알 수 있는 매력이었다. 나도 긴밀한 사람 중 하나였으며 거기에 걸맞는 형용사와 비유도 알고 있었으나, 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한 누군가의 오해도 해명할 수 없었다. 넌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고 물을 게 뻔하니까. 단순히 ‘친하다’는 말로는 표현하기엔 넘쳤다. 

여자친구냐고? 아니었다. 사람들은 왜 ‘내가’ 아는지 더욱 궁금해 했다. 그러게, 우리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난 그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그의 매력을 대변할 수 없었다. 지금도 그 대답은 모르겠지만 다른 답을 하나 얻게 되었다. 관계를 정의하려는 순간, 오히려 더 모르는 것이 되거나 심지어 왜곡된다는 것을. 

artwork by Kimia Ferdowsi Kline

매력과 약점, 치부, 과거, 주특기… 그를 알아가는 과정은 즐거웠다. 아니, 발견해 나가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시간을 함께 했었는데, 그 와중에 서로를 조금씩 알아갔었다. 그 시간들은 따뜻했고 때론 생경했으며, 유익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래서 너희는 무슨 사이야?’라고 물을 때에, 왜 난 슬퍼졌는가. 모락모락한 기운으로 점철돼 있던 아름다운 시간들을 망쳐버리는 제3자들의 쌀쌀맞고 가벼운 호기심. 그에게 연인이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이 질문에 떳떳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날 옥죄였었다. 

우리의 관계는 날씨처럼 변화했다.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처럼 일정기간 고정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서로가 누군가에게 ‘아는 사람’이라 불렸을 때의 서운함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노력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의 마음을 사랑스럽게 방심할 수도 없었다. 

세상이 뭐라고 부를 수 없으니 더욱 둘만의 느낌이었다. 우린 서로에게 궁금해 할 수 있고, 어느 정도 침범할 수 있는 권한을 내어주었다. 그건 둘 사이에 합의된 것이었는데, 세상 밖에선 그러면 안 된다고 하는 것 같았다.  

MADHVI PAREKH 'The magician'

도대체 관계란 무엇일까. 사전적으로는 둘 이상의 사람이 빚어내는 개인적이고 정서적인 유대이며 추론, 사랑, 연대, 일상적인 사업 관계 등의 사회적 약속에 기반을 두는 것이라 정의된다(위키백과).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서적인 유대보단 ‘사회적 약속’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관계를, 곧이곧대로 받아 들여도 되는 걸까? ‘관계’는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가. 

이를 테면 부부라 치자. 부부라는 관계는, 사회적으로 섹스가 합의됐으며 합법적인 사이다. 섹스를 거부하는 것 역시 이혼 사유에 해당한다. 하지만 요즘은 섹스리스 부부가 정말 많다. 그러나 이들 역시 ‘부부’이다. 누군가는 부부를 가족 구성원이라는 쪽에 포커스를 두었다. 이를테면 ‘장모님 딸’, ‘시아버님 아들’로 생각한다든가. 

‘썸’이란 단어는 신조어다. 이전에 연애했던 어른들, 혹은 연인이 되기 전 데이트를 하는 다른 문화권 사람들에게도 그런 과도기적(?) 시간이 존재했을 테지만, 이렇게 딱 정의하진 않았었다. 우리의 편의에 의해 ‘썸’이란 단어가 생긴 것이다. 

관계의 정의가 가장 모호한 건 단연, 남녀 사이. 이들은 굉장히 여러 가지로 레이어드된 정서를 가지며, 그 온도차는 개인과 시간경과에 따라 매우 다르다. 이들 사이에 온도는 몹시 중요해서, 마치 물이 공기나 얼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성질이 아예 바뀐다. 유연성을 넘어선 변화무쌍함이다. 

애인이나 남친여친, 썸 등 보편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일곱 카테고리로 누군가가 나눠 놓은 게 있다. 관계를 형성하기에 앞서 이들은 서로 끌림을 느끼는데, 일단 끌림의 유형도 7가지다. 우리가 아는 성적 혹은 플라토닉 끌림 외에- 성적이지는 않으나 시각이나 후각, 촉각 등의 신체 접촉을 원하는 ‘감각적 끌림’이 있다. 

완전 플라토닉 하지도, 완전 로맨틱하지도 않지만 정서적인 친밀감을 원하는 정서는 ‘얼터러스 끌림’이라 한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단 말들을 종종 하는데, 아마도 얼터러스 끌림일 경우에 그런 가능성을 열어 둔 거라 볼 수 있다. 

심리학자 도로시 테노브는 끌림에 의한 도취상태를 분류하며, 이후 두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결합의 상태 중 몇 가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이 분류에서 정의하는 ‘무성애자’는 두 사람 사이에서 상대방에게 성욕을 느끼지 않는 다는 것이다.)
콰지섹슈얼 관계 : 둘 중 한 사람은 무성애자이지만 성적인 교감을 포함하는 관계
콰지플라토닉 관계 : 감정적인 연결과 친밀감을 기반으로 하지만, 로맨틱은 아닌 관계
소프트로모 : 낮은 정도의 로맨틱한 관계로 콰지플라토닉과 로맨틱의 중간 어디 즈음

우리가 흔히 ‘썸’이라고 부르는 관계는 소프트로모에 가깝다 할 수 있다. ‘소울메이트’같은 남녀 사이에서 정말 ‘친구’라 말하려면 완전히 ‘플라토닉’한 관계여야 하는데, 그것을 ‘aromate [aye-ro-mate]’라 한다. 반면, 여기에서 말하는 소울메이트는 깊은 친근감, 유사성, 사랑, 연정, 편안함, 신뢰, 정신적인 부분과 성적인 친밀감까지 가지는 상대를 가리킨다. 

심리학자와 철학자, 뇌과학자들과 종교학, 문학자와 수학자, 물리학자와 천문학자 등 탐구욕이 대단한 이들에게 사랑은, 시대를 불문하고 인기가 좋은 연구대상이었다. 로버트 스텐버그란 학자는 친밀감-열정-결심/헌신이 어떻게 결합하느냐에 따라 사랑이 여러 가지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열정만 있는 경우는 ‘도취성 사랑’, 결심과 헌신만 있는 경우는 ‘공허한 사랑’, 열정과 헌신이 결합되면? 그건 ‘얼빠진 사랑’이랬다(…) 이 모든 것이 다 조화로울 경우는 ‘성숙한 사랑’이요, 모든 것들이 부재한 모습은- 사랑이 아니랬다. 

나는 오늘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자료를 찾다가 스텐버그의 이러한 분류를 처음 알게 됐다. 아, 이걸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면! 아마 그랬다면 제3자들이 무심코 던진 질문 때문에, 어느 소중했던 관계를 억지로 왜곡하거나 끼워 맞추려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와 나 사이엔 친밀감과 헌신이 있었으나 열정과 결심이 없었다. 스텐버그식에선 그걸 ‘우애적 사랑’이라 부른다고 했다. ‘우애’라는 것엔 떳떳할 수 있었으나, 그와 나 사이에 ‘사랑’이란 말을 꺼낼 수 없게 만드는- 참을 수 없는 그 단어의 무거움이란…. 그러나 ‘우애적 사랑’에 아마도 띄어쓰기를 안 해도 된다면 그러고 싶다. 그래, 우린 우애적 사랑을 하는 사이였어.

물론 스텐버그식의 사랑 분류도 대단히 충분한 건 아니다. 하지만 날씨처럼 변화했던 누군가와의 관계- 그 드라마를 지칭할 장르라도 알게 된 기분이랄까. 

두 사람 사이 어떠한 형태의 끌림과, 그걸 인지 가능한 온도가 지속된다면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시작된 거다. ‘사이’는 두 사람만의 간격이다. 거기에 개입하는 것이 어떠한 색인지 사실 우린 알 수 없다. 빛의 굴절을 어떻게 받아들일 지- 그건 너무도 주관적이기에.  

MADHVI PAREKH 'CAMBODIAN LANDSCAPE'

그러니 ‘아기가 만들어낸 말의 새로움으로 / 할머니를 알루빠라고 하는 새로움으로’ 관계와, 관계하자. 너무도 다양한 매커니즘 속에서 관계 맺는 지금 우리들에겐, 다양한 말과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들은 아기가 만들어낸 말 일수도 있고, 그 중에선 아기를 만들어낼 수도 있는 새로운 말이 될 지도. 그렇게 된다면 사회의 이해, 거기에 들지 못했다는 어떠한 소외감 때문에 관계를 왜곡하거나 오염시키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될지 모른다. 

돌이켜보니 그만큼 멍청한 실수가 어디 없다는 막연한 후회가 불쑥, 불을 켰다. 이름이 없어 슬프다는 아이에게, 남의 이름을 가져다 부르느니- 아이에게 어울리는 새 이름을 붙여주자. 이름을 불러줄 때에 그에게로 가 꽃이 된다는 누군가처럼, 관계도 문 앞에 다가온 봄을 맞아 환한 미소를 맘껏 뽐내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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