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짙은 일자 눈썹, 깊은 눈, 야무진 입, 틀어 올린 검은 머리, 무표정. 아아, 프리다 칼로.

처음 프리다 칼로의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지독한 고통에 시달렸다. 나를 응시하는 그녀를 마주보기 힘들었다. 캔버스에 그려진 자화상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감히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감상이 계속 될수록 칼로의 감정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고, 결국 마음 안에 쓰린 감정을 가득 담은 채 그녀의 전기를 읽어 내려갔다.

칼로는 장차 의사가 되고자 했던 평범한 소녀였다. 자신이 화가가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1925년 9월,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 째 바꾼 교통사고를 겪게 된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알레한드로와 함께 본가인 코요아칸으로 향하던 중,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면서 그녀의 몸 여러 부위가 탈골 되고 부러지고 골절 된다. 게다가 쇠봉이 그녀의 자궁을 관통해버렸는데, 그 고통은 가히 상상할 수 없다. 이 사고로 인해 칼로는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가며 수십 차례의 수술을 받아야했다. 

사고 이후 그녀는 두 번째 교통사고를 당한다.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혼. 두 사람의 덩치 차이로 인해 ‘비둘기와 코끼리’라는 귀여운 애칭이 붙었지만, 이들은 디에고의 여성편력으로 두 차례의 이혼과 재결합이라는 파란만장한 결혼 생활을 했다. 게다가 디에고는 칼로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칼로는 디에고와 영원히 함께 하길 원했다. (“디에고는 내게 모든 것이었다. 나의 아이, 나의 애인, 나의 우주.”) 

칼로는 디에고와의 아이를 간절히 원했지만 모두 유산했고, 유산된 아이는 캔버스 위에서 다시 태어났다. 칼로의 붓질은 손목을 깊숙이 그어버린 칼질처럼 처절했다. 그녀가 토해낸 감정은 날 것 그 자체였다. 1954년 7월, 프리다 칼로는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일기에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남긴 채.

디에고 리베라는 칼로의 사후에 그녀가 나고 자란 코요아칸 집을 나라에 기증하고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Casa Azul (푸른 집)’이라는 이름처럼, 박물관 외벽에 칠해진 푸른색은 시선을 압도했다. 나와 S는 매표소에서 입장권과 사진 허용권을 구매하고 안 마당에 들어섰다. 작은 정원을 지나 갤러리로 들어가니, 그토록 마주하길 염원하던 칼로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책이나 스크린이 아닌, 실재하는 칼로의 작품 앞에 선 순간 느낀 건 고통 섞인 환희였다. 나와 칼로 사이엔 이제 아무것도 없다. 나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 걸었다. 자화상과 초현실적인 이미지들이 주를 이루었다. 프리다 칼로를 초현실주의라고 평하는 자들도 있지만, 칼로 본인은 자신이 초현실주의 계보에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보니 칼로의 그림은 초현실주의가 아니었다. 그녀의 삶, 그 자체였다. 

벽면엔 칼로가 생전에 했던 말들이나 일기에서 발췌한 문장들이 스페인어와 영어로 적혀있었다. 한 구역을 지날 때마다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곱씹었다. 내가 이해한 말이 있고, 이해하지 못한 말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나직이 따라 읊었다. 

 

프리다 칼로 박물관은 칼로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활상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다. 특히 칼로의 작업실과 침실이 인상적이었다. 작업실에 있는 이젤 앞엔 낡은 휠체어가, 침실 구석엔 목발이 있었다. “나는 다친 것이 아니라 부서졌다. 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 있음이 행복하다.” 칼로의 말이다. 그녀의 부모님은 온 몸에 깁스를 한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칼로를 위해 침대의 지붕 밑면에 거울을 설치한 캐노피 침대와 이젤을 마련해 주었다. 이는 그녀가 평생을 두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칼로는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라고 말했다. 나는 침대 곁에 서서, 거울에 비친 자신을 면밀히 관찰하며 캔버스에 자신의 모습을 그렸던 칼로를 상상했다.

그녀의 방을 구석구석 탐미하고 출구로 나왔다. 아까 보았던 정원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건물 안쪽에 마련된 정원엔 갖가지 나무와 꽃이 자라고 있었다. 마당 한 편엔 칼로에 관한 영상이, 별채엔 그녀가 생전에 착용했던 액세서리, 옷, 의료기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십칠년이라는 짧은 생의 단면들이 푸른 집 곳곳에 스며들어있었다.

‘프리다’는 독일어로 평화를 뜻한다(칼로의 아버지는 유태계 독일인이다). 하지만 칼로의 삶은 평화와 거리가 멀다. 끝없는 고통이며, 투쟁이며, 혁명이었다. 이제는 주인 없는 집이 되어버린 푸른 집. 하지만 매일 그녀를 기억하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 한, 프리다 칼로는 영원히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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