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포위하는 전략적 거점…1879년 일본 합병 이전에는 독립왕국

[공감신문 김인영 기자]  오키나와 열도는 원래 일본땅이 아니었다. 137년전인 1879년 일본에 합병되기 이전까지는 중국에 조공하는 독립왕국이었다. 이 열도는 일본과 중국, 미국에 둘러 싸여 있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기 때문에 슬픈 역사를 안고 있다. 아직도 미군기지 논란에 휩싸여 있는 오키나와의 과거와 현재를 살펴본다.

일본 오키나와현은 규슈 가고시마현에서 대만 사이에 활처럼 휘어져 있어 류큐호(弧)라고도 한다. 오키나와, 다이도, 미야코, 야에야마, 그리고 중국과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센가쿠등 크고 작은 140개 섬으로 구성돼 있다. 총면적은 2,266㎢으로 우리나라 제주도(1,847㎢)보다 약간 넓다. 그러나 오키나와현의 해역 넓이는 일본 관할수역의 30%를 초과한다. 해상면적이 일본 육지면적의 1.1배나 된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중국 대륙을 활처럼 포위하고 있는 항공모함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전략적 중요성을 갖는 곳이기도 하다.

①1416년 류큐 통일왕국 수립

오키나와는 10세기경부터 부족국가가 출현했다. 안사(按司)라고 불리는 족장들이 지배했고, 족장들의 지위는 평등했다. 12세기경 부족들이 병합되면서 오키나와 섬에는 산남(山南), 중산(中山), 산북(山北)의 세왕조가 들어서 이른바 삼국시대가 열렸다. 1372년 명태조 주원장은 류큐 3국에 조공을 바치도록 해 세나라는 중국의 조공국이 된다.

1416년 중산국의 왕 파지(巴志)는 북쪽의 산북왕국을 병합하고, 이어 1429년 남쪽의 산남왕국을 정복해 삼국을 통일한다. 슈리(首里)성을 수도로 정하고, 명나라에 조공을 한다. 명나라 선종은 파지에게 상(尙)씨라는 성을 하사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세종임금 때다.

이때까지만 해도 류큐(琉球)왕국은 중국의 조공국이었고, 일본으로부터는 독립왕국이었다. 당시 일본은 각지의 유력자들이 세력 다툼을 벌이는 전국(戰國)시대였고, 류큐를 세력권에 둘 여력이 없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조공국으로는 조선 다음으로 류큐를 우선시했다. 류큐왕국은 중국과 일본, 조선을 비롯해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중개무역을 해 국부를 축적하고 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②임진왜란 지원 거부하다 일본의 침공 당해

1587년 규슈(九州)를 평정하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8개월전인 1591년 8월 사쓰마번(지금의 가고시마)을 장악하고 있는 시마즈(島津)가문에게 조선 침략을 위해 1만5,000명의 군역 부담을 명했다. 이에 그해 10월 시마즈는 류큐왕국에게 병력 징집을 하지 않을 터이니, 7,500명이 10개월간 먹을 군량미 1만1,250석과 황금 8,000냥을 상납하라고 요구했다. 류큐왕은 이를 거부하고,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 도요토미의 조선침략 계획을 보고했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사쓰마번은 류큐 사신을 억류하고 군사 7,000명의 10개월치 식량을 조선에 상륙시킬 것을 강요했지만, 류큐는 거부했다. 아울러 류큐열도 북쪽 5개 섬을 사쓰마에게 넘기라는 요구도 거절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이 새 막부를 열었다. 1609년 3월 사쓰마의 다이묘는 도쿠가와의 승인을 받아 3,000명의 병력과 선박 80척을 동원해 류큐왕국을 침략했다. 이유는 임진왜란때 협조를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4월 5일 수도 슈리성이 점령되고, 류큐 국왕과 100명의 고관들이 사쓰마번으로 납치됐다. 복종을 거부한 충신은 펄펄 끓는 기름 솥에 던져졌다. 왕과 신하들은 도쿠가와에 대한 복종을 서약하고 2년 6개월만에 풀려나 돌아왔다. 사쓰마번은 그후 류큐 수도 슈리성에 감독관을 보내 내정을 간섭했다. 그리고 북부 5개 섬을 사쓰마번에 할양했다. 지금 류큐 열도의 북단 5개섬이 가고시마현에 속하게 된 사연이다. 이때부터 류큐는 중국과 일본에 조공하는 이중속국으로 전락했다.

류큐국의 왕궁 슈리성
③청나라 밀사파견 사건 계기로 류큐 병탄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의 주역이 류큐왕국에 가장 가까운 큐슈 사쓰마번 출신들이라는 사실이 또다른 비극을 몰고 왔다. 가고시마 무사 출신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는 같은 지역 출신으로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를 축출하고, 류큐 병탄론을 주장했다. 1872년 오쿠보는 류큐국왕에게 메이지유신 축하사절단으로 도쿄로 불러들였다. 그리고선 류큐 국왕을 일본 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부여한다는 칙서를 내리고, 류큐를 일본 외무성 관할하에 둔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1875년 오쿠보는 외무대신 마쓰다 미츠유키(松田道之)를 류큐에 파견해 청나라에 조공을 금지할 것과 미국과 프랑스, 네덜란드와 맺은 외교관계를 단절할 것을 요구했다. 왕국의 운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사실을 인지한 류큐국왕은 청나라에 임세공(任世功) 등 3명의 밀사를 청나라에 보내 원조를 요청했다.

3인의 밀사는 류큐가 국왕의 친서를 올리고, 당시 청나라 실세였던 이홍장(李鴻章)에게 요청했다. 당시 청의 주일공사 하여장(何如章)은 류큐에 함대를 파견해 무력으로 일본을 축출하자고 강경론을 폈지만, 이홍장은 몇 개의 섬을 위해 군사력을 동원할수 없다며 외면했다. 철석 같이 믿었던 종주국의 거절에 밀사들은 절망감에 빠졌다. 그들은 이홍장 관저 앞에 꿇어 앉아 “류큐 신민으로 살아도 일본인으로 살수 없다. 대청제국은 조속히 출병해 류큐를 구해달라”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 그러나 이홍장 관저의 대문은 열리지 않았다. 이홍장을 만나지 못한 임세공은 남동쪽 류큐왕궁을 향해 세 번 절한후 비수로 심장을 찔러 자결했다. 1907년 조선에서 이준 열사의 자결 이후 고종 황제를 퇴위시킨 바 있는 일본은 앞서 류큐에서 그런 만행을 저질렀다. 청나라에 밀사를 보낸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일본은 류큐를 먹어버리겠다고 결심했다.

1879년 3월 27일 일본 정부는 500명의 병력을 류큐로 급파해 슈리성을 무력 점령하고, 4월 4일 류큐번을 폐지하고, 오키나와현을 둔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그리고 류큐의 마지막 왕 쇼타이(尚泰)를 폐위시키고 도쿄로 압송해 유폐시켰다. 이로써 류큐왕국은 450년만에 역사에서 사라진다.

 

④미국의 류큐 3분론→일본의 2분론

류큐가 일본에 병탄되자 미국 18대 대통령을 역임한 율리시스 그랜트가 급거 베이징을 방문했다.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그가 노구를 이끌고 40일간 지루하게 여객선을 타고 베이징까지 간 것은 류큐가 일본의 손에 넘어가 동북아시아의 세력 균형이 깨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홍장을 만나 류큐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청나라가 류큐를 포기하면 나중에 크게 후회할 것이라며 ‘류큐 3분안’을 꺼냈다. 류큐 북부는 일본이 관할하고, 중부는 청과 일본이 공동관리하고, 남부는 청나라가 관할하는 방안이었다.

이홍장은 “류큐를 일본에 할양해줄수 없다. 그러나 힘이 따르지 않는다”면서 그랜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그랜트는 도쿄에 들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만나 3분안을 제시하며 류큐 할양과 관련해 청나라와 협상을 권고했다. 국제적 간섭이 나타날 조짐을 보이자 일본에서는 그랜트의 3분안 대신에 2분안의 수정안이 제시됐다. 즉, 그랜트의 3분안 가운데, 중부와 북부는 일본이 지배하고, 남부는 중국이 관할한다는 것이다. 그랜트의 3분안 그림은 그대로 두되, 일본이 3분의2를 먹겠다는 방안이다. 1880년 10월 류큐 2분안 초안이 청나라 총리아문대신 심계분(沈桂芬)과 일본 이토 사이에 서명됐다. 그러나 이홍장은 비준안에 서명하지 않고 끌었다. 비준을 하자니 명분을 잃고, 거부하자니 일본의 보복이 두려웠다. 청의 비준 지연은 일본의 류큐 병탄을 저지하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다만 류큐 병합에 대한 묵시적 승인으로 간주되었다.

⑤장제스의 무관심…카이로 선언서 제외된 류큐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3년 11월 이집트 카이로에선 미국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윈스턴 처칠 총리, 중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이 만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류큐는 일본에 의해 불법 강점당한 군도다. 류큐는 중국과 지리적,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에 있다. 원한다면 류큐 군도 전부를 중국에 주겠다”고 제안했다. 미국이 류큐를 거저 주겠다는데 장제스의 반응은 의외로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루스벨트가 다시 제안했다. “류큐는 대만에서 규슈까지 서태평양을 둘로 가르는 중국의 안보 방파제다. 그 전략적 가치는 매우 크다. 중국이 대만만 탈환화고 류큐를 확보하지 않는다면 대만은 물론 중국 본토의 안보를 위협받게 될 것이다.”

루스벨트는 류큐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장제스는 “중·미 양국이 공동으로 신탁관리하는 게 좋겠다”면서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때 장제스가 왜 류큐 반환에 적극적이지 않았는지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하고 있다. 당시 카이로 회담에서 조선은 독립시키고, 만주와 대만, 팽호도는 중국으로 반환된다는 중대한 결정이 이뤄졌지만, 류큐는 제외됐다.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는 역사의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앞서 청말 이홍장이나, 중국 장제스나 류큐엔 관심이 없었다. 대륙국인 중국의 고위층들이 해양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고, 후에 이를 깨달았을땐 이미 늦었다. 이에 비해 일본과 미국등 해양세력들은 류큐 열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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