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스페인어를 배우고 있다. 스페인어의 주어 형태는 좀 독특하다. 첫 수업 때 ‘나는’(I) ‘Soy’(쏘이)라고 배웠다. 그런데 ‘나는 -를 좋아한다’고 할 때, ‘나는’은, Me(메)로 쓴다고 했다. 어느 노래 가사에 ‘메 구스따 뚜(Me gusta Tu)- 뚭뚜룹 좋아해요-‘가 생각나서 쉽게 외웠다.

난 해수, 난 한국인, 난 널 좋아해- ‘쏘이 해수, 쏘이 꼬레아나. 메 구스따 뚜’. 어느 날 선생님이 안부를 묻길래, 그날 몸이 좀 아파서 ‘쏘이(나는) 엔페르마(아프다)’라고 했다. 그러자 선생님은 ‘아닐 걸?’하며, ‘에스또이(나는) 엔페르마’라고 하랬다. 응? 그 ‘나는’은 또 뭔데!  

어떤 ‘나는’으로 칠해야 맞는 걸까? = Artwork by Alexandra Dillon

쏘이 엔페르마(soy enferma)는 ‘ 미친 사람이야’고, 에스또이 엔페르마(estoy enferma)는 ‘ 아파’라는 뜻이랬다. 쏘이는 내게서 변치 않는 것을, 에스또이는 변할 수 있는 걸 말할 때 쓴다. 예쁘다는 뜻의 ‘guapa’ 앞에 어떤 ‘너는’이 붙느냐 에 따라, ‘넌 원래 참 예쁘다’가 될 수도 있고 ‘너 오늘 따라 예쁘다’가 될 수도 있는 거다. 

그날은 아팠고 지금은 또 멀쩡하다. 선생님이 안부를 물었을 때, ‘난 원래 아픈 애야.(미친 애야)’라고 대답했던 거다. ‘아닐 걸?’이라 답해주어, 새삼 고마울 따름. 

스페인어에 대해 말하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들의 구분이다. 내 이름, 국적, 직업, 성별 같은 건 아마 한동안 변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지금의 기분, 머무는 장소, 그날 내가 풍겨내는 무드 같은 건 달라질 수 있다. 나이도 마찬가지. 불과 몇 달 사이에- 앞자리가 바뀌었으니까. (‘영원히 스물다섯 오 곱하기 오 bae bae’스런 맘이니, ‘쏘이 스물다섯!’하고 싶다)

우리는 모두 성격을 가진다. 이것을 ‘쏘이’ 뒤에 붙을 것처럼 말할 수도 있다. 원체 밝은 사람, 우울한 사람, 똑똑한 사람, 예쁜 사람- 그렇게 고유의 성질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혈액형이나 별자리 보듯이, 이전엔 몸의 체액으로 성질이 나뉜다고 생각했었다. 이 체액설은 혈액형처럼 4가지로 분류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중에서도 검은(chole) 담즙(melan) 유형 사람들이 대부분 우울하며, 예술가들이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우린 우울함을 ‘멜랑꼴리(melan-choly)’라고 하게 되었다. 이건 고대 그리스에서 나온 말이지만, 스페인어로 ‘쏘이 멜랑꼴레아-‘하면 ‘내 검은 담즙형 사람이야’란 뜻이고, 에스또이 멜랑꼴레아-하면 ‘나 지금 검은 담즙을 분비중이야!’가 될 것이다. 

Agnes Obel 'Dorian' M/V 중에서

난 어떤 체액의 사람일까? 이전엔 검은 담즙이었던 거 같은데, 오늘 낮의 난 점액질의 사람이었다. 점액질 유형들은 갈등을 피하고자, 그냥 ‘네 말이 맞아’라며 차분해지려는 성향을 보인다고 하더라. 

그래서 눈길을 달리는 버스에 올라타, ‘오만원짜리 거슬러 주나요?’라고 묻는 어느 아저씨가 기사님과 싸우는 걸 보기 싫었던 나는, 내 카드를 대신 찍어줄까 잠시 고민했었다. 다행히(?)도 버스 기사님은 ‘쏘이 점액질’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혹은 나처럼, 에스또이 점액질이었거나. 음- 근데 ‘쏘이 멜랑꼴레아’라는 사람들은 어쩌지? 그들을 구출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검은 담즙 앞에 고집불통 ‘쏘이’가 붙는 것처럼, 아마 세상도 한동안 변하지 않을 듯하다. 세상은 누군가의 검은 담즙을 분비 시켜서 그의 얼굴을 팥죽색으로 만들지도. 이걸 어쩐 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내가 변하는 것이 현명하다. 하지만 당시 혈액형처럼 믿었던 ‘체액’의 성질을 바꾸는 건 쉽지 않은 일. 아마도 여기 쓸 수 있는 묘약은…  이거 하나뿐이겠지, 바로 사랑이다.

요즘 세상은 우리에게 ‘스스로를 사랑하라’고 강조한다. 그야말로 대놓고 고독감을 조장시키는 행위다. 자신에 대해 파악하고 끊임없이 정체성을 확인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사랑의 대상은 타자가 되어야 한다. 우린 타자를 통해서 ‘나’를 확인할 수 있으며 성장시킬 수 있다. 우린 사랑에 대해 아직까지 완벽한 정의를 들어본 적 없지만, 본능적으로 사랑이 사랑인 줄 안다. 맑은 열정이 불같이 타오를 때에, ‘사랑=너’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것 역시 지나고 보니 쏘이가 아닌 에스또이였다는 걸, 우린 누구나 경험해 보았다.

타자의 마음은 변화무쌍한 ‘에스또이’다. 누군가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신에게도 떳떳할 만큼 진실이더라도 그것이 당장 몇 분 뒤에 변할 수도 있다. 막스 뮐러의 소설 '독일인의 사랑'에선 어린 아이의 동경이 가장 순수하고 깊은 사랑이라 했다. 세상을 포용하며, 서로의 목소리에 환호하는 사랑! 퍼도 마르지 않는 분수... 그래, 아주 어릴 적엔 정말 그런 사랑을 믿었어. 근데 그 사랑의 행방이 묘연해 보인다. 소설에선 여기에, 비극적 대답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생애의 절반도 살기 전에 그 사랑이 대부분 사라져 버리고 극히 일부분만 남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세상에 타자라는 존재가 있음을 깨닫게 되면서 동심의 순수한 세계와는 멀어지게 된다. (중략) 그것은 공포와 빈곤을 지닌 사랑, 용솟음치는 격정과 불타는 열정을 지닌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에 거부당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배신도 당한다. 내가 사랑한다고 상대방도 무조건 날 사랑하는 게 아니었다. 사랑을 주는 것에도 자격이 필요해 보인다. 이미 유아적인 사랑은 당신을 떠났다. 그러니 타자의 변화무쌍함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Erik Jones ‘The Pull’

물론 그 타자는, 나 역시도 변화시킨다. 사랑하는 이들은 서로의 것- 혹은 두 사람의 것들을 시도하며 또 다른 자신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그렇다면 누군가의 검었던 담즙은 노란색으로 변화될 수도, 또 우리가 본 적 없는 어떠한 빛깔을 띨 수도 있다. 자기 마음의 주인인 타자를 인정하지 않으면, 그저 유아처럼 풋풋하게 사랑하면 된다. 대신 당신의 체액은 아마도 쏘이같이 한 톤을 유지할지도 모르지. 

중요한 건- 이렇게 체액을 변화시킬 만큼 사랑스러운 타자를 만날 기회가 흔치 않다는 것이다, 혹은 지레 겁먹거나. 

세상에게도 체액이 있다면, 그 체액이 변화한 것 같은 착시효과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 한편으론 에스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되, 쏘이라 믿는 굳건한 믿음으로, 그렇게 타자에게 나아가야 한다. 
 

‘그이가 말했다. / 생각해보니,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대답했다. / 집어 쳐요, 그딴 말 / 생각하지 않고 사랑할 순 없어요/
그러자 그는 심각해졌다. / 방금 그 말, 생각해볼 문제야.’ 
 

장정일의 시 '내 애인 데카르트'다. 합리적인 데카르트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고는(!) 이것이 이성적 판단을 얼마나 방해(…)하는 지 연구했다고 하지. 그래요 데카르트- 당신은 이미 충분히 위대해요. 사랑까지 잘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 같아요.(…) 전 레비나스같이 사랑할게요. 

지금 아는 난 과거의 나, 새로운 나의 발견은 온전히 타자에게서 가능하다. 타자를 외면하라는 이 세계 안에서, 난 아랑곳 않고 타자에게 총총 눈 맞출 것이다. 그러니 내 체액아- 넌 늘, ‘에스또이’로 입을 떼려 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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