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를 알아차린 존재는 수치와 구토를 느끼고 무력해진다. 자기 완결성, 곧 허위로부터의 탈출이 감행된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너를 만난다.’ (레비나스 ‘탈출에 관하여’ 중에서)

 

[공감신문] 사랑을 등한시하는, 혹은 사랑하길 말리는 건조한 사회에서도 꿋꿋하게 사랑을 시도하는 이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꿋꿋이 제 갈 길을 나아간다. 자신이 가져왔던 형체 없는 어떠한 희망을 타인에게 걸어본다. 그리고 누구나 몇 번이고 그러하였듯이, 실망한다. 왜 세상 사람들은 진지하게 사랑하지 않느냐 묻는다. 왜 사람 마음으로 장난을 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어쩌면 그렇게 두 가지 얼굴을 철저하게 가질 수 있느냐고 하소연도 한다. 아니, 두 가지 얼굴만 있으면 다행이게. 

여기에 어떤 누군가는 책임감 없어 보이는 두루뭉술한 대답을 던진다.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자신부터 좋은 사람이 되면 되세요. 아니- 제 고민을 이해하신 맞나요? 전 좋은 사람인데- 그들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artwork by failunfailunmefailun

그럼 저 이상한 대답을 바꿔 말해보자.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자신부터 ‘좋은 사람’이 되라 했으니… ‘나쁜 사람’을 만나고 싶으면, 자신부터 ‘나쁜 사람’이 되라는 건가? 그렇다면 그 동안 ‘나쁜 사람’만 만나 온 누군가가 나쁘다는 뜻인가? 그리고 심지어 나쁜 사람을- ‘만나고 싶어’했다는 건가. 아- 생각해보니, 어쩌면 누군가에겐 맞는 이야기일지도. 

우린 왜 연애하는가. 결혼을 하려고? 결혼이 연애의 결실인가? 그런 연애라면 이 글에서 다루지 않겠다. 내가 말하는 연애란 ‘사랑하는 사이’에서 하는 모든 걸 뜻한다. 열렬히 사랑했다고 해서 무조건 결혼을 하는 건 아니니까. 연애, 그 자체로 몹시 가치 있는 경험이다. 

다른 관계들과 달리, 연애는 딱 두 사람이서 가능하다. 형제나 남매, 자매 속 관계는 여럿이 될 수 있다. 물론 첫째와 막내, 막내와 셋째 사이 1:1 상호 관계도 있겠지만. 선생과 제자라는 개념도 그렇다. 제자는 여럿이 될 수 있다. 부모와 자녀도 마찬가지다. 나의 언니가, 선생님이, 아빠가 내 동생의 언니-선생님-아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내 남자친구가 또 누군가의 남자친구여서는 안되지 않나. 우리와 밀접한 관계들 중 유독 남녀 관계만이 1:1이다. 그러니 여기선 상대방이 가장 중요하며, 그 상대방은 때론 ‘나’이다. 

우리 사회 속엔 다양하고 복잡한 관계들이 존재한다. 친구의 종류만해도 무진장 많다. 고향 친구, 동창, 동네 친구, 친구의 친구, 페북 친구, 인스타 친구, 남사친, 여사친… 그리고 그 밖에 사회적 관계들. 근데 온전히 ‘1:1’의 관계는? 오랫동안 연인이 없던 이들은 진료실에 앉아 의사를 만나는 몇 분 이외엔, 한 공간에서 누군가와 단둘이 눈맞추는 경험을 하는 것조차 보기 드문 세상이다.

누군가의 눈길을 끌며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 ‘돈’이 된다. 이를테면 ‘광고’라는 것이 그렇지 않나. 그것에 값을 매긴다. 인간은 보이는 것에 호기심-그리고 욕망을 품게 되니까. 이 복잡한 세상에서는 웬만하지 않으면 누군가의 시선을 잡아 두기 어렵다. 연애는, 그걸 가능하게 한다. 

그러니 사랑을 말리는 풍조 속에서- 우린 스스로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타자를 통해서만 스스로를 깊게 알 수 있다.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건 오만일지 모른다. 혹은 그건 과거의 ‘나’일 것이다. ‘아 지금 햇빛이 너무 눈부셔!’라고 말한 그 빛은 사실 8분 19초 전에 발사된 것이다. 

태양과 지구의 거리를 계산해 보았을 때 그렇다.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변화하는 내 마음도- 어쩌면 알아채는 순간 이미 과거의 것은 아닐까. 그러니 지금,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내 마음은 온전히 당장 마주할 타자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artwork by Greta Pasha

이러한 것을 알지 못하다가- 스스로 파악한 자신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된다면- 허무해지거나 구토하게 될 거라고 레비나스는 말했다. 그건 ‘허위’이니까. 과거의 나에 갇힌 ‘나’는 허무해진다. 인간은 그러한 허위로부터 탈출을 감행하는데, 그 목적지가 ‘타자’라는 것이다. 타자는 ‘무한성’을 가지며, 여러 사람이 아닌 한 사람에게서도 그게 가능하다. 

많은 철학자- 특히 독일의 철학자들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었다. 어떤 타자를 만나느냐는 대단히 중요하다. 그가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게 될지, 이후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타자와 관계가 끝난 이후에도 당사자를 집어삼키는 나쁜 테마를 남기기도 한다. 이전 연인에게 큰 상처를 받은 어떤 이는, 다음 연애를 시도하지 못한다. 또 어떤 이는 타자에 의해 자존감이 산산조각이 났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전 연인과 같은 방식으로 남에게 상처를 주며 ‘나쁜’ 사람이 된다. 스스로를 그 낮은 자존감에 끼워 맞추는 행위다. 

이른바 ‘바람둥이’만 만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왜 난 바람둥이만 꼬이는가’ 고민하는 분들이 있다. 자신은 진심인데- 상대방은 바람둥이라는 것. 이전에도 그런 경험이 있었더랬다. 그러면 난 도리어 질문하고 싶어진다. 그(녀)를 보았을 때- 직감적으로 그 사람이 바람둥이인줄 몰랐나요?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일부의 경우, 아마 알았을 것이다. 대단히 유능한(?) 바람둥이를 만났던 게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인간들은 육감으로 그걸 알아챌 수 있다. 그들에게선 이집 저집의 다른 밥 냄새가, 그것을 숙성 시킨 바람의 기운이 풍겨난다.

‘…머무는 곳이 모두 제 땅이요 제 집이니/ 그는 지상의 대지주다/ 걸으면서 꿈꾸고 걸으면서 사랑하고/ 순간, 순간 반짝이며/ 길에서 태어나 길에서 죽는다/ (…) 가서 용담초, 패랭이꽃 피우고 말을 살찌우고/ 마주유를 마시며/ 머리 긴 처녀의 가슴에 향기로운 추억을 남긴다’ (홍일표 시 ‘호모 노마드’ 중에서)

분명, 느꼈을 거다. 그이를 한번 본 당신 친구도 ‘근데 저 사람 좀 바람둥이 같은데?’라고 하는데- 훨씬 더 잘 안다는 당신이 그것을 모를 리가. 모른 척 할 뿐이다. 어쩌면- 그가 바람둥이라 좋았던 건 아닐까. 육감적으로- 그에게서 짙은 ‘노마드風’을 느꼈기에.  

단편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분들의(다시 말하지만 일부의-) 경우, 사실 연애할 마음이 없는 걸지도 모른다. 외로운 건 맞다, 인간은 다 외로우니까. 하지만 외로워서 사랑을 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진짜 사랑하는 이들은 심적으로 충만한 상태에도 상대방을 보고 싶어 한다. 

단지 외롭다는 이유로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어 하고, 좋아하는 감정을 느끼며- 에로스적인 감정이 들어 몇 번의 육체적 결합을 하다가- 멀어진다. 그리고는 ‘그(녀)는 날 떠났어!’라고 말한다. 예전처럼- 그렇게. 피해자인냥 군다. 

그러나 정말 피해자일까? 술 냄새가 풀풀 나는 만취 상태 운전자의 차에 타놓고- ‘아, 정말 사고가 날줄 몰랐는데!’라고 말할 셈인가? 입에 반질하게 침을 바르고 그렇게 말할 순 있겠지만, 당시의 생생한 술 냄새를 기억하는 당신의 콧구멍은 그때처럼 벌렁여질 것이다. 결국 맘속으로 지향하는 ‘쿨한’ 연애를 편하게 하기 위하여- 혹은 자기 합리화를 하기 위해 노마드(유목민)風을 고른 건 아니었나. 

그래서 어쩌다 한번이 아닌, 줄곧 바람둥이만 만났다는 분들을 보면- 당사자가 그런 성향인 경우가 꽤 있더라. 다만 늘 피해자의 입장이 되는 게 다를 뿐. 결국 저 사고 차량에서, 먼저 내리는 사람이 만취 운전자- 늦게 내리는 사람이 피해자가 된다. 피의자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저 버티면 된다. 혹은 안 걸리거나(…) 

위에서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예를 들었지만- 사실 뭐가 좋고 나쁜지 누가 판단하겠는가. 연애는 두 사람의 세계, 두 사람의 일이다. 세상 잣대를 둘 사이에 적용시킬 이유는 없다. 이를테면 상대방에게 ‘언어폭력’을 하는 건 ‘나쁜’ 일이지만- 누군가는 ‘사랑해 씨*!’이라는 말을 들어야 충만한 사랑을 느낄 수도 있다. 혹은 가학적 언어 표현이 있는 섹스를 즐기는 커플이 있을 수도 있다. 이건 둘 안에서 ‘좋은’ 것이 된다. 

‘바람둥이’-‘좋은’-‘나쁜’… 그 밖에 성향들 역시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보살핌을 받고 싶은 욕구가 커서, 일부러 동정심이 드는 이들을 골라 연애하기도 한다. 자신의 치부 역시 맘껏 드러내고 울고 싶으니까. 

그런데 때로 동정심을 주는 연애야 말로 무시무시한 것일지도. 누군가는 ‘나’를 동정하며 한없는 사랑을 주고- 자신의 쓰임새를 마구 드러낸다. 그렇게 자기만족을 흠뻑 느끼고 훅, 떠나버리는 경우도 있다. 거기 남겨진 아이 같은 누군가는, 사랑을 받기만한 ‘을’이 되어 왜 가느냐고 묻기 애매한 입장에 놓이기도 한다. 사랑을 빙자한 그러한 동정심은, 제멋대로 굴고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는다. 이밖에도 집착이나 투쟁심, 사람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고 욕망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우린- 타자에게서 원할 수 있다. 즉, 그런 상대방을 욕망한다. 

그러니 누군가가 표현한 ‘좋은 사람’이란 정의롭고, 성실하고, 다정하고, 납세를 잘하는(…) 사람이라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이상향인 것이다. 몇 년 전, 알고 지내던 강남 날라리 오빠가 ‘나 새**금고 다니는 참한 여자 만나고 싶어. 서울 지점 말고.’라기에, ‘오빠 그 은행에 통장 있어요?’물었다. 그는 당당하게 없다고 했다. 그리고 여태 못 만났다. 말만 저렇지, 사실 그 오빤 더 놀고 싶기에 서울 근교 은행에 통장 만들러 갈 추진력이 전혀 없다. 진짜 교회 열심히 다니는 여자를 만나려면 저 스스로 교인이 되어야 하지 않나. 

Marc Chagall ‘The Promenade’(1918)

한번쯤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호모 노마드는 노마드風을 풍겨낸다. 그것에 끌려하므로, 그것이 끌려온다. 호모 캐피탈리스트는 캐피탈風을 풍겨낼 거다. 그렇다면 난 어떻지?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지? 

난 호모 사피엔스 그리고 호모 루덴스- 인간적인 인간, 그리고 놀이하는 인간을 원한다. 사피엔스風과 루덴스風의 부유한 결합! 끌려하므로, 끌려오길. 나부터 그렇게 되길. 그리고 어서, 그러한 바람이 겨드랑이 밑을 간지럽혀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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