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공은 더 어려운 문제로 가는 입장권을 사는 것일 뿐이다.’ - 헨리 키신저

[공감신문] 내가 ‘작가’라고 했을 때, ‘그러면 책 많이 읽으세요?’라는 질문은 사실 처음부터 좀 별로였던 것 같다. 그건 내가 직업인으로서 성실한가-와 같은 소양을 묻는 게 아니라, 그저 ‘넌 책 읽는 부류의 사람이니?’라며 ‘나의 성질’을 묻는 것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단 난 정말 조금의 책 밖에 읽지 못했으며, 주로 새로운 책보단 다시 읽는 것을 좋아한다. 

artwork by Thomas Hedger

새로운 책 중에서도 특히, 자기계발서는 거의 보지 않는다. 봐야할 이유가 없다. 내가 자기 계발을 꾀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자기계발서엔 내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아니, 질문 자체가 다르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은 오히려 옛날 사람들이 더 많이 해준다. 철학자들은 서로를 비판하는 가운데- 투쟁적이고 신비로운 말장난을, 오늘 날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들은 인간, 세상, 삶, 사랑, 신, 자유와 같은 것에 대해 질문해왔다.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물었다. 도대체 그게 어떻게 기인하는 것인지 말이다. 

오늘날 인간들은 자본 앞에 자발적인 복종을 한다. 우린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다. 자기계발이라 하셨는가? 누군가는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정말로 시간을 쪼개어 쓰고, 거기서 알려준 황금 레시피 같은 방식으로 자신을 컨트롤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렇게 자신의 스펙을 쌓아가며 하루하루를 보람 있게! 그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런 의지를 꾸준히 가져간다는 건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존경스러운 부분이다. 하지만 그 뿌듯함은 ‘자기만족’을 위한 게 아니다. 마침내, ‘인재’로서 시장에서 인정을 받아야한다. 연봉이 얼마, 라고 확인받으며!

대부분 성인들이 한다는 ‘자기계발’의 성격이 이러하다. 자신의 스펙을 더 많이 쌓아서 이것으로 돈을 더 벌겠다는, 혹은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겠다는 행위다. 물론 열심히 사는 건 멋진 일이지만, 아주 낯설게- 우리 삶을 바라보자. 자신이 정말 되고 싶었던 직업이 아니라, 그저 돈을 벌기 위하여 선택한 일인데- 그것을 더욱 잘 해내기 위하여 남은 여가 시간에 그와 관련된 공부를 한다? 혹은 직장 상사의 취미 활동을 ‘일부러’ 함께 한다? 낯설게, 정말 낯설게 그런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본다면 굉장히 슬플 것이다. ‘먹고 사는 것’외에 다른 것에 할당하는 시간이 전혀 없다니. 매순간 사냥감을 쫓으러 정글을 뛰어다니는 사자를 보면서 안타까워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artwork by Thomas Hedger

우린 스스로 원하는 가격표가 있다. ‘내가 이 정도는 받아야지!’라고 생각하며, 정말 그 정도의 인재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의 상품성을 드높이는 것이다. 내 옆 사람, 앞사람도 끊임없이 노력한다. 한 계단 올라섰더니, 여기도 경쟁자가 바글거린다. 정신 차리고 더 노력하고 올라선다. 그렇게 상품성은 드높아진다. 희귀성이라기보다, 자본가가 좋아하는 성질들을 한데 모아 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성격’도 그렇게 맞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자본가는 이때 무얼하고 있나. 그 중에서 잘 고르려 하겠지. 

이건 시장 경제 구조에서 당연한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번 돈으로 무언가를 선택-구매하며 살아가고 있다. 더 넓은 선택지를 보기 위하여, 마음에 쏙 드는 걸- 더 편리하게 고르기 위해선? 돈이 많으면 된다. 우리가 직업인으로서 열심히 하는 건 스스로에게 바람직한 일이며, 또 임금을 지불하는 이에게 그만큼 상응하는 무언가를 제공할 의무를 져버려선 안 된다. 

그런데 만일 그 직업이 오직 ‘돈’을 만들고자 하는 수단이라면, 최소한 어느 시간만큼은- ‘돈’을 잊는 활동이 있어야하지 않을까. 평일엔 야근을 밥 먹듯 일하고 주말엔 ‘자기계발’을 위해 학원에 간다? 가격택에 0하나를 더 붙이기 위하여, 혹은 상품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있지 않은가. 자발적인 복종이다. 스스로 그렇게 길들이지 않기 위하여, 우린 기꺼이 가격택을 훼손해야 한다. 

왜 ‘팔리는’ 공부만 하는가? 팔리지 않는 것에 대해 공부하는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런 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일과 정말 무관한 걸 공부한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의문을 가진다. ‘너 그건 왜 하는 거니?’ 그냥 자기가 하고 싶고, 알고 싶어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그게 네 일에 도움이 되니?’라고 먼저 궁금해 한다. 왜 모든 게 ‘돈’으로 연결 지어져야 하는가.

artwork by Michael Moccia

사람들은 돈이 많으면 ‘성공’했다고 여긴다. 옛날 티비를 보면, 시골서 어린 나이에 상경한 이가 외제차를 끌고 고향에 가면 ‘누구 집 아들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것도 맞는 얘기다. 하지만 성공이 무조건 행복을 보장하는 건 아니다. 현재 불행한 누군가가- 돈이 없다면? 자기 불행의 이유를 모두 ‘돈’에게 뒤집어씌운다. 불행한 이유가 다른 곳에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무책임하게, 모든 걸 돈 탓을 한다. 오히려 ‘돈’은 저 멀리 있기에- 불평하기가 쉽고 편한 것이다. 

독일 출신 미국 정치인인 헨리 키신저는, ‘모든 성공은 더 어려운 문제로 가는 입장권을 사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지금이 버겁다면, 과연 ‘나’는 성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지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특히나 내가 그것을 막연히 갈망하고, 또 그러기 위하여 시간을 쏟고 있다면 더 더욱.

‘돈’과 무관한 것, 팔리지 않는 것, 아니 그런 성질에 연관 지어 생각하지 않는 것… 그거야말로 자발적 복종으로부터 탈피하는 방법이 아닐까.  ‘그냥 하고 싶은’ 걸 하고, ‘그냥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거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나의 ‘자발적 복종심’을 굳건히 함께 할 동지를 찾는 게 아니다. ‘그냥 함께 있으면 좋은, ‘나’다워지는 사람, ‘나’답게 만드는 사람에게로 가야한다. 그래야 우리는 자기 존재로서 성장하고, 단단해지며 늙을 수 있다. 

나도 성실한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하루 종일 그렇게 사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싶진 않다. 심지어 나중에 내 남편될 사람이- 내 아이의 아빠가 그럴 거라 생각하면 무서운 기분도 든다. 그가 아이에게 ‘복종심’을 심어 줄까봐. 그게 ‘지혜로운’, ‘슬기로운’, ‘성실한’것이라고 가르칠까봐 겁난다. 아니 얘야, 자신이 그저 하고 싶은 공부를, 가고 싶은 곳을, 사랑하고 싶은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도 성실한 삶이란다.

artwork by Maud Lewis

이렇게 또 한 주가 흘러간다. 감정적으로 치열했거나, 혹은 몸이 고단했거나. 과연 어제와 오늘, 나는 어떤 삶을 살기 위하여 그것들을 견뎌냈을까? 그 어떤 삶이 정말, ‘어떠한’ 모습일 지- 그게 정말 나와 어울릴 지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이반 일리치의 죽음>에 나오는 구절처럼, 오히려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은 젊은 층일지 모른다. ‘젊은 사람들은 잘 살고 싶다는 생각만 할 뿐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그런 생각을 할 시간도 없으므로 예전 사람들의 삶을 본보기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 어서, 주말을 맞아 가격택을 훼손하러 길을 나서자- 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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