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우리는 새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멕시코시티에서 무려 열흘 가까이 보냈던 것이다. 슬슬 움직여야 할 때가 왔다. 뻴리뻬는 얼마든지 더 있으라고 했지만, 그랬다간 영영 눌러앉아 버릴 것 같아서 한껏 무거워진 몸을 일으켰다. 

우리는 버스 터미널 근처 샌드위치 가게에서 마지막 식사를 함께 했다. 샌드위치를 남김없이 다 먹은 뒤, 나는 천원권을 넣은 하얀 봉투를 뻴리뻬에게 주었다. 일주일이 넘도록 살뜰히 챙겨주었던 그를 위한 선물이었다. 실용적인 선물은 아니었기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봉투를 여는 뻴리뻬를 보았다. 다행히도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고, 화폐 수집이 자신의 취미라며 정말 좋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후 우리는 스무 번이 넘는 “Thanks!”를 들어야 했지만, 아이처럼 좋아하는 뻴리뻬를 보면 몇 번이고 더 들을 수 있었다.

 

“아무쪼록 좋은 여행이 되었으면 해.” 
“다음에 또 멕시코시티에 오면 연락할게!”
“꼭이야! 멕시코에서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과연 우리가 다시 멕시코시티에 와서 뻴리뻬를 볼 수 있을까. 글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몇 년 안에 또 만날 것처럼, 샌드위치 가게에서 아무렇지 않게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어느새 버스 시간이 다 되었고, 우리는 짐칸에 배낭을 실은 뒤 좌석에 앉았다. 뻴리뻬가 손을 흔들기에, 나와 S는 입모양으로 연신 ‘아디오스’라고 말했다. 버스가 슬슬 움직이더니 터미널을 빠져나갔다. 동그란 얼굴, 짙은 눈,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뻴리뻬가 점점 멀어져 갔다. 아디오스, 우리는 멕시코에서 첫 번째 이별을 맞았다.

다음 행선지는 멕시코시티에서 북서쪽으로 220km 떨어진 께레따로였다. 이 도시에 대해선 전혀 몰랐다. 그러나 뻴리뻬를 만날 수 있었던 카우치 서핑을 통해 레오와 알게 되었고, 마땅한 계획이 없었기에 친구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레오는 께레따로에서 서커스를 하는 젊은 여성이었다. 오늘 레오의 공연은 저녁 열 시였고, 우리는 그 시간에 맞춰서 서커스장에 가기로 했다.

오후 여섯 시가 다 되어서야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고, 점차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노곤했던 우리는 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 시내에 가기로 했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려면 택시 티켓을 끊어야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던 나와 S는 북적거리는 터미널 한가운데에서 멀뚱히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안내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핸드폰 지도를 보여주면서 열심히 설명했지만 우리는 알아듣지 못했다. 괜히 안내원의 시간을 뺏는 것 같아서 감사 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그가 핸드폰을 주며 어디에 갈 건지 적으라며 손짓했다. 우리는 지하철역으로 가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서 ‘SUBWAY’라고 적었다. 

“아!” 안내원의 탄성. 그의 얼굴이 드디어 활짝 폈다.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듯했다. 안내원은 우리를 대신해 센뜨로에 가는 택시 티켓을 끊어주고, 택시 기사에게 목적지를 설명해주었다. 그는 우리가 떠날 때까지 곁에 있어 주었다. 나는 창문을 열고 손을 뻗어 열정적으로 손을 흔들었고, 그 또한 인자한 웃음을 띠며 인사했다. 안내원이 아니었다면 언제까지 터미널에서 미아처럼 서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십여 분쯤 달리자, 한눈에 보아도 번화가인 구역에 들어섰다. 택시 기사는 작은 골목에서 멈추더니 우리를 돌아보았다. 도착했다는 거였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하철역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여기가 아니라며 “SUBWAY!”라고 했지만, 택시 기사는 어딘가를 가리키며 “SUBWAY!”라고 말했다.

그가 가리킨 곳을 보니, 샌드위치 프랜차이즈 ‘SUBWAY’의 간판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맙소사, 서브웨이가 맞잖아! 순간 안내원의 해맑은 웃음이 떠올랐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METRO’라고 적었다면 지하철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우리의 목적지인 센뜨로에 도착했으니 지하철역은 이제 아무 상관없게 되었다. 마침 배가 고팠고, 우리는 안내원이 골라준 저녁 메뉴(샌드위치)를 먹었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난 뒤, 우리는 공연 전까지 시간을 보낼 겸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엔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이들은 어떤 한 사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연예인일까, 정치인일까, 아니면 신부님일까. 우리는 얼떨결에 인파에 휩쓸려 함께 행진했다. 언뜻 보니 가톨릭 성인의 축일을 기념하는 행사인 듯했다. 

이리저리 정처 없이 걷다 보니 벌써 열 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행렬에서 이탈하여 레오가 알려준 주소로 향했다. 골목길엔 사람들이 몇 없었다. 분명 다들 축제를 즐기고 있으리라. 낮은 건물들이 골목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는데, 벗겨지고 바랜 벽들이 운치를 더했다. 처음 께레따로에 온 것인데도 낯설지 않았다. 밤 산책을 하듯이, 등에 맨 묵직한 배낭의 무게는 아랑곳 않고, 미지의 골목을 따라 걸었다. 

‘CIRCO’ (서커스)

드디어 서커스장을 찾았다. 서커스는 초등학생 때 보았던 동춘 서커스 이후로 처음이었다. 벌써 그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나 머쓱해진다. 서커스를 보러 온 사람들이 벌써 줄을 서고 있었다. 입장료는 자유. 우리는 지폐 몇 장을 상자에 넣었고, 오랜만의 서커스를 즐기기 위해 공연장으로 들어섰다. 공연장엔 투박하고 원색적인 작화를 배경으로 공중전화 부스, 가로등, 소파, 벤치 등 다양한 소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흡사 대학로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무대를 구경하는데, 한 남자가 나오더니 인사를 하고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분장을 한 사람들이 나와서 서커스 대신 연기를 하기 시작했다. 서커스엔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는 대사를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보아하니 남녀의 슬픈 사랑에 관한 내용인듯했다. 중간중간 외발자전거, 텀블링, 아크로바틱, 마술 등 다양한 공연이 배치되어 있었다. 레오는 피에로가 사랑에 빠진 조각상 역할이었다. 사진 속 얼굴 그대로였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연기를 끝낸 뒤, 레오는 천장에 매달려 천을 이용한 아크로바틱을 했다. 유연하고 아름다운 몸짓. 나는 부드럽게 동작들을 풀어내는 레오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문득 어릴 적 기억이 떠올랐다. 기묘한 재주를 부리던 사람들을 홀린 듯 바라보고 있던 나의 모습이. 동춘 서커스에서 피에로가 뱉어낸 탁구공이 내 얼굴을 강타한 기억은 가장 오래된 기억 중 하나이다(심지어 나는 침이 묻어있던 탁구공을 갖겠다고 주머니에 넣었다). 십수 년이 지나서도 나는 홀린 듯 서커스를 보고 있다.

갑자기 이 상황이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친구의 초대로 께레따로에 와서 서커스를 보고 있다니. 게다가 서브웨이(지하철역)에서 센뜨로를 가려고 했는데, 서브웨이(샌드위치 프랜차이즈)에서 저녁을 먹지 않았는가. 

우리는 떠나야 할 때를 정해두지 않았고, 가야 할 곳을 정해두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가 겪게 될 일들의 경우의 수가 더 늘어날 것이다. 께레따로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서커스를 보는 일은 우리의 계획에 없었다. 그러나 이 즉흥성이 나쁘지만은 않다. 한 시간 남짓한 공연이 끝나고, 연기자들이 나와서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만족스러웠는지 정성껏 박수를 쳐주었고, 질서를 지키며 퇴장했다. 이제 레오를 만날 차례이다. 수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인 께레따로를 기대하며, 우리는 레오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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