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사건, 비극의 역사를 기억하며

[공감신문 시사공감] 3일인 오늘은 제주 4·3사건이 발발한지 꼭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해마다 4월이면 섬 전역이 떠난 이들을 추모하는 향내로 가득할 만큼 많은 이들의 희생을 불러온 제주 4·3사건. 이로 인한 아픔과 슬픔의 역사는 제주도 곳곳에 흉터처럼 남겨져 있다.

해마다 4월이면 섬 전역이 향내로 가득한다는 제주도 [photo by KOREA.NET on flickr]

4.3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돼 무려 7년 7개월 간 이어진 남로당 무장대와 미군정, 국군, 경찰 간의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무고한 제주도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망한 이들의 숫자는 공식적으로만 1만4000명으로 집계되며, 공식집계에 들어가지 않은 이들까지 더한다면 희생자는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 인구 10분의 1에 달하는 숫자다.    

70년 전 이 아름다운 섬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wikimedia/CC0 creative commons]

천혜의 섬, 평화의 섬으로 불리며 국내에서도 단연 최고의 관광명소로 꼽히는 제주도. 70년 전 이 아름다운 섬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긴 시간 동안 간직해 온 슬픔은 어떤 것인지 오늘 시사공감에서 알아보기로 했다.

■ 제주 4.3, 그 비극의 시작 

1947년 3월 1일. 제주도민들이 제주시 관덕정 앞으로 모여들었다. 3.1운동 28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제주 시내 위치한 관덕정. 비극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됐다. [위키백과]

해방 직후 좀 더 나은 삶을 기대했던 제주도민들은 일제에 부역했던 경찰들이 다시 군정 경찰이 돼 공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당연히 미군정에 대한 민심도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비극은 3.1절 행사를 구경하던 한 아이가 기마경찰이 모는 말발굽에 밟히는 사건이 일어나면서부터 시작된다. 아이가 밟힌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모습에 분노한 군중들은 경찰을 향해 돌을 던졌는데 경찰은 이를 ‘폭동’이라고 판단, 주민들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중경상을 입고, 6명은 사망했다. 가뜩이나 어지러웠던 민심이 악화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후 3월 10일 민관 총파업을 시작으로 제주도민들의 필사적인 반발이 이어졌다.

그리고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경찰지서 12곳과 서북청년회원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 12명을 살해했다. 무장대는 탄압중지,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통일정부 술비촉구 등을 주장했다.    

4.3사건을 다룬 영화 ‘지슬’의 스틸컷. [네이버 영화]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실시됐지만 제주도는 3개 선거구 중 2개 선거구가 투표소 과반수 미달로 무효 처리된다. 남한에서는 유일하게 5.10선거를 거부한 지역이 된 것이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전체를 ‘빨갱이 섬’이라 규정, 같은 해 11월 17일 대통령령 제31호로 계엄령을 선포한다. ‘피의 탄압’의 시작이었다.

무자비하고 잔혹한 학살은 7년 7개월이나 이어졌다. 해안선에서 5km 밖에 있는 이들은 모두 처단한다는 ‘중산간 마을 초토화 작전’이 시행됐고 토벌대의 총탄은 남녀노소를 불문했다. 좌우이념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아이들이 죽고, 제주도 곳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불길이 치솟았다.

4.3 사건 후 역사 속으로 사라진 제주 마을만 해도 109개에 달한다. 희생자 3만 명 가운데 3분의 1은 어린이, 노인, 여성 등의 힘없는 약자들이었으며 전체 희생자 중 86%가 군·경 토벌대에 의해 학살된 것으로 보고됐다. 이들의 유족은 5만9426명에 이른다.

■ 그리고, 그 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고도 제주도민들의 삶은 녹록치 못했다. 4.3사건과 관련돼 이들은 ‘빨갱이’라는 오명을 써야 했고, 연좌제와 국가보안법 등에 의한 곤욕을 치러야 했다.

독재정권은 물론이고 문민정부 시절까지도, 4.3사건을 논하는 것은 금기로 치부됐다. 생존자들은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겨를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도 없었다고 토로한다. 4.3사건은 끝났지만, 침묵의 세월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2000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주4.3 특별법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지난한 금단의 시간이 깨진 것은 김대중 정부에 들어서였다. 4.3사건이 일어난 지 50여 년이 흘러서야 피해자들이 양지로 나오게 된 것이다. 2000년 1월, 제주 4.3 특별법이 제정·공포되면서 정부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됐다.

故 김대중 대통령은 제주 4.3사건 특별법 제정에 서명하며 “나는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수십 년 동안 ‘폭도’, ‘빨갱이’들로 매도돼 살아온 것에 국가가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사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4.3사건은 현대사의 치부이자 살아 있는 우리들의 수치”라고 밝힌 바 있다.

노무현 정부에 들어선 2003년 10월에는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가 정부 보고서로 정식 채택되기도 했다. 당시 故 노무현 대통령은 진상조사위원회의 의견을 바탕으로 제주 4.3사건이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와 토벌대의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이뤄진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희생’이었음을 인정하고 유족과 도민에게 공식사과문을 발표한 바 있다.   

2006년 4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유족들과 악수하고 있다.

이후 2006년 4월,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제58주기 4.3위령제’에 참석해 유족과 도민들 앞에 고개를 숙였다. 4.3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에 당시 참석자들 중 일부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진상규명 노력은 보수정권인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들어 다시 꺾이고 만다. 2014년엔 4.3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지만,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이 자리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이명박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유해발굴과 피해구제 등 후속조치와 관련한 국비예산이 뚝 끊긴 것도 이명박 정권부터였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는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로 4.3 해결을 약속한 데 이어, 3일인 오늘은 4.3 추념식에 대통령 자격으로 참석해 도민과 유족들에게 공식 사과했다. 12년 만에 이뤄진 대통령의 추념식 참석이자, 15년 만의 두 번째 공식 사과다.

■ 70번째 4월 3일을 맞이하며  

제70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한 여야 대표들

3일 제주 4.3평화공원에서 열린 추념식에는 여야 지도부가 모두 참석했다. 이들 한 마음으로 ‘애도의 뜻’을 표했지만 보수당과 진보당 사이에는 견해차가 엿보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추념사를 통해 사과와 위로의 뜻을 전한 데 이어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70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에 참석해 생존자와 유족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국가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리고, 또한 깊이 감사드립니다. 저는 4.3의 완전한 해결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갈 것을 약속합니다. 더 이상 4.3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중단되거나 후퇴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국가권력이 가한 폭력의 진상을 제대로 밝혀 희생된 분들의 억울함을 풀고, 명예를 회복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유해 발굴 사업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끝까지 계속해나가겠습니다”

“유족들과 생존희생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한편, 배·보상과 국가트라우마센터 건립 등 입법이 필요한 사항은 국회와 적극 협의하겠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논평을 통해 “국회에는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배상 및 보상, 불법 군사재판 무효화, 수형인에 대한 명예회복, 진실규명을 위한 추가조사 등의 내용을 담은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개정안’이 계류 중”이라며 “야당의 적극적이고 진심 어린 협력을 촉구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페이스북 갈무리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 글에서 “제주 4.3 추념식이 열리는 4월3일은 남로당 제주도당 위원장인 김달삼이 무장 폭도를 이끌고 새벽 2시에 제주 경찰서 12곳을 습격했던 날”이라며 “제주 양민들이 무고한 죽임을 당한 날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주장을 내놨다.

홍 대표는 “4.3 사건을 재조명하고 특별법을 개정할 때 반드시 이 문제도 시정해 무고한 양민이 희생된 날을 추모일로 고쳐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장제원 자유한국당 수석대변인 역시 홍 대표의 페이스북 글과 같은 취지의 논평을 냈다.

장 대변인은 “제주 4.3 70주기를 맞아 양민학살로 안타깝게 희생되신 분들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분들께 깊은 애도의 뜻을 전한다”며 “남로당 무장대가 산간지역 주민을 방패삼아 유격전을 펼치고 토벌대가 강경 진압작전을 해 우리 제주 양민들의 피해가 매우 컸다”고 말했다.

제70주년 4.3희생자 추념식에 여야 대표들이 참석해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를 듣고 있다.

유의동 바른미래당 수석대변인은 “제주 4.3 항쟁이 발생하게 된 원인은 과거 냉전 시기 좌우 진영의 극한 대립에 있었다”며 “제주 4.3항쟁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한민국 정치는 양대 기득권 정당의 적대적 공생관계에 휘둘리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양대 기득권 정당을 극복하고 국민통합과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 제주 4.3 항쟁 정신을 계승할 것을 약속드린다”고 밝혔다.

최석 정의당 대변인은 4.3사건에 대해 “다시는 반복되지 않아야 할 근현대사의 비극”이라며 “4.3항쟁이 국가추념일로 제정된 지 올해로 3년째지만, 지난 9년 동안의 정권은 희생자들에게 색깔론을 덧씌우며 명예를 다시 훼손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드러나지 않은 제주 4.3항쟁의 완전한 진상을 책임 있게 밝혀 역사를 바로잡아야 할 때”라며 “희생자들의 훼손된 명예를 온전히 회복하고 피해를 보상할 수 있는 제도적인 후속조치가 시행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 이름 없이 기억되는 역사

1948년 5월, 처형을 기다리는 제주 주민들 [위키백과]

오늘 포스트를 작성하면서 편의상 ‘4.3사건’이라 칭하기는 했지만, 사실 제주4.3에는 아직 이름이 없다. 6월 민주항쟁, 5·18민주화운동, 4·19혁명과 같이 이 사건의 본질을 명확히 규정할 수 있는 이름이 아직 붙지 않은 것이다.

제주 4.3평화기념관에 전시된 백비에는 아무런 글도 새겨져 있지 않다. 백비 안내문에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온 제주4.3은 아직까지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고 쓰여 있을 뿐이다.

지난 70년 간 제주 4.3에 대한 논의가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사이 사건의 목격자들과 유족들은 억울함을 다 풀지도 못한 채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났다. 10살 남짓이었던 소년, 소녀들은 백발이 성성하고 등이 굽은 백발의 노인들이 됐다. 제주4.3의 진상을 규명하고 본질을 찾는 일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될 것이다.    

아픔과 회한의 역사가 두 번 반복되지 않길 바란다. [pxhere/CC0 public domain]

아픔과 회한의 역사가 두 번 반복되지 않길 바라며, 모든 희생자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오늘 시사공감 포스트를 마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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