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서커스 공연이 끝난 뒤, 우리는 쭈뼛쭈뼛 레오에게 다가갔다. 레오가 우리를 알아보고는 자신의 갈색 머리를 손으로 마구 헝클며 악수를 청했다. 그녀의 얼굴은 굵은 연필로 조심스레 그린 인물화 같았다. 짙은 화장 탓이었을까. 레오의 깊은 눈을 자꾸만 쳐다보게 되었다. 옆에는 건장한 체격에 거뭇거뭇한 턱수염을 가진 남자가 서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쳬이엔- 레오와 함께 동거를 하는 연인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기에 우리는 긴 대화 대신 짧은 인사를 나누고는 레오의 자그마한 차에 올랐다.

이상하게도, 집으로 가는 내내 무거운 침묵 때문에 숨이 막혔다. 물론 오늘 처음 만났으니 어색한 것은 당연한 일이고, 뻴리뻬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러했다. 하지만 그때와는 묘하게 달랐다. 나와 S는 괜스레 각자의 창문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내가 느끼는 감정을 깨닫고 말았다. 불편함. 우리는 서로를 불편해하고 있었다.

이 분위기를 깨보고자, 나는 레오에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능청스레 물었고, 레오는 낮엔 학교에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지만 저녁엔 서커스를 한다고 했다. 어떤 일이 더 재미있냐는 나의 질문에, 역시 서커스가 더 재미있지 않겠냐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은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 이후 핑퐁식 대화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늘 우리가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끝이났다. 나와 S는 다시 침묵하고 말았다.

우리는 저녁 열두 시가 되어서야 레오의 집에 도착했다. 센뜨로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깔끔한 연립 빌라였다. 이웃에게 피해가지 않도록 조심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고양이 두 마리가 거실을 어슬렁거리며 우리를 맞이했다. 간단한 집 소개가 끝난 뒤, 레오네는 큰 방으로, 나와 S 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후우- 한숨 돌렸다. 답답한 공기 탓에 숨도 잘 못 쉬었다. 최선의 호의인 걸까, 그들의 호스트 스타일인 걸까. 아니면 그저 쑥스러운 걸수도 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데, 방문 너머로 묘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아, 이곳은 커플이 사는 집이로다. 나와 S는 음악의 볼륨을 조금씩 크게 올렸다.

다음 날 늦은 오후, 우리는 친구와 약속이 있다는 레오네를 따라 집을 나섰고, 서로 좋은 하루 보내라는 인사치레를 하고 헤어졌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하늘이 우중충하다. 비가 내릴 것 같은데다, 어제의 선선하던 바람도 많이 쌀쌀해졌다. 우리는 께레따로에서 아무런 계획이 없었기에 버스를 타고 여유롭게 소깔로 광장으로 향했다. 어제 광장을 가득 메웠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한산한 광장을 보고있으려니, 레오의 초대를 받고 께레따로에 온 우리가 너무 막무가내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여기에서 무엇을 바랐던 것이기에.

에라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싶어, 광장 근처 레스토랑에서 치킨 스테이크와 파스타, 그리고 맥주를 시켰다. 오후 네 시가 지나서야 먹는 첫 끼였다. 빈속에 맥주를 꼴깍꼴깍 마셨다. 오늘은 왠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었다. 간밤의 불편함이 계속해서 생각났고, 그때문에 께레따로에 대한 흥미도 급격히 떨어져버렸다.

유일한 계획이었던 식사를 마치니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음, 무얼하면 좋을까. 결국 생전 타지도 않던 시티 투어 버스로 한 바퀴 돌았지만, 이미 마음이 떠버려선지 기억에 남는 곳이 없었다. 무료한 시간을 꾸역꾸역 보낼 뿐이었다. 한 시간 남짓한 투어를 끝내고, 이탈리안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저 멀뚱히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집에 가자.” S가 말했고,

“그래.”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했다.

이렇게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느니 집에 가는 편이 현명한 일이었다. 일단 무작정 택시를 잡은 뒤, 택시 기사에게 레오가 써준 주소를 보여주며 이 곳으로 가달라고 손짓 했다. 택시가 출발하자 우리는 집에서 편히 휴식을 취할 생각에 들떴다. 레오네는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올 테지만, 열쇠는 현관 앞에 있는 화분 아래에 있을 거였다.

얼마쯤 갔을까, 택시 기사가 주유소 앞에서 멈추더니 우리에게 무어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멕시코에는 네비게이션이 없어서 간혹 택시 기사가 길을 모르기도 하는데, 지금이 바로 그 경우인 듯했다. 하지만 우리 또한 길을 몰랐다. 이런 상황은 생각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택시가 길을 잃는 경우가 별로 없지 않은가. 게다가 해가 기울어 주변이 어두워져 지리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행히 주유소는 확실히 기억 났기에 일단 내렸고, 주유소에서 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우선 직감대로 걸었다. 이상하다, 분명 이 길인 것 같은데 자꾸 잘못 들어선다. 우리의 기억대로라면 이쯤 레오의 집이 나와야 하는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 뜸하게 있던 공중 전화도 보이지 않아서 레오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었고, 한창 친구를 만나는 중일테니 최대한 우리끼리 해결해 보려고 했다. 그러나 점점 불안해졌고, 우리는 밤 거리를 방황하는 미아가 되어버렸다.

걸으면 걸을수록 이상한 곳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이제는 주유소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나마 길을 밝혀주었고, 간간히 주인 없는 개들이 우리 옆을 지나가곤 했다.

또 다시 주유소로 가고자 길을 되돌아 가려는데, 마침 근처에 있던 슈퍼 마켓 앞에 세워져 있는 차를 발견했다. 우리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차 안에 있던 부부에게 조심히 말을 걸었다. 주소를 보여주며 이곳을 아느냐고 묻자, 아주머니가 아리송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말을 이해하지 못한 우리가 난처한 기색을 보이니 아저씨는 우선 차에 타라고 하셨다.

그러나 아저씨도 네비게이션이 없었기에 정확한 길을 몰랐다. 그저 대로를 따라 내려가며 길가의 집에 적혀있는 번지수를 보면서 추측할 수밖에. 확실하지 않은 우리의 기억 때문에 더 헤매고 말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레오의 집이 지워지고 있었다.

결국 아저씨의 핸드폰으로 레오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다. 아저씨는 우리를 대신해 레오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고, 우리는 잠자코 보호자를 기다렸다. 십여 분쯤 기다리자 레오와 쳬이엔이 도착했다. 한순간에 어린 아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어른들(부부와 레오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쩔쩔매는 어린 아이 둘. 후우- 한숨 돌렸다. 그전까지 느끼지 못했던 안도감이 한순간에 몰려와 몸이 나른해졌다.

대화가 끝났는지 레오가 차에 타자고 말했다. 우리는 고마운 인연에게 연신 감사의 인사를 드렸고(“그라씨아스!”), 부부 또한 인자한 미소로 화답했다(“데 나다”). 아저씨와 아주머니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께레따로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헤매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오에게도 미안함을 표했고, 레오는 쿨하게 괜찮다고 말하며 집으로 가는 대신 서커스 단원의 생일 파티 장소로 우리를 데려갔다.

이들은 아담한 집 한 켠에 음식을 거하게 차려놓고 남자 단원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었다. 생일을 맞은 단원의 어머니께서 우리를 위해 ‘쇠고기 배 국물’을 챙겨주셨고, 감사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괜히 알렉산더가 생각났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도 파티가 끝날 때까지 한참 동안 기다렸다. 우리는 그들끼리의 세상 속에서 또다시 길을 잃어버렸다. 이 세상에선 누구도 우리를 데리러 오지 않을 것이었다. 이들이 만족스럽게 놀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는 더 이상 께레따로에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고, 내일 떠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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