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독자 여러분께 한가지 제안을 해보고 싶다. 2018년을 맞이한 지 3개월이 지나는 동안, 가장 큰 헤프닝이 무엇이었는 지 한번 떠올려보자는 것이다. 중요한 건 ‘헤프닝’이다. 영어로 ‘왓 헤픈?’이라고 하면 도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묻는 거다. 그럴 만한 사건들을 떠올려보자는 것이다.

분명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런 헤프닝이 한 두개 쯤은 있으실 거라 생각된다. 그런데 그 헤프닝이 그다지 괴짜스럽지 않고 몹시 지루한 성질이라면, 아마도 조금 무료한 삶을 보내고 계신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하나 꼽아서 ‘성질’만 이야기해보자면 굉장히 찌질했다고 고백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지루한 것보단 백배 낫다. 적어도 난 그 헤프닝이 벌어질 때 ‘찌질함’을 느낄 만큼, 떨어질 자존심이 평소엔 장착되어 있었다는 얘기니까. 찬란함과 기대, 그 후에 극심한 배신감과 허무함이 있었고 결론적으로 내가 찌질했더라.

대부분 이러한 헤프닝들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연애’가 가장 우위를 차지한다. 연애를 하면 이른바 ‘썰’이 많이 생긴다. 썸 단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썸이 썰을 유발한다. 우리는 항상 ‘썰’이 있는 인생을 살고자한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오늘도 대수롭지 않은 하루를 보내겠다’는 이름의 뜻을 지녔지만, 사실 대수롭지 않은 하루를 살거라면 왜 살고 있는 것인지 오히려 묻고 싶어진다.

[= artwork by Juno Birch]

우리는 무언가에 대해 궁금해하고 다가가고 시도하고 느껴보고 또 이별해보아야 한다. 세상 것들과 그렇게 관계를 맺는 것, 그것이 ‘삶’이다. 그것을 ‘뼈저리게’ 알기 위해서는 자발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연애를 할 때에 우린 짧은 시간 많은 걸 느끼게 된다. 말 한마디에, 행동 하나에도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고민한다. ‘한 사람’때문에 정말 큰 걸음을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자기 스토리가 없는 사람은 몹시 불행하다. 단순히 말해서 그는 세계와 관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토리 없이 살아갈 순 없다. 그러니 이들에겐 인스턴트 스토리가 필요하게 되었다. 디지털이 지배하는 시대,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그 기능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예전엔 정해진 시간에만 뉴스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9시가 되면 집안의 어른들은 꼭 거실에 앉아 뉴스를 보셨었다. 놓치면 마감뉴스라도 챙겨 보셨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우리는 실시간으로 방금 전 쓰인 따끈따끈한 기사를 읽을 수 있다. 스마트폰 덕분이다. 하루에도 몇번 씩 포털사이트 메인 화면에 뉴스 기사가 바뀐다. 대부분 그것은 헤드라인의 당사자가 아니라면 남의 이야기인데, 우린 이것을 동료 앞에서 꺼내 놓는다.

그 뿐인가. 우리가 지인에게 연락을 하려고 사용하는 채팅 어플에 까지도 남의 이야기가 들어와있다. 그 어플에 뉴스 기사나 간단한 포스트 같은 걸 볼수 있는 메뉴가 따로 존재하며, 친구에게 쉽게 전송할 수 있다. 이건 개인적으로 생각했을 때 정말 슬픈 그림이다.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난 우리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눌 때 남의 이야기를 재료로 소통하는 사회에 살게 될 것만 같아 슬퍼졌다.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몰라도 될 누군가의 ‘단짠단짠’한 이야기들이 왜 우리 사이에 끼어야 하는 거지? 적어도 대화의 도구 사이엔 침범하면 안되는 거잖아.

이전 시대의 연애는 지금보다 연락을 쉽게 할 수 없었으며, 이런 피상적인 정보들을 주고 받지도 않았을 거다. 오히려 서로의 이야기를 더 많이 할 수 밖에. 그러나 우리는 왜 이런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우리의 삶이 그런 인스턴트식의 짧은 기사보다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낭만도 없고, 모험도 없다. 무료함만 가득해서, 사랑하는 이의 귀를 기쁘게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 스토리가 없는 삶을 살아간다는 건, 그 인생이 지루할 확률이 클 수 있다는 것이고, 이런 삶이 매력적으로 보이긴 어렵다. 그러나 우린 누구나 매력적인 삶을 사는 사람에게 호감을 갖는다. 그 사람의 행복은 어떤 건지 맛보고 싶으니까. 그런 스토리를 채우는 방법도 가지 각색이다. 

누군가는 여행을 가서 스토리를 만든다. 또 누군가는 책이나 영화를 깊고 적극적으로 감상한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감상하는 건 다르다. 나의 대뇌피질을 마구 이용하여 나만의 감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통찰과 애정 섞인 평론! 그것은 자신의 이야기와 철학이 될 수 있다. 또 모호하고 낯선 것들에 대한 즉흥적 경험, 무호함, 그리고 연애. 이것들이 스토리가 되는데… 이게 불가능하다면? 그러나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을 때, 사람들은 소비한다.

타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물건을 사서 SNS에 올리는 거다. 이것들이 점철된 SNS를 본다면, 어떤 이들은 그의 화려함에 부러움을 느낄 지 모른다. 그런 걸 가져보지 못한 이들은 그 삶이 막연히 행복해보여서 그와 친해지고 싶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이것들로 자신을 채우는 것이다. 물론 나도 비싼 물건을 좋아한다. 확실히 비싼 것들중에 예쁜 게 많긴 많다. 하지만 그것들로 내 스토리를 만들 생각일랑 전혀없다. 내 눈에 그러한 사람들은, 안타까워 보인다.

노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가 이렇게 피상적인 남의 스토리들로 누군가와 대화할 때, 정보에 빈곤한 노인들은? 또래 이외에 젊은 이들과 대화해야 할 때에 노인들은 정보력에서 당연히 질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자기 스토리도 만들어 내기 어렵다. 돈이 없으면 더 그렇다. 그럼 노인들은 무엇으로 스토리를 채우나. 정치다. 우리가 SNS로 재미있는 남의 썰을 주고 받듯, 노인들에겐 ‘정치’가 그러한 피상적인 지식일 지 모른다.

[=영화 <우리 손자 베스트>중에서]

어떤 정치적 신념은 그들에게 영광스러운 지난날에 기념비적인 의미일 뿐만 아니라, 대화의 도구가 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들은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 있는데, 이 사람이 되든 저 사람이 되든 별 다르게 바뀐 게 없었더라는 것이었다.(적어도 예전엔 상당히 그러했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정치에 누구보다 열을 올린다. 왜? 대화하고 싶어서다. 

그러니까 최근 3년 동안, 적지 않은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선 꽤 흥미로운 시간들을 보내셨던 걸수도 있다. 정치적으로 그 많은 이슈들을 겪으며 소통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근혜의 구속, 그리고 재판이 의미하는 건 무엇일까? 곧 그들은, 소통할 소재를 잃어버릴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견디기 힘든 상실감일 것이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살고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아마 세상은 우리의 스토리를 억제하려 들지도 모른다. 우리 각자의 스토리가 부족해야 더 많은 피상적인 정보들을 나누게 될 것이고, 그래야 더 많은 광고가 팔리며, 더 성능 좋은 스마트폰을 필요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디지털에서 동떨어진 세대가 될 것이며 여러분도 그럴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스마트폰으로 보고 계실 여러분도 노인들처럼 정보에 빈곤한 계층이 되실 거다. 하지만 나는 노인이 되더라도 내가 오늘날 지지했던 정치인의 일거수 일투족에 열을 올리고 싶진 않다. 우린 끊임없이 자기 스토리를 만들며 살아야한다. 자식들이 이야길 듣고, 또 듣고싶어하는 이야기 주머니가 달린 할머니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을 적극적으로 살아야지.

[=영화 <유스>중에서]

거리의 낯선 이성에게 뜬금없는 찬사를 건네는 거다. 휴대폰을 꺼 놓고 하루 직장에 나가보지 않는 것이다. 친구가 며칠전에 샀다는 비싼 운동화를 마구 밟아주는 것이다. 또 어떤 날은 남장 혹은 여장을 하고 거리에 나가보는 것이다. 스토리가 없으면, 이렇게라도 만들어봐야 한다. 적극적인 삶의 자세로.

어떤 생명체의 수명은 겨우 하루이며, 그 안에서도 분명 좋은 시절과 그렇지 않은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의 하루도 그래야한다. 날씨처럼 변모하는 것, 대수롭지 않은 시간이 자랑이 아닌 것, 그것을 안다면 우리는 아침에 창문 밖을 살피는 두근거림으로 매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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