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나는 돈 키호테를 안다. 그러나 <돈 키호테>를 읽지 않았다. 그저 풍차를 거인으로 오인하고 돌격하는 늙은 기사의 이미지만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니, 나는 돈 키호테를 모른다. 밀란 쿤데라는 ‘모든 소설가는 세르반테스(<돈 키호테>의 저자)의 자손’이라고 말했다. 최초의 근대 소설로 평가되는 만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읽진 못하더라도)한 번쯤은 펴봄직한 소설이다.

갑자기 살짝 부끄러워진다. 글을 깨친 이후, <돈 키호테>를 읽을 수 있었던 시간은 차고 넘쳤지만 나는 읽지 않았다. 청소년용으로 읽은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나지 않으니 읽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2000페이지에 가까운 소설을 완독할 자신이 없었다는 변명도 살짝 해본다.

그런 내가 굳이 돈 키호테 박물관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솔직히, 나는 돈 키호테에 당장 관심이 없었다. 문학을 사랑한다고 돈 키호테까지 사랑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돈 키호테를 읽지 않고서는 소설가가 될 수 없다’는데, 그래서 소설이 잘 안 써지는 건가 싶기도 하다.

물론 언젠가 읽고 말 것이다. ‘언젠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을 거야’라고 다짐하는 것과 비슷하게 들리긴 하지만, 아무튼 나에게 돈 키호테는 아직 먼 존재였다. 박물관 입구에 세워진 왼손을 하늘 위로 쳐들고 있는 돈 키호테의 동상이 나와 S를 반겼다. 동상은 ‘들어가거나 말거나 내 알 바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우리는 그를 지나쳐 갤러리 홀로 들어섰다.

돈 키호테를 재해석한 회화와 조각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작품 속 돈 키호테는 어딘가 쓸쓸해 보였다. 앙상한 뼈, 쏙 들어간 볼, 희끗한 수염, 공허한 눈. 그곳엔 광인이 아닌 한 인간이 담겨있었다. 나는 돈 키호테의 자세한 사연을 모른다. 그저 스페인의 라만차 마을에 사는 늙은 신사가 한창 유행하던 기사 이야기에 빠진 나머지, 스스로를 기사라 칭하고 여러 모험을 한다는 것밖에는.

갤러리를 한 바퀴 돈 후, 어두컴컴한 방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들어서니 팟, 조명이 켜지며 길이 생겼다. 방 안쪽 중앙엔 책을 읽고 있는 돈 키호테 동상이 있었는데, 지나치게 고요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숨까지 조용히 내쉬게 되었다. 동상 앞에 의자가 마련되어 있어, 우리는 잠시 앉기로 했다. 벽과 천장엔 소설의 장면들을 다소 추상적인 기법으로 그린 그림들이 있었다.

문득 그의 모험이 더욱 궁금해졌다. 세르반테스는 당시에 유행하던 기사 이야기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돈 키호테>를 썼다. 그래서일까. 그의 모험은 엉뚱하기만 하다. 돈 키호테는 진지하지만, 독자는 그를 보며 키득거린다. 보통 ‘기사’라고 하면 위엄, 명예, 경건, 무용 따위가 생각나지만, 돈 키호테에겐 그러한 면모를 기대하기 힘들다.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기사의 권위는 <돈 키호테> 안에서 무너진다.

이층에 올라가니 수많은 삽화와 스케치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수많은 이미지와 텍스트들이 지나쳐갔다. <돈 키호테>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40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은 돈 키호테를 쓰고 그리며 계속해서 재생산해냈다. 세르반테스는 죽었지만 돈 키호테는 살아있다. 세르반테스는 죽었지만 돈 키호테 안에 살아있다. 나는 <돈 키호테>를 읽지 않았지만 <돈 키호테>를 안다. 하지만 여전히 모른다. 모르지만, 박물관을 천천히 둘러보면서 내 상상 속의 돈 키호테에 살을 붙여나갔다. 나는 그를 어떤 방식으로 재생산할 수 있을까.

한 문단에 벌써 돈 키호테를 일곱 번이나 쓰고 말았다. 더 이상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나는 또 어쩔 수 없이 ‘돈 키호테’라고 써버린다. 나는 그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하고 싶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없어, 무력하게 입을 다물어 버린다.

우리는 돈 키호테 박물관을 나왔다. 서늘한 공기가 갑자기 뜨거워졌다. 입구엔 돈 키호테 동상이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서있다. 나는 돈 키호테에게 다시 만나자고 인사했다. 그는 대답이 없었고, 나 또한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박물관을 둘러보고 온 지금, 나는 돈 키호테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되었을까. 여전히, 나는 돈 키호테를 모른다.

아 우선 소설을 읽어야겠다. 물론 ‘언젠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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