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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신문 지해수 칼럼] 나홀로 식사할 권리

[공감신문] 아프면 서럽다. 안 그래도 퍽퍽한 삶에 서리가 낀다. 그래서 어떤 측면으로는 괜찮아질 수도 있다. 일말의 동정심으로- 치열했던 스스로를 바라보는 계기이기도 하며, 또 누군가의 챙김을 받는 이벤트가 생기기도 하니까. 아, 나는 사랑받는 사람이구나- 새삼 느낀다. 물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럴 땐 서리가 차가워서 퍽퍽한 감자를 얼어붙게 만든다.

= Kimia Ferdowsi Kline <Two Heads>

소중한 사람에게- ‘아플 땐 잘 먹어야 한다’며 영양이 듬뿍 담긴 죽을 사다 주곤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약을 복용해야 하는 경우라면 식사가 동반되어야 하지만, 진짜 건강을 위해선 ‘좀 안 먹는 게’ 약일지도. 실제로 야생 동물들은 몸이 아프면 단식에 들어간다. 스스로 치료해야 하는 그들은, 이렇게 해서 치유력을 끌어올린다.

동물들과 비슷한 것을 먹으며 진화해 온 인간이라고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거 인류는 사냥에 실패하면 굶어야 했다. 음식을 저장하는 기술을 터득했지만, 지금의 수준과 비교할 수 없다. 사실 우린 꽤 오랜 시간, 단식할 수 있는 신체를 가졌는 지도 모른다. 예수와 석가모니 모두 꽤 오랜 기간을 단식했었다. 그런데 왜 지금 우리는, 한 끼라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 신경이 곤두서는 걸까. 게다가 요즘은 ‘안전한 식품’이 드물다면서? 왜 우리는 아프다는 이에게, ‘그러게 작작 좀 먹지’라고 말하지 못 하는가.

인간이 이토록 찬란하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적 동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맹수들보다 열등했던 우리들은 공동체 정신을 발휘하여 서로 힘을 모았다. 우리가 이른바 ‘동물의 왕국’처럼 아무나와 성관계 하지 않는 이유도 다 공동체를 잘 유지하기 위한 약속이었던 것이다. 이전에는 남자들이 먹을 것을 구해오고 여자들이 자녀를 양육하는 구조가 뚜렷했었다. 여자의 자녀가 ‘내 아이’였기에, 남자는 더 열심히 사냥하여 양육에 동참했었다.

그렇다. 인간들을 하나로 묶은 건 ‘먹고 사는’문제 였던 것이다! 법- 이전에 본능에 충실했던 인간은, 분노하면 상대방을 돌도끼로 찍어버리고 싶었을 거다. 하지만 배고픔이, 참게 해주었다. 곰 발바닥 하나라도 더 구하려면 저 쳐죽일 놈이 내 편인 게 유리했으니까.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 운명 공동체. 식구, 食口. 예전엔 그런 개념이었다. 인간들은 서로 함께하기 위하여 주구장창 배고픈 몸으로, 진화해온 것이다.

=영화<타이타닉>중에서

"밥 먹을래, 나랑 뽀뽀할래! 밥 먹을래, 나랑 잘래! 밥 먹을래, 나랑 살래! ... 밥 먹을래, 아님.. 나랑 같이.. 죽을래!"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유명 드라마의 명대사다. 상대방에게 밥을 먹으라는 것, 또는 밥을 먹자는 건 이런 의미다. 그러니 우리가 아픈 상대방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표현이, ‘아플 때 잘 먹자’가 된 것이다. 아프겠지만 서러워 말렴, 네 운명 공동체가 여기있단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한가? 먹을 게 넘쳐난다. 너무 많이 먹어서, 병에 걸린다. 과잉 상태다. 작년 여름, 초복-중복-말복 때에 삼계탕 관련 건강 기사를 보았었는데 진짜 ‘보양’을 위해서는 삼계탕이 아닌 채소를 먹으라고 하더라. 지방과 단백질은 이미 충분할 테니, 무기질 좀 먹으라고.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난 우리들은, ‘어떤 것’을 먹을지에 대한 고민과 선택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혼자 밥을 먹는 행위가 가능해진 것이다. 상대방이 없어도 먹을 걸 구할 수 있다. 돌도끼로 찍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운 놈이 없어도, 편의점에서 육해공 출신의 반찬이 8가지나 들어있는 도시락을 4천원에 살 수 있다. 그러니 왜 미운 놈의 얼굴을 마주보며 밥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음식은 더불어 먹어야 제격’이라며, 식사에서 중요한 것은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어떠한 측면으로는 공감할 만한 이야기다. 사랑하는 사람과- 즐거운 맛의 경험과 행복, 이야기를 나누는 건 매우 행복하다. 하지만 우린 더 이상 ‘음식 자체’를 나누는 일에 큰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 오면서 점점 인스턴트식 소통이 많아지고 진짜 친구를 사귀기 어려워졌다. 친구와 가족, 소중한 사람과 시간을 만들기가 어렵다. 그들과의 식사라면 행복 그 자체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와 굳이 식사해야 할까. 오히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식사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 수 있다.

음식은 정성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다. 누군가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 자체에서 오감의 자극을 받는다. 평소 느끼기 어려운 생글생글한 것들로부터의 촉감부터- 소중한 이의 즐거운 표정을 바라보는 시각적 행복에 이르기까지. 이 과정 자체가 대단히 멋진 경험이다. 또 이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함께 ‘밥을 먹는다’는 건, 그리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그 사람이 ‘살아갈 힘을 얻는’, 또는 ‘원초적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전에 드라마<또 오해영>에서 남자가 헤어지려는 여자에게, ‘네가 밥 먹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 졌어’라는 말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도 당연하다.

= Marc Chagall <The Romantic Dinner>, 1980

그러니 어쩌면 이건, 소중한 사람들만-은 아니더라도, 싫은 사람에게 보여주기 꺼려지는 게 당연한 심리 아닐까? 심지어 맛있는 것일수록 더욱! …나만 그런 건가, 난 ‘정말’ 맛있는 음식을 보면 조금 느슨해지고 방어가 풀린다. 내 편인지 아닌 지 구분되지 않는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주긴 싫다.

‘누구와’ 나누어 먹는 지는 중요치 않고, 나누는 행위 자체가 의미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의견에 반대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나를 줄곧 배고프게 만든 게 사실이라면, 차라리 내 밥그릇을 사수하게 만들- 어느 감동적인 영화나 시사 뉴스와 함께 하는 게 더 나은 일이 아닐까. 이미 여기에 꽤-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론 오감을 부딪히는 식사를 기대하며 오늘도 식탁에 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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