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위에 댓잎 자리 펴서 그대와 내가 얼어 죽더라도 정든 오늘 밤 더디 새소서, 더디 새소서’

- 고려가요<만전춘>(작자미상) 중에서.

[공감신문] 유치원 때 놀이터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놀이기구는 미끄럼틀과 그네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찔하다. 그네에 올라타 쇠줄을 위로 말아 올리다가 손을 놓으면, 힘센 줄이 풀리면서 나를 태운 그네가 팽글팽글 어지럽게 돌았다. 그때 나는 겨우 십 몇 키로나 나갔을까? 작은 두 손으로 온몸을 그네에 잘 고정하지 않으면 튀어나가기 십상이었을 거다. 그래서 우리들은 놀이터에 엄마들이 없을 때에만 몰래몰래 그렇게 그네를 돌려가며 놀았다.

때로는 그네에 올라서서 춘향이처럼 아주 머어얼리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기도 했었다. 그네가 뒤로 빠졌을 때 무릎을 힘껏 접었다 펴면서 화알짝 공중으로 독수리처럼 가슴을 열었다. 아파트 건물에 가려져서 내다볼 것은 없었더라도 해방감이 무지 좋았다. 생각해보면 그 보수적인 조선시대에, 치마 입은 아낙네들이 이런 그네를 타고 놀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 여인들은 담 밖을 내다보려 널을 뛰었다.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는 단오엔, 체력을 보충하는 음식을 먹었다. 여성들은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었다. 치마 속이 차르르 흩날리는 그네 타는 풍경을, 이 날 만큼은 이해해주었다 하더라.

= 신윤복 <단오풍정>

사실 조선시대 이전의 국가인 고려는 불교국가였다. 고려는 조선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자유롭고 개방적인 국가였다. 동아시아 이외에도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교류를 활발히 할 때에, 서방 국가들이 이 나라를 ‘조선’이 아닌 ‘고려’라 기억하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고려의 상인들은 이슬람과도 무역하였다. 고려가요 <쌍화점>만 보더라도, ‘만두가게에 만두 사러 갔더니, 回回회회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라는 가사가 나온다. 여기서 회회아비는 아라비아 상인을 뜻한다는 해석이 있다. 그이가 내 손목을 잡더라는 것이다.

연애 역시 자유로웠다. 고려는 페스티벌이 많은 나라였다.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불교 축제는 사실 남녀 만남의 장이었다. 봄 시즌이 막 시작되면 지금도 많은 페스티벌들이 앞 다투어 개최된다. 만만치 않은 티켓 값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는 페스티벌’들은 하나같이 매진이다. 재작년에 지인의 초대로 모 페스티벌에 갔었다. VIP테이블 기본 예약금이 500만 원선. VIP존은 상당히 넓었고, 꽤 많은 테이블이 있었다. 누가 얼마나 술을 더 사먹을지 모르니, 제비뽑기를 해서 자리를 골랐다. 우리 테이블도 그랬지만 거의 대부분 모두가, 낮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즐겼다. 외국인(특히 중국인) 테이블도 많았지만, 한국인들의 ‘노는 힘’과 열정은 가히 세계적인 수준.

그런데 이것을 단순한 ‘유흥’이라 말하고 싶진 않다. 흥겹게 노는 것은 맞지만, 현대적으로 유훙의 의미가 상당히 부정적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자유연애나 외국인, 남녀가 어울리는 축제에 대하여 ‘혼탁’하다는 이미지가 없었다. 물론 과한 부분에 있어서 스스로- 혹은 서로 간에 수치심을 느끼고 경질 받는 일들도 있었겠지만.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유흥을 ‘유흥’같이 받아들이게 된 것은 바로 유교가 들어오면서 부터였다.

우리는 조선의 개국 과정에 대해 교과 과정에서 이미 배웠었다. 고려 말에 신진사대부의 세력을 입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하였다는 얘기, 조선을 개국하고 무학대사의 추천으로 한양으로 천도하였다는 얘기 등등. 한반도에서 어느 국가가 성립하고 쇠퇴하는 과정은 늘 이전에도 있었다. 그런데 조선의 개국은 상당히 남달랐다. 국교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백성의 생활 문화 양식 전체가 뒤바뀌게 된 것이다!

사실 종교, 아니 종교 문화란 지역적 특색을 띄는 경우가 크다. 종교에서 억압되는 행동들의 경우, 그 지역 생활에서 숭배의 대상과 연관된 게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커뮤니티 전체가 먹고 사는 배에 큰 지장을 준다면 귀하게 여겨지는 게 전혀 이상할 일이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돈’을 바라보는 태도처럼. 그것을 경시하거나 헤치는 태도는 당연히 금지된다.

소를 숭배하는 인도의 힌두교 [AP통신]

그런데 유교는 달랐다. 유교 사상이 우리 생활양식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었다. 고려 말, 많은 승려들은 타락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신진사대부들은 이전 집권층이 따르던 불교에 상당한 거부감이 가지고 성리학을 수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태조는 이전에 집권층을 몰아내고 조선을 건국하며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한 것이다.

백성들의 집 구조도 조선으로 들어온 이후 바뀌었다. 고려 시대엔 부녀자들도 쉽게 집 밖을 출입할 수 있는 구조였는데, 조선 이후 여자들은 집에 있게 되었다. 그녀들은 외출할 때에 너울로 온몸을 가렸다. 임금과 아버지와 스승은 하나가 되었고, 장유유서라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중시되었으며,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여 남녀가 칠세가 넘으면 한 자리에 앉지 못하였다. 이전에 ‘호주’가 되기도 했던 여자들은, 남편이 혹 죽더라도 수절을 지키며 열녀가 되어야 했다.

13세기 말에 건국된 조선. 14세기 세계엔 어떠한 변화들이 있었나. 가장 대표적으로 르네상스가 있다!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이어진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정신을 되살리는- 이른바 ‘혁명’이었다. 우리가 받아들인 유교 역시 인간이 중심이 되는 사상이었다. 하지만 조선에 온 유교의 성격은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들에 의하여 변질되고 왜곡되어진 것이다.

원래 유교 사상의 핵심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수기- 일단 자기 스스로를 잘 닦는데 힘쓰고, 치인- 남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자신을 수양한다는 건, 불교와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불교 역시 보살 스스로 성불하라 하지 않나. 그런데 조선에 넘어온 성리학은 이러한 사상보다는 양식 자체로 변질된 것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공경해야하는 것은 맞지만, 그보다 앞서 첫째인 자기 수양이 되지 않은 사람이라면- 과연 무조건적인 공경을 요구할 수 있을까.

청나라 말기에 유행했던 전족(어린 소녀의 발을 묶어 자라나지 않게 하는 풍속)은 당시 여성들을 집 안에 모셔지게 했다. 시작은 이러했다. 자라나는 아이의 발을 묶으면 당연히 통증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뒤뚱거리며 걷는 모습이 성적 매력을 풍겼다는 것이다. 또한 여성이 밖에서 일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집안의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고. 그런데 이것이 과연 유교, 그러니까 수기치인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한국 전쟁 이후, 우리는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문화와 힘을 키우기보다 다른 강대국들에 의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였었다. 고려적인 것, 조선적인 것들은 있었으나- 대한민국적인 것이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수동적인 태도? 그게 대한민국 적인 거라면 얼른 바꿔야한다고 생각한다.

한반도 임시정부 수립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이 개최하였던 ‘미소 공동 위원회’

우리는 늘 ‘단일민족’이었다며 자부한다. 하지만 서역과 교역했고, 수많은 외세의 침탈을 당했던 우리가 과연 한 핏줄이라 말할 수 있을까? 단일민족이라 말하려면 적어도, 우리만의 태도를 가져야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선 우리끼리 능동적으로 대화해야 한다.

말하지 못했던 문제들이- 이제와 봇물 터지듯 하는 것 같다. 남녀 간 서로 대화하지 못하고, 사람들은 마치 어느 전통에 ‘유교’라는 이름을 가져다 쓰듯- 어느 막연한 논리에 ‘이건 보수’라고 하기도 한다. 어떤 집에서는 서러워도 참고 살던 노년의 할머니들이 남편에게 황혼 이혼을 요구한다.

지금을 과도기라 부르고 싶다. 반드시 필요한 시기라 생각한다. 고려적이고 조선적이고 미국적이고 일본적이고 중국적인 무엇이 아닌, 우리만의 것이 무엇이지 고민하는 시기라 여기고 싶다. 다만- 우리가 이것을 ‘과도기’임을 알고, 격렬한 감정으로 행동하지 않아야 이성적 대화가 가능해지며 서로가 원하는 것들로 절충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얼음 위에 댓잎 자리 펴서 그대와 내가 얼어 죽더라도 정든 오늘 밤 더디 새소서, 더디 새소서’

얼음 위에서 자리를 펴다니, 얼마나 살을 에는 듯 하였겠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어 죽더라도 정든 밤이 더디 새라고- 어느 고려 여인은 노래했다. 프랑스 문학 못지않은 풍부한 감정으로 사랑을 노래하던 관능적인 고려의 여인을 상상하라. 밝히긴 뭘 밝혀, 원래 그랬던 거지. 그런 사랑이 우리들 사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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