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교양공감] 1950년, 지금으로부터 68년 전 6월. 한국사 최대 비극이라 불리는 6.25전쟁(이하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당시 사망자와 실종자는 남북을 합쳐 약 200만 명 이상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년이라는 기간 동안, 한반도 곳곳에서는 치열한 전투들이 벌어졌다. 이중에서 ‘백마고지 전투’나 ‘영천 전투’, ‘장진호 전투’, ‘피의 능선 전투’ 등은 적어도 이름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만큼 유명한 전투였으며, 이밖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온갖 전투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반도를 나누는 군사분계선은 중앙 부근이 위쪽으로 솟아올라있는 형태다. [wikimedia 캡쳐]

현재 우리나라 지도를 살펴보면, 위도 38도를 기준점 삼아 남북으로 들쭉날쭉하게 ‘군사분계선’이 그어져 있다. 삐죽빼죽한 군사분계선은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의 군사분계선은, 전쟁 당시 근방의 고지·거점 점령전, 탈환과 수복이 이어졌던 전선의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북쪽을 향해 삐죽하게 솟은 지역은 국군과 UN군이 선전을 펼친 곳이라 볼 수 있으며, 반대로 남쪽을 향해 내려와 있는 지역은 전투에서 밀려났다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만약 그렇게 보자면, 중부전선에서는 우리 국군과 UN군이 매우 뛰어난 전술을 펼쳤을 것이 틀림없다. 그도 그럴 게 유독 군사분계선의 가운데 부근이 북쪽으로 한껏 밀려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부전선에서 맹활약했던 인물이 바로 김영옥 대령(1919~2005)이다.

우리에겐 그리 잘 알려지지 않은 전쟁 영웅, 김영옥 대령을 만나보도록 하자. [US department of defense 캡쳐]

김영옥, 어쩌면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 생소하게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근현대 전쟁사에 대해 관심 있는 분이라면 아마도 분명 김영옥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실, 아니,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교양공감 포스트에서는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을 맞아, 우리에게 잊혀져가고 있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인물 김영옥 대령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 일제 강점기의 한국인, 미군 장교가 되다

한인 교포 2세 출신이던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하 2차대전) 발발 이후 곧장 미 육군에 자원을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입대를 거절당했다. 일본에 협조하거나 투항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한 차례 입대를 거절당한 그는 1941년 관련법이 바뀌면서 징집 대상이 될 수 있었고, 이후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선발돼 장교가 됐다.

한인 교포 2세 출신인 김영옥은 육군 사관후보생을 거쳐 442 보병연대의 100대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100th infantry battalion 웹사이트 캡쳐]

임관 후 그는 일본계 이민자 2세로 구성된 442 보병연대의 ‘100 보병대대’ 소대장이 됐다. 하지만 100 보병대대는 사실상 전투부대라기보다는 ‘일본 본국에 대항할 인질’의 개념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100대대의 대대장은, 당시 일제강점기로 인해 한국인과 일본인의 감정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김영옥에게 전출을 권유한다. 그러나 그는 “여기엔 한국인도, 일본인도 없다. 우리는 모두 미국인이며, 같은 목적으로 싸우는 것이다”라며 대대에 남길 원했다고 한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인 그는 분명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지니고 있었을 터다. 더군다나 모국인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점령당한 시기였던 만큼, 일본계 이민자 2세들도 그를 무시하고 반항적으로 굴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은 선택을 한 그는 결국 대대에 남았으며, 뛰어난 지도력으로 부대원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됐다.

 

■ 유럽 전선으로, 뛰어난 전술가적 기질

김영옥 대령이 속한 100대대는 2차대전 당시 치열했던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됐다. 당시 100대대는 일본계를 바라보는 미국 내의 고까운 시선을 벗고, 미국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치열한 전투도 마다하지 않고 열심히 싸웠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죽했으면 적의 공격으로 전사하거나 부상한 군인에게 주어지는 ‘퍼플 하트 훈장’을 빗댄 ‘퍼플 하트 대대’라 불릴 정도로 부상에도 아랑곳 않으면서 격렬하게 전투에 뛰어들었다고. 이들의 혁혁한 선전을 본 군 상부는 100대대처럼 일본계로 구성된 대대를 더 조직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김영옥 대령. [100th infantry battalion 웹사이트 캡쳐]

김영옥은 이탈리아 전선에서 로마를 해방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당시 그는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었던 독일군 기지에 잠입해 정보 파악을 위해 적군을 생포해오겠다는 작전 계획을 제출했는데, 상부에서는 비웃으며 “자살행위지만 자원하겠다면 말리진 않겠다”는 식으로 허가를 내렸다. 그만큼 말도 안 되고 위험한 작전이라는 얘기다.

그의 자서전에서 당시 작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당시 그는, 양측이 모두 야간에 집중 경계를 펼치는 터라 아침 시간에는 경계병들이 곯아떨어진다는 점을 이용했다. 김영옥은 부하 병사 한명(아카호시 일병)과 함께 단 둘이 지뢰밭을 기어가, 철조망을 뚫고 적군 기지에 침투한 뒤, 곯아떨어진 독일군 입에 총을 집어넣고 생포해 다시 부대로 귀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탈리아에서의 맹활약으로 은성훈장을 수여받는 김영옥 대령의 모습. [100th infantry battalion 웹사이트 캡쳐]

100대대는 이 작전으로 생포된 독일군에게 이탈리아 내 독일 탱크 사단의 위치 등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고, 이 정보를 활용한 총공격 ‘버팔로 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다. 결국 이탈리아 전선의 판도가 달라지게 된 것은 김영옥과 부하 병사 단 둘이 시행한 ‘자살행위’에 가까운 작전 덕분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점령됐던 로마를 해방시킨 버팔로 작전, 그 시초에는 김영옥의 용맹하고 과감한 계획이 있었다.

 

■ 종전 후, 다시 전쟁의 포화 속으로

2차대전이 종료한 이후, 1946년 그는 제대해 미국으로 귀국한다. 당시로서는 그리 보편적이지 않았던 ‘코인 세탁소’의 개념으로 사업을 번창시킨 그는 나름대로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1950년 6월 25일, 그의 모국인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하고야 만다. 미국에서 사업가로 잘 나가던 김영옥의 귀에도 그 소식이 전해지게 됐다.

병역을 마친 대한민국 남자들은 흔히 ‘재입대’를 농담 삼아 입에 올린다. 이를테면 ‘군대를 다시 가느니 죽는 게 낫다’는 식으로.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이런 농담은 군대라는 집단에 속한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얘기다. 그러나 그는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곧장 결단을 내린다.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싫은, 재입대를 선택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겐 한 번 만으로도 벅찰 전쟁 경험을 두 차례나 겪은 김영옥 대령. [MSN 캡쳐]

우리는 여기서 그가 이미 한 차례 전쟁을 겪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치열한 전장을 겪고 난 군인은 심각한 트라우마를 얻게 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비극적인 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탄연과 포화 속에서 동료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극도의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특히나 전장 멀리에서 명령만 내리던 지휘관이 아니었던 만큼, 김영옥에게 재입대라는 결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모국을 위해 싸우고 싶다’는 일념을 가지고 포화 속으로 묵묵히 걸어 들어갔다. 이것은 결코 영화 주인공의 무용담이 아니다. 자랑스러운 한국계 2세 참전용사의 이야기다.

 

■ 휴전선 60km 북상의 주역, 위대한 지휘관 김영옥

육군 7사단 31연대의 1대대장으로 부임한 뒤 그에게 처음 내려진 임무는 인제군 개운동 계곡의 다리를 사수하고, 중공군을 피해 퇴각하는 한국군과 UN군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당시 그는 무질서하게 퇴각하는 아군 앞을 막아서고, 홀로 적의 공세를 막아설 채비를 보여줬다. 그의 용감한 모습을 지켜본 한국군도 그를 따라 다리를 방어했고, 결국 UN군과 한국군은 무사히 철수할 수 있었다.

이후로도 그는 2차대전 당시와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뛰어난 지휘 실력을 발휘하면서 승승장구한다. 김영옥이 대대장으로 있었던 당시 1대대는 구만산 전투, 탑골 전투, 금병산 전투 등에서 연전연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김영옥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기간 동안 세운 공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아마 수안산 전투일 것이다.

뛰어난 전술로 한국전쟁에서 맹활약을 펼친 김영옥 대령은 한국인은 물론이고 재미 한인들에게도 커다란 울림을 전해줬다. [council of korean american 캡쳐]

당시 계속되는 후퇴와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사기가 떨어지자, 대대 지휘관이었던 그는 부대원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수월한 전투마다 각 중대를 선봉에 세웠다. 이렇게 모든 중대원들이 승리를 경험하고, 사기가 고양되자 본격적으로 대규모 전투에 돌입한다. 그 전투 중 하나가 바로 수안산 전투였다.

수안산에 주둔한 중공군을 물리치라는 명령을 받은 그의 대대는 30km가 넘는 거리를 야간행군으로 우회했고, 중공군이 알아채기 전에 집중포화를 가해 수안산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현재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중부전선을 60km나 북상시킨 것이 바로 김영옥 대령과 그의 대대원들이 이뤄낸 성과다.

 

■ 한국전쟁 이후, 인도주의자로서의 삶

한국전쟁이 끝난 뒤 그는 전쟁으로 인해 피폐해진 모국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다. 때문에 미국 본토로 귀국하는 것이 아닌, 주한미군의 군사고문단으로 전출을 신청하기도 했다. 물론 김영옥을 아끼던 미 군단 사령관이 그의 전출을 안타까워하며 만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굳은 결심을 꺾을 수 없었기에 마지못해 전출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의 김영옥 대령. [국방홍보원 웹사이트 캡쳐]

김영옥 대령은 한국전쟁 당시 전쟁고아들을 위해 고아원을 세우기도 했으며, 이곳을 자주 방문하면서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이들과는 오랜 연을 이어나가다가 한때 소식이 끊기기도 했지만, 그 중 몇 명과는 긴 시간이 흐른 뒤 감격스러운 재회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인도주의적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그는 미국으로 귀국한 이후에도 다방면으로 사회봉사를 이어나갔다.

한국전쟁으로 생겨난 전쟁고아들을 돌보는 '경천애인사' 고아원 원아들의 모습. [국방홍보원 웹사이트 캡쳐]

그는 자신이 살던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박물관 등을 만드는데 일조하고, 아시아계 여성 보호단체를 설립하거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냈다.

 

■ 영웅 김영옥이 우리에게 남긴 것들

2차대전이 벌어진 유럽 전장을 누비면서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온갖 무공훈장을 수여받았던 전쟁영웅. 자신의 모국에서 전쟁이 터지자 성공적으로 이어가던 사업을 제쳐두고 다시 한 번 포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 용감한 군인. 전쟁으로 비극을 겪은 아이들을 보살피기 위해 고아원을 설립하고, 전역한 뒤에도 선한 영향력을 주기 위해 노력했던 인도주의자. 그 모든 인물이 김영옥 대령 단 한사람이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적잖은 놀라움을 준다.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전달받은 김영옥 대령의 모습. [인스티즈 캡쳐]

그는 생전에 “리더십의 본질은 비전과 의지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두 차례나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어 부하들에게 존경받는 지휘관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뛰어난 리더십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2차대전 종전 이후 찾아온 평화를 마다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국에 대한 애국심, 그리고 결연한 의지 덕분일 테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이어가면서 여생을 살아간 것은 또 그의 휴머니스트적 면모 덕분이라 할 수 있겠다.

최근 평화를 기원하는 바람이 한반도에 순풍으로 와 닿고 있다. 경색됐던 남북관계가 유연하게 풀어지고 있으며, 또 북미 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인 이벤트를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이 회담이 결국 남북 종전선언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이끌어낼 수도 있다고 내다보는 이들도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는 타계 전까지 지역사회와 약자를 위한 삶을 살았던 김영옥 대령을 기리기 위해 '김영옥 아카데미'라는 중학교가 세워졌다. [YOKA 페이스북 캡쳐]

그러나 모두가 바라는 평화가 찾아온다 해도, 우리는 이 땅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스러져간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김영옥 대령은 지난 2005년 타계한 이후, 미국 하와이의 펀치볼 국립묘지에 잠들어있다. 호국보훈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는 6월. 그가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우리는 그가 남긴 것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지를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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