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임 안해…학계 돌아가겠다" 브렉시트 앞두고 금융시장에 악영향 줄 듯
[공감신문 김대호기자] 인도 중앙은행(RBI: Reserve Bank of India)을 3년간 이끌며 인도의 경제성장을 이끌었다고 평가를 받는 라구람 라잔 총재가 오는 9월 임기가 만료되면 연임을 하지 않겠다고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라잔 총재는 직원들에게 보낸 메일에서 "정부와 논의한 끝에 9월 4일 임기가 끝나면 학계로 돌아가려 한다는 점을 알리고자 한다"고 밝혔다. 라잔 총재는 다만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조국을 위해 봉사할 준비가 돼 있다"고 덧붙였다.
글로벌 금융시장은 그의 연임거부 소식을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다. 최근 몇 년간 중국 경제가 최근 휘청거리는 동안에 신흥시장의 또다른 거대경제권을 이끈 경제 수장이 갑자기 그만둔다는 소식이 투자자들을 불안케 하고 있다.
미국의 월스트리트 저널은 영국의 브렉시트(Brexit) 국민투표를 앞두고 라잔의 연임 포기선언이 글로벌 시장을 더 불안케 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타타 자산운용의 리테시 제인 투자책임자는 “라잔의 뉴스가 시장을 요동치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라잔 총재의 연임 포기 의사 표명이 인도 환율이나 채권 등에 단기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했다. 미주호 은행의 티르탄카르 파트나이크 이코노미스트는 "인도에 부정적인 소식"이라며 "인도의 위태로운 거시경제 상황에서 라잔 총재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고 그가 없으면 거시경제 운용이 나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블룸버그 통신에 말했다.
라잔은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정평이 나있다. 그는 2005년 여름 미국 연준(Fed)의 잭슨홀 미팅에 참석해 “미국 금융시스템에 위기 가능성이 있으므로, 리스크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경고했다. 그 회의에 참석한 당시 로런스 서머스 미국 재무장관은 “그의 경고를 잘못됐다”고 무시하고, 그를 ‘러다이트’(luddite: 신기술반대자)라고 쏘아붙였다. 러다이트는 산업혁명 초기인 19세기에 영국에서 발생한 기계 파괴 운동으로, 서머스 장관은 라잔이 신기술·신금융으로 성장하는 미국 경제를 보지 못한 구태의 학자로 낙인찍은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테에 이어 2008년 리먼브러더스 파산에 따른 미국 금융위기가 닥쳐왔다. 라잔이 옳았던 것이다.
라잔은 1963년 인도에서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가 공부를 했다. 미국 시민권자다. 시카고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2003~2007년에 국제통화기금(IMF) 최연소 수석이코노미스트를 맡았다. 그는 2003년에 금융 이론과 실천에 크게 공헌한 40세 이하의 재무경제학자들만 받을 수 있는 피셔블랙상을 받았다. 올해 타임지가 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3년에 조국 인도의 부름을 받고 인도 중앙은행 총재를 맡았다. 그는 자신의 경제 지식을 낙후한 인도 경제를 이끄는데 최선을 다했다. 미국화된 그는 직설적인 발언을 했다. 힌두교의 금기사항도 거침없이 언급했고, 재벌을 사기꾼이라고 몰아쳤으며, 부패한 정치인들로부터 가난한 국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교적 폭력에 대해서는 인내를 강조했다.
그는 3년간 RBI 총재로 재임하면서 인플레이션율을 낮추고 루피화를 안정시켰으며 부실채권을 줄인 것을 가장 큰 성과로 꼽았다. 2013년 9월 취임 당시 두 자릿수였던 인플레이션율이 지난 2월 현재 5.18%로 낮아져 인플레이션 목표를 초과 달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인도 경제성장률이 올해 1∼3월 7.9%를 기록할 정도로 성장세가 지속한 것도 라잔 총재의 안정적인 통화 운영이 바탕을 형성했다는 분석이다. 금리를 올려 물가를 잡은 것이다. 부채로 성장한 기업들로선 반발하는 게 당연하다.
2014년 나렌드라 모디 총리가 집권하면서 성장을 추구하는 정부와 라잔의 중앙은행 사이에 마찰이 잦았다. 모디 총리는 지지기반인 힌두교 색채가 강했고, 기업을 두둔했으며, 기업을 위해 금리를 낮출 것을 중앙은행에 압박했다. 인도 의회내 힌두교 강경파들이 그를 공격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여당인 인도국민당(BJP) 일각에서는 라잔 총재가 안정성에 치중해 금리 인하 등 경제 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책에는 소극적이었다는 평가햇다. 모디 정권의 힌두교 강경파들은 외국물을 먹은 학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전했다.
결정적 계기인 수브라마니안 스와미 의원이 모디 총리에게 최근 2차례 서한을 보내 "라잔 총재가 고금리를 고수해 중소기업 불황과 대량 실업사태를 일으킬 것"이라며 그의 즉각적인 해임을 요구한 바 있다. 스와미 의원은 집권여당 경제통으로,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출신으로, 발언을 거침없이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와미는 자신의 트위터에 라잔 총재를 지목해 “정신적으로 완전하지 않은 인도인(mentally not fully Indian)”이라고 비난했다.
모디 총리나 아룬 제이틀리 재무장관은 스와미의 공세를 막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9월 임기가 끝나는 라잔의 연임 여부는 8월에 결정하겠다며 무언의 압박을 줬다.
이런 분쟁 가운데 라잔은 심리적 압박을 받고 먼저 연임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보인다.
모디 정부는 라잔의 연임 거절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재이틀리 재무장관은 트위터에서 “라잔은 업적을 칭찬하면서 곧 후임자를 선정하겠다고 밝혔다.
라잔 총재의 후임으로는 우르지트 파텔 RBI 부총재, 아룬다티 바타차리아 SBI은행 의장, 아르빈드 수브라마니안 재무부 수석 경제보좌관, 샥티칸타 다스 재무부 차관 등이 전문가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