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추억을 되살리는 주말추천 교양공감 포스트

[공감신문 교양공감] 엄마 손에 등 떠밀려 눈곱만 대충 떼어내고, 눈은 반만 뜬 채 식탁 앞에 앉으면 시리얼이나 샌드위치가 기다리고 있었다. 깔깔한 입으로 그걸 우물거리고 있으면 어느새 엄마가 우유나 물, 쥬스 따위를 들고 기다리고 계셨다. “고맙습니다 해야지.” 감사 인사를 제대로 표현하지 않으면 마실 걸 주지 않겠다는 엄포다. 잠도 덜 깬 침통한 표정으로 “고맙습니다아-” 하고 나서 뭔갈 마시고 나면, 얼굴에 덕지덕지 매달려 있던 졸음이 그제서야 떨어져 나간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년 전, 에디터가 어렸던 시절 어느 평범한 아침 풍경이다.

학교로 가는 길, 슬슬 잠이 깨면서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기대되기 시작하는 곳. [photo by Amoeba Kim on flickr]

학교가는 길, 아람단 형과 누나들. 아니면 녹색어머니들 중에는 인사를 받아주시는 분들도 계셨다. 집에서 학교로 가까워질 즈음이면 서서히 출근하는 어른들보다 낯익은 친구들의 얼굴이 더 자주 보였다. 얘는 옆반 친군데 축구를 잘 하고, 쟤는 우리 반 부반장이 좋아하는 친구고. 그중 친한 친구를 만나면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재잘조잘 참새처럼 지저귀면서. 그렇게 교문을 통과하고 나면 드문드문 선생님들도 볼 수 있었다. 선생님들은 말간 우리보다 더 마알간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셨다.

알코올램프 냄새가 가득했던 과학실의 모습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wikimedia 캡쳐]

이동수업 시간을 참 좋아했었다. 익숙한 교실이 아니라 멀티미디어실, 음악실, 과학실 등에서 수업을 받으면 새롭고 생소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학실은 독특한 약품 냄새가 재미있었고, 음악실은 일명 ‘성당 의자’에 앉아 투닥거리며 장난치기 딱 좋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멀티미디어실은 컴퓨터를 가지고 수업을 한다는 것 때문에 특히나 즐거웠다. 물론 수업에 집중이 잘 됐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뒷자리에 앉은 친구들과 전자오락을 하며 몰래 키득거리기도 했다.

6교시 종이 울리고, 종례를 마치고 나면 그때부턴 정말 ‘우리들의 세상’이었다. 우리는 학교 앞 문구점 앞에서 100원, 200원짜리 새빨간 떡꼬치를 사먹었다. 혀가 파랗게 변하는 ‘페인트 사탕’을 좋아했던 친구도 있었고, 오로지 축구공 하나에 목숨을 건 것처럼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친구도 있었다. 한 녀석이 쬐그만 오락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그 주위에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학원? 그런 건 5~6학년 형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었다. 우리는, 평생 이 모습 그대로일 거라 생각했었다.

일명 '불량식품'들. 우리가 먹던 것과 요즘 나오는 제품은 포장이 좀 다른 듯. [미미박스 캡쳐]

1990년대, 에디터가 초등학생이었을 시절. 그때는 지금처럼 복잡한 고민도, 심각한 걱정도 없었다. 그때 해봤을 고민이래봤자 ‘얼음땡을 할까, 눈 감고 찾기를 할까’ 정도? 아니면 ‘맥주 사탕을 먹을까, 밭두렁을 먹을까’ 정도였다. 오늘의 공감신문 교양공감은 우리 또래 친구들과 함께 시간여행을 떠나보도록 하겠다. 우리가 올라탈 타임머신은 ‘소리’, 지금은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들려오지 않는 소리들이다.

이미지, 소리, 냄새. 이런 것들은 우리를 과거 어느 특정한 순간으로 내던져버린다. 방울방울 추억 속에 빠져든다는 얘기다. 이번 시간에는 그 중 ‘소리’에 집중해보자. 우리는 어떤 소리를 들으며 자라왔고, 어떤 소리를 잊어버렸는지를 생각해보자. 무릎 밑에 때가 낄 때까지 밖에서 놀던 우리 어린 시절의 소리들은 모두 다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 추억을 되짚는 과정에서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가 포함된 점, 양해 부탁드린다.

※ 20여 년 전 과거의 일을 되새기다보니 시기적 오류 등도 있을 수 있다. 이점 역시 양해를 구하고 싶다.

 

■ 수업종소리/쉬는 시간 종소리

반짝반짝한 눈동자로 선생님을 바라보는 아이들, 혹은 밀가루 반죽마냥 책상에 늘어져 숨만 쉬는 아이들. 여러분 중에는 눈을 반짝이던 학생들도 있었을 테지만 에디터는 대체로 후자에 속했다. 아니, 자려고 작정한 게 아니고 졸음이 쏟아지더라니까! 그런데 그렇게 밀려오는 졸음을 단박에 물리쳐주던 것이 바로 수업 끝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40~50분 가량의 수업시간이 끝나면 10분, 15분 남짓한 쉬는 시간이 주어졌는데, 그 쉬는 시간 동안 우리는 뭐랄까, ‘무적의 존재’가 됐었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우악스럽게 뛰어다녔고, 옆 반 친구와 복도에서 만나 함께 놀기도 했었다. 쉬는 시간 학교 복도는 참 활기가 넘쳐났고, 그 넘치는 활력을 주체 못해 미끄러운 복도를 우당탕거리며 굴러다니는 친구들도 많았다.

점심시간이면 교실이 텅텅 비어버리곤 했다. [wikimedia 캡쳐]

특히 4교시를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면 우리는 모두 마라토너가 됐다. 아니지, 애초에 4교시가 끝날 무렵부터 책상 옆으로 다리를 비죽 내밀고 시동을 걸던 친구들이 많았다. 헐레벌떡 급식실로 달려가려고. 늦으면 기나긴 줄을 서야 하니까. 잘 먹고 쑥쑥 크던 우리는 조금이라도 빨리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급식실이나 매점을 습격해댔다.

꼼꼼하지 못했던 에디터는 깜빡 잊고 챙겨오지 않은 준비물을 빌리러 쉬는 시간마다 옆 반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다른 반 친구 대은이는 ‘김댕’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는데, 어린 나이에도 말투가 상냥하고 다정한데다 친절해 마음에 드는 녀석이었다. 김댕은 몇 번 씩이나 준비물을 빌리러 가도 한 번도 화낸 적이 없었다. 딱 한번 화를 낸 적이 있는데, 에디터가 그에게 빌린 준비물을 잃어버렸을 때였다. 그때 김댕은 에디터가 엉엉 울며 사과해도 절대로 받아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언젠가 마주친다면, 다시 한 번 사과하고 싶다.

그렇게 활기 넘치던 쉬는 시간이 끝나고 나면, 또다시 종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수업 시간이 시작되니 교실로 돌아가라’는 뜻이다. ‘별’을 먹은 마리오처럼 반짝이며 뛰어다니던 우리는 다시 교실로 모여 앉았고, 이윽고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셨다.

요즘도 동네의 학교 앞을 지나칠 때면 수업 시간·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그 종소리를 잠시 멈춰서서 들어보면, 우리가 다니던 시절의 밋밋하고 단순한 그 소리와는 조금 다르다. 뭐랄까, 소리도 좀 더 풍성하고, ‘최첨단’스럽달까? 아무튼 ‘미디(MIDI)’ 음악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이 덜해진 건 맞는 듯 싶다.

 

■ 필름카메라 필름 감는 소리

어머니는 굉장히 현명한 분이셨다. 나중에 두 아들내미들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엄마 아빠와 함께 어딘가를 놀러 다닐 기회도 없어질 것이란 걸 미리 짐작하고 계셨다. 그래서 우리 네 식구는 전국 방방곳곳을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해남 땅끝 마을부터 천년고도 경주, 춘천, 속초는 물론이고 무주, 제주도, 양양 등등. 그리고 그 여행의 기억들은 지금도 책장에 꽂힌 액자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머니가 찍어주신 드문 사진. 대체로 촬영은 아빠 몫이었다.

아버지는 카메라나 캠코더 등 전자기기를 다루는 걸 좋아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자연스레 아버지에게 촬영부터 인화까지 모든 과정을 일임하셨다. 그 탓인지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도에 찍힌 사진 속에서는 아버지를 찾아볼 수가 없다(어머니도 정작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진 않으셨다). 아버지가 엄지손가락을 열심히 밀어가며 필름을 감을 때, 카메라 앞의 우리 형제는 짓고 있던 포즈를 잠시 내려놓고 노닥거렸다. 그러다가도 아버지가 “자~ 찍는다~”라고 하시면 둘이 미리 맞춰둔 포즈를 취하곤 했다. '얼짱 각도' 그딴 건 없었고, 오로지 “김치~” 아니면 “치즈~” 둘 중 하나였다.

헌데 아버지가 카메라 다루길 좋아는 하셨어도, 또 찍는 실력은 영 아니었는가보다. 가끔씩 의정부 본가엘 가면, 어머니는 자녀들이 어린 날의 사진을 추억에 잠겨 들여다보시다가도 “으이구! 진짜 드럽게 못 찍었네!”라며 핀잔을 하신다. 초점이 안 맞는다는 둥. 그럴 때 아버지는 못 들은 체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신다.

요즘은 또 어머니가 아버지를 찍어주신다.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강아지를 놀래키는 아버지의 모습.

그 ‘드럽게 못 찍은’ 사진들은 비록 누군가가 눈을 감고 있거나 쌍둥이 형제의 맞춤포즈가 어그러져 있더라도 에디터에게는 더 없이 소중한 추억들이고, 아주 오래돼 희미해진 가족여행을 여전히 떠오르게 만든다. 그리고 사진첩을 들여다볼 때면, 땡볕 아래 선글라스를 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도르륵 도르륵 필름을 감으시던 아버지께 전화를 걸고 싶어진다.

 

■ 윈도우 95/98 시동 음악

우리가 한창 자라날 무렵인 90년대 중후반, 컴퓨터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디지털 시대’라고, 학교에서도 컴퓨터를 활용한 수업을 실시했었다. 그래서 ‘멀티미디어실’, ‘컴퓨터실’ 등이 생겨나기도 했다.

구형 컴퓨터의 모습. 모니터도 참 어마어마하게 컸었더랬다. [wikimedia 캡쳐]

당시 대부분의 컴퓨터는 윈도우 95나 윈도우 98 OS를 탑재하고 있었다. 오락이라곤 오락실의 1945, 킹 오브 파이터즈 따위밖에 몰랐던 우리에게 컴퓨터실의 컴퓨터들은 나름대로 ‘신세계’였다. 뭔지 모를 어려운 영단어들이 순식간에 휙휙 지나가고 나면 ‘Windows 95(혹은 98)’ 로고가 화면에 나타나는 것이 어쩐지 신비롭고, ‘미래적’이라 느껴졌다. 그리고 몽환적인 윈도우 시동음 역시 그 ‘미래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한 몫 했다. 마치 미래시대로 진입하는 터널을 통과한 느낌이랄까.

그러나 꼬꼬마였던 우리에게 컴퓨터는 그저 ‘오락기’ 쯤에 불과했었는가보다. 당시 수업시간에는 MS 오피스 사용 방법이라든가 얼기설기 태그를 이용한 ‘홈페이지 만들기’ 등을 가르쳤었는데, 우리는 그런 것에 그리 관심이 없었다. 그럼 무엇에 관심을 가졌었느냐고? 온갖 플래쉬 게임, ‘피카츄 배구’라거나, 혹은 ‘에뮬레이터’로 ‘포켓몬스터’를 하는 게 더 재밌었다.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그때의 컴퓨터실은 모니터가 책상 안에 들어가 있는 형태였다. 때문에 컴퓨터를 하기 위해서는 고개를 잔뜩 숙이고 책상 위를 들여다보는 포즈를 취해야만 했다. 거북목 무서운줄 몰랐던 시절, 우리는 그렇게 책상 안에 감춰진 모니터를 보면서 몰래몰래, 킬킬대며 각종 게임들을 즐겼었다.

윈도우 OS는 어느새 Me, XP, Vista, 7, 8을 거쳐 10 시리즈까지 출시됐다. 지금의 컴퓨터들은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고, 좋아졌지만 그렇게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을 주지는 않는 것도 같다. 어쩌면 그건 우리가 컴퓨터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 PC통신 접속음

기업이나 학교를 넘어 각 가정으로까지 보급되기 시작한 이후로는 컴퓨터 게임을 즐기는 경로와 방식도 참 다양해졌다. 그 무렵에는 또 ‘PC통신’이라는 게 등장하기도 했는데,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인터넷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른 게 바로 이 PC통신이다.

사실 1997년도에는 어려서인지 채팅보다 게임이 더 좋았다. [tvN 응답하라 1997 드라마 장면]

컴퓨터 게임을 할 줄 알아도 혼자만의 세계에서 노는 것에 그쳤던 우리에게 PC통신은 굉장한 놀라움과 충격을 선사했다. 사실 “하이루~”, “방가방가” 하는 채팅은 우리보다 더 조숙한 형·누나들의 몫이었고, 그보다 더 어린 우리는 초창기의 온라인 게임(바람의 나라, 리니지 등)을 집에서 몰래 즐겼었다.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당시 PC통신은 전화선을 끌어다가 컴퓨터에 꽂아 넣는 방식으로 작동됐던 것 같다. 그 말은, 결국 PC통신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전화요금을 내야 한다는 얘기. 누군가 집에서 PC통신을 하고 있으면, 전화를 걸어도 ‘통화 중’을 알리는 소리만 들려왔다.

한 두 푼이라도 아끼려던 부모님들은 당연히 우리가 PC통신을 하지 못하게끔 막으셨고, 우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래몰래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을 즐겼었다. 옆 동 살던 홍진이는 밤을 새는 줄 모르고 ‘리니지’를 하느라 전화요금 폭탄을 맞았었다고 하더라.

깡도 좋지, 집에서 PC통신으로 리니지를 했다니. 지금 생각해보면 홍진이 녀석은 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일 말고도 더 있다! [리니지 게임 장면]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된 뒤의 세대들은 저 기계음이 그저 소음처럼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당시 우리에게 저 기계음은 윈도우 95/98 시동음과 마찬가지로 다른 세상, 더 넒은 세상으로 접속하는 듯한 설렘을 전해주곤 했다.

 

■ 사각사각 연필소리

물론 우리가 천날만날 친구들과 뛰놀거나, 가족여행을 떠나거나, 컴퓨터 게임만 한 건 아니다. 아주 어릴 적부터 우리도 나름대로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르면서 자라왔다. 받아쓰기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어딨겠나.

수업시간에도 속닥거리던 우리는 시험을 치를 때가 돼서야 좀 조용해졌다. 책가방을 책상 위에 올리고, 옆의 짝꿍과 서로의 시험지를 보지 못하도록 가리고 나서 우리는 연필을 사각사각거리며 시험지를 끄적끄적 채워나갔다. 아무리 까불거리고 조잘대는 친구도 그 시간만큼은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그렇게 정적이 찾아오면 어느새 교실 안에는 연필 소리, 시험지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왜 그랬는지, 엄지로 연필이 부러져라 세게 쥐었던 기억도 난다. 그러니 필기만 하고 나면 손이 아프지. [pxhere/cc0 공개 도메인]

아직 학생이라면 몰라도, 성인이 된 우리들은 이제 연필을 사각사각거리며 글씨를 쓸 일이 그리 많지 않다. 그땐 필기를 하는 것 자체가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그립다. 누군가는 감수성을 촉촉이 유지하기 위해서, 혹은 멍하니 뭔가에 집중하기 위해서 연필로 필사(筆寫)를 한다더라. 그렇게 연필 소리도 우리가 굳이 찾아야만 들어볼 수 있는 소리가 돼 버렸다.

 

■ 눈물 나게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

이번에 소개해드린 것들 이외에도 우리 추억 속에는 무수히 많은 소리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를테면 학교 앞 문구점에 항상 있었던 ‘짱깸뽀 게임기’의 효과음. “짱깸뽀~ 빠라삐리뽀~ 야삐~(실제론 일본어라고 하더라)” 하던 그 음성을 우리는 종종 따라했었다. 

또 버스를 탈 때 천 원짜리 지폐를 내고 거스름돈을 받을 때 리듬감 있게 떨어져 나오던 동전소리도. 실수로 5000원 짜리 지폐를 냈다가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500원 동전을 잔뜩 거슬러받았던 경험이 생각난다. “주화, 또는 카드를 투입하여주십시오”라던 공중전화 속 상냥한 누나의 목소리도 기억나고. 하지만 이런 소리들은 모두 이제 우리의 기억 속에 희미해진지 오래다. 요즘 누가 현금을 내고 버스를 타겠나, 공중전화도 마찬가지고.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이번에 소개해드린 추억의 소리 대부분이 전자음이라는 것이다. 우리보다 더 앞선 세대의 형님·언니들은 ‘소독차 소리’나 ‘뻥튀기 아저씨 소리’를 추억하시더라. 나름대로 ‘아날로그 세대’라고 생각했건만, 그 분들 앞에선 빼도 박도 못할 ‘디지털 세대’가 되어버린다.

아침마다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켜 세우기가 힘든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지금보다 팔팔했던 어린 시절에도 잠에서 깨는 일은 쉽지 않았고, 출근(그때는 등교)하기가 귀찮고 싫었다. 그래도 다른 건, 우리가 어렸을 적엔 하루에 대한 기대감이 지금보다는 컸다는 것 아닐까 싶다.

엄마 손에 억지로 떠밀려 일어나고, 아침밥을 먹고, 등굣길을 나서면 그래도 기대감이 차올랐다. 오늘은 또 어떤 재미난 일이 일어날까? 오늘은 방과 후에 무얼 하고 놀까? 라면서. 또 학교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좋았고, 함께 뛰노는 것도 즐거웠다. 지금과는 다르게 말이다.

진짜 어른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나이만 먹으면 그렇게 될 줄 알았더랬다. [pixabay/cc0 creative commons]

그때의 나는, 내가 서른 살이 넘으면 ‘진짜 어른’이 돼 있을 줄로만 알았다. 멋진 자가용을 타고 아내와 데이트를 한다거나, 넓은 아파트에서 강아지를 키운다거나. 하하, 그땐 정말이지 ‘진짜 어른’이 뭔지도 몰랐던 게 틀림없다. 이제 보니 ‘진짜 어른’은 참, 뭐랄까 힘들고 괴롭지만 버텨내야 하는 삶의 연속이다.

인생은 우리를 편안하게 내버려두질 않는다. 나이를 먹을수록 사는 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우리는 더 각박해져간다. 매일을 끊임없는 고민과 새로운 사실, 사건에 직면해야 한다. 또, 책임져야 할 일은 어느 순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폭증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진짜로 어른이 된다는 건 책임감을 어깨에 이고 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와서야 깨닫는다.

출근길이 등굣길처럼 설레고 기대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또 힘내서 걷자. [Photo by Diyana Amir on Unsplash]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음은 잘 알고 있다. 모든 게 쉽고 단순했던,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설렘만이 가득했던 그때로 시간을 돌릴 방법은 없다. 아쉽지만 그건 확실하다.

그래도 열심히 살아간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품고 오늘도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먼 훗날 언젠가는 또 지금을 그리워할 테니까, 호호 할아버지가 된 뒤에 30대를 회상하는 날, 그때 떠올릴 추억들이 조금 더 아름답고 즐거웁기를 바라니까. 그땐 또 어떤 소리들을 추억하려나. 까마득한 먼 훗날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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