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그간 쿠바 여행을 소망하는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났다. 사람들이 쿠바를 꿈꾸게 하는 것들. 체 게바라의 흔적을 가슴으로 느끼고, 시가를 피우며 재즈를 감상하거나, 흥겨운 리듬 안에서 춤추고, 말레꼰의 강렬한 파도에 심취하는 것. 이 모든 것은 쿠바를 사랑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나는 쿠바에 대해서 정말이지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왠지 멕시코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쿠바행 비행기에 오르면서도, 기대감보다는‘왜 사람들은 쿠바를 가고 싶어 하는 걸까?’하는 호기심이 더 컸다.

쿠바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여덟 시였다. 사람 없는 공항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몇 없는 사람들은 요란스럽지 않게 자신들의 짐을 찾아 곧바로 떠났다. 우리도 제일 마지막에 배낭이 나오고서야 아바나로 가는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아바나의 시내로 들어서며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보았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었는데도 거리는 한산했다.

컴컴한 어둠 속에서 노란 가로등 불빛이 아바나의 낡은 건물들을 군데군데 밝히고 있었다. 간간이 드러나는 아바나의 풍경엔 빛바랜 시간들이 담겨 있었다. 켜켜이 쌓인 시간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만 보였다. 나는 언제나 낡은 시간을 사랑했다. 숙소에 도착할 때쯤, 나는 S에게 말했다. “내일 아침이면 나는 아바나와 사랑에 빠질 거야.”

그리고 나의 예언처럼,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바나와 사랑에 빠졌다. 벗겨진 페인트 조각들, 녹슨 철문들, (쓰레기 때문에 지독한 냄새가 나지만) 미로 같은 골목들,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빨래들.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아바나에 있었다. 체 게바라도, 시가도, 음악도 춤도 아닌, 쉽게 지나치는 일상과 시간의 조각들.

아바나의 골목엔 오백 원짜리 피자를 파는 피자 가게, 집 앞 계단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긴 할머니, 갈 곳을 잃은 강아지와 고양이들, 제법 잘 그린 그라피티가 있었다. 물론 앞에 나열한 것들은 한국에서도 볼 수 있다(오백 원짜리 피자는 없지만). 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지금 쿠바에 있다는 것이다. 내가 늘 마주치던 소소한(때론 지루한) 것들은 여행하며 마주칠 땐 더없이 소중해진다.

하지만 단 하나 사랑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있다면,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던 호객꾼들이었다. 미로 같은 골목을 헤매다 겨우 광장으로 나왔을 때였다. 한 커플이 다가와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 어디에서 왔어?”

“한국에서 왔어.”

“반가워! 난 호텔에서 요리를 하는데, 영어를 연습해야 하거든. 혹시 시간 돼? 영어도 연습할 겸 너희에게 지금 아바나에서 열리는 유명한 살사 페스티벌을 알려주고 싶어서. 이 근처에 있는 바에 가자.”

어라? 우리는 얼떨결에 커플을 따라 바에 가고야 말았다. 손님이 없는 허름한 바였다. 결국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남자의 설명을 들었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 어설프다. 그렇게 유명한 페스티벌이 열리는데 왜 이렇게 조용한 거지?

“그래서 페스티벌 이름이 뭔데?” 수상한 냄새를 맡은 우리가 물으니, 남자는 약간 당황한 기색을 비추며 얼버무렸다.

“아…음…. 이름은 없어. 그냥 페스티벌이지!”

페스티벌에 이름이 없다는 게 말이 돼?

그때 한창 곁을 서성이던 종업원이 남자에게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남자는 우리에게 “오렌지가 좋아, 레몬이 좋아?” 하고 묻더니, 종업원에게 스페인어로 무어라고 말을 했다.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방금 원치 않게 뭔가를 주문한 것이다.

“아니야, 우린 안 마실 거야.” 우리는 더 이상 앉아 있기 싫어서 자리를 박차고 나와버렸다. 그들은 완벽하게 우리의 시간을 망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미 말이 오고 간 바에 데려가 술값을 내게 하는 전형적인 호객 수법이었다.

그들과 헤어진 우리는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걸었다.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접근했지만 귀를 닫고 시선은 다른 데로 돌렸다. 무의미한 대화는 하고 싶지 않았다. 방금 만난 호객꾼에 대한 기억을 털어버리려 하는데, 인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빨간색 소파가 눈에 띄었다. 소파는 새것처럼 보였다. 그 옆엔 같은 디자인의 소파를 장미 무늬 천으로 싸서 줄에 묶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지켜보기로 했다.

아마도 이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3층에 있는 사람들이 줄을 잡아당기며 아슬아슬하게 소파를 옮겼다. 2층 테라스 턱에 걸리기도 하고, 잠시 쉬기도 하고, 그들만의 호흡으로 소파를 안전하게 위로 올렸다. 그들이 이사하는 법. 꽤나 협동심이 있어야겠다.

갑자기 파란색 끈으로 이어진 올드카 두 대가 우리 앞을 지나쳤다. 견인! 뒤차는 앞차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큭큭 웃음이 났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쪽으로 가보니 심각한 상황인 듯했다. 남자들끼리 싸움이 난 것이다. 스페인어로 빠르게 서로를 몰아붙이더니 한 남자가 달려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말리느라 법석이었다. 결국 싸움이 중단됐고, 그들은 서로를 흘기며 흩어졌다.

그들 사이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빨간색 소파는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올드카 운전자들은 서로 아는 사이였을까? 우리는 영영 알지 못한 채 아바나의 미로에서 벗어나 숙소로 돌아왔다. 많은 삶과의 마주침은 언제나 감사하다. 때론 버겁지만 그 무게가 오롯이 느껴질 때 비로소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내일 아바나에선 또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길이 펼쳐질까. 멕시코와 비슷할 거라던 나의 예상은 완벽히 빗나갔다. 나는 침대에 누워 내일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아바나 같은 곳은 오직 아바나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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