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대해 되새겨보는 주말추천 교양공감 포스트

[공감신문 교양공감] 이름은 대단히 중요하다.

불과 몇 년 전, 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게시글이 캡쳐본으로 온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며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 게시글의 내용은 대충 이렇다: 영국 리버풀 구단의 축구선수 ‘스티븐 제라드’는 사실 ‘거품’이다. 만약 그의 이름이 스티븐 제라드처럼 ‘X나’ 멋있는 이름이 아니라, ‘스티븐 훔바훔바’ 같이 괴상했더라면 지금처럼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널리 퍼져서 이제는 외국에서도 알고있는 '훔바훔바' 드립. [urban dictionary 캡쳐]

물론 단순한 우스개소리이며, 한 개인의 의견일 뿐이지만 ‘이름이 달랐더라면 위상도 달랐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럴싸하게 들린다. 실제로 이름이 그리 멋스럽지 않은 경우에 ‘깬다’고 느끼게 되는 사례는 국내에도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타계한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 선생님의 본명이 ‘김봉남’이었다는 것. 몇 년 전에는, 그 얘기가 우스개처럼 꽤나 떠들썩하게 돌기도 했다.

'호호깔깔 유-모어' 같은 소책자 개그집에도 저 '김봉남'이란 이름을 갖고 만들어낸 농담들이 적혀있었다. [tv조선 '이것이 정치다' 방송장면]

이름은, 대상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라틴어 격언 중에는 ‘이름이 곧 징조(Nomen est omen)’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에게 붙여진 이름은 그 사람이 지닌 모든 것을 담고 있으며, 또 이름을 듣는 이의 머릿속에 그 사람을 떠오르게끔 한다는 뜻이다.

결국 이름은 그저 누군가를 호출하거나 지칭하기 위한 단어의 조합만은 아닌 셈이다. 사람의 이름에는 어떠한 대상에 대한 감정, 경험, 그리고 그 대상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그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등 온갖 것들이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이번 포스트의 첫 문장도 그거다. 이름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거.

오늘의 교양공감은 ‘이름’이라는 것에 대해, 이름이 지닌 의미와 역할, 여러 가지 얘깃거리들, 이름의 무게에 대해 에디터가 나름대로 생각해본 몇 가지를 여러분과 함께 논의해보는 시간으로 준비해봤다. 앗, 거부감 가지실 거 없다. 언제나 그랬듯 에디터는 얄팍한 얘길 가볍게 나눠보려는 것 뿐이다. 친구와 수다 떨듯이, 가볍고 즐겁게. 오케이?

■ 시대에 따라 유행이 흘러간다

미국에서는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끌면서 등장인물인 ‘제이콥’과 ‘이사벨라’라는 이름이 인기를 끈 적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시 다를 건 없다. 당시에 유행하는 연속극 주인공 이름을 아이 이름으로 짓는 게 흔한 일이었으니까. 말하자면,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름 역시 유행을 탄다는 얘기다.

시대별로 인기를 끌었던 남/녀 이름. 돌아보면 실제로 연령대별 저 이름들이 주위에 꽤 많은 것 같다. [연합뉴스TV 방송 장면]

또, 찾아보면 ‘시대별 유행하는 이름’ 순위를 조사한 내용들도 있다! 대법원 신생아 출생신고를 기준으로, 가장 많이 사용된 이름을 년도별로 살펴볼 수도 있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시대적·사회적 배경에 따라 선호하는 이름도 달라진다는 것.

‘남자는 남자답게, 여자는 여자답게’가 미덕이던 과거에는 남자에게 좀 더 남성적인 이름을, 여자에게 여성스러운 이름을 지어줬단다. 철쑤! 판쑤! 아니면 영심이~ 순이~ 이런 식으로. 하지만 현대사회는 그런 구세대적 성 역할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남녀 모두에게 양성성이 필요한 시대다. 이런 흐름에 따라 선호하는 이름 역시 변화하고 있다. 요즘은 조금 중성적인 이름이 인기를 끈단다.

참고로 2000년대 이후부터는 남자이름으로 ‘민준’, 또는 ‘현우’ 등이 선호됐으며, 여자이름으로 ‘서연’, ‘서윤’ 등이 인기있다고 한다. 먼 훗날 누군가는 연락처를 뒤적이다가 “아유! 뭔놈의 서연이가 이렇게 많아!”라 말할지도 모를 일이다.

■ 이름이 너무 특이할 때

보통은 성씨와 이름을 합쳐서 이름을 부른다. ‘김’씨 성을 지닌 사람의 이름이 ‘공감’이라면 김공감, ‘박’씨 성의 ‘신문’이라면 박신문이라는 식으로. 헌데 성과 이름의 조합이 다소 해괴한 경우들이 있다.

그.....왕.....왕이라니 좋은 것 같기는 한데… [KBS2 나는 남자다 방송 장면]

이를테면 ‘임+금님’, ‘석+을년’, ‘경+운기’ 등. 대체로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는 이름들이다. 심지어 김씨 성을 가진 청년의 이름이 ‘병장’인 경우도 있다. 그분은 졸지에 훈련소에서부터 ‘김병장’이라 불리고, 이등병때도 ‘이병 김병장’이고, 상병이 되더라도 ‘상병 김병장’이라는 아이러니 속에 살아야만 할 터다. 또 한땐 ‘유상무 상무’ 하는 개그가 유행한 적도 있었더랬다.

직업정신 으마무시한 분들이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루리웹 캡쳐]

한편 이름에 지워진 운명의 굴레에 순응한 이들도 있다. ‘영양사 박양념 선생님’, 아니면 정수기 외판원 ‘정숙이’씨 등. 대체로 이름과 직업의 매칭이 너무나도 적절한 탓에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 쉽겠다. 그야말로 ‘천직’이고, ‘이름값’이라 할 수 있겠다.

아마 학창시절 "너는 이름은 수학인데 국어를 더 잘하네!"란 얘기 많이 들어보셨을 듯. [나무위키 캡쳐]

반대로 그 피할 수 없는 굴레를 벗어던지고,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들 역시 종종 볼 수 있다. 중학 3학년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 이름이 ‘김수학’이 대표적 사례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김 선생님께서는 위 ‘짤’이 닳고 닳아버린 지금까지도 교단에서 고등 국어를 가르쳐주고 계시단다.

■ 평범한 내 이름이 싫어요

어떤 사람은 자신의 이름이 너무 평범하다고 속상해한다. 별 다른 특징 없이 밋밋해서, 기억에 남거나 독특한 인상을 심어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같은 반에 '김지원'이란 친구가 둘 있으면, 한 쪽이 '큰 지원이', 다른 쪽이 '작은 지원이'라는 식으로 불리기도 했다. [MBC 라디오스타 방송장면]

에디터의 지인 중 한 사람은 정말 너무나도 흔하고 뻔한 이름이 싫다며, 어딜 가도 동명이인 한 명 쯤은 있다고 자조하더라. 그러면서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타인의 기억에 남기도 쉽고 독특한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이라며 부럽다고 하더라.

으익...! 동현이들 정말.... 헷갈려 죽겠네! 한명은 대학 후배, 한명은 고등학교 동창…

이를테면, ‘지혜’라는 이름은 성이 무엇이 됐건 꽤나 일반적인 이름이다. 아마 당장 여러분의 스마트폰 연락처를 뒤져보면 지혜 한 명 쯤은 저장돼 있으실 게다. 물론 에디터의 지인 중에도 몇 명 있다. 동현, 지훈 등도 꽤나 일반적인 편. 에디터의 연락처에는 벌써 네 명의 ‘동현’이 있으며, 심지어 그들 중 세 명은 성씨마저 똑같다. 아후, 헷갈려!

이런 식으로 이름이란 게 ‘대세’와 ‘유행’을 타다보니, 겹치는 이름이 나올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한 가지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해보자면, 적어도 여러분은 적어도 아래 소개해드릴 분들에 비해 ‘무난한’ 이름을 갖고 계시다는 것.

■ 야, 이건 너무 갔다

‘조금’ 특이한 이름은 많은 이들의 기억에 각인되고, 그 사람이 타인에게 자신을 어필할 수단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갔다’ 싶은 이름들도 있다. 위에 소개한 임금님, 석을년, 경운기는 애들 장난 수준일 정도로. (다만, 실제로 그 이름을 보유 중인 분들에게 상처가 될까 염려스러워 굳이 콕 짚어 언급하진 않겠다)

과거에는 이름을 마구잡이로 지어줘야 오래 산다는 미신도 있었다고도 하지만 요즘은… [인스티즈 캡쳐]

이름은 ‘내가 나임’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붙여진다. 그래서, 아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리 쉽게 속단할 일이 아니고, 가벼운 마음으로 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현실 속에는 그런, 지극히 가벼운 마음으로 지었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름을 갖고 사는 이들이 있다. 불행하게도. 개중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아이에게 이런 이름을 지어준 걸까?’ 싶은 것들도 있다.

이름은 그저 호칭이 아니다. 부모님, 또는 여러분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당신의 자손이 어떤 모습으로 살길 바라는지를 기대하는 마음을 담아 붙여주는 것. 그게 바로 여러분이 지금 달고 있는 이름이다. 그렇기에 타인의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그 사람의 앞날에 대한 일정 부분의 책임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터다.

이름… 부디 성의 있게 지어줍시다… 절레절레…

우리야 뭐, “저런 이름도 있어?”라며 우스개처럼 받아들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에겐 나름의 고충과 트라우마가 자리하고 있을지 모른다. 부디 여러분이 언젠가 아이 아빠·엄마가 되고 할머니·할아버지가 되어 자손에게 이름을 붙일 때가 되면 한 번쯤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이 아이는 앞으로 이 이름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 골목골목의 이름, 도로명주소

지난 2014년부터 ‘도로명주소법’이 전면시행됐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복잡한 주소 표기 방법 등이 간단해지고, 주소만 들어도 대략적인 위치를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직관적으로 달라지게 됐다. 물론 특정한 규칙이 국민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듯 여러 마찰과 잡음도 비어져 나오고 있지만 어쨌거나 저쨌거나, ‘구 주소’와 ‘도로명 주소’ 모두 병기하는 방식으로 차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나름대로 각각의 이야깃거리들을 담고 있는 도로명들. 개중엔 정말 감탄할 만큼 어여쁜 이름도 있더라.

이 도로명주소는 단순한 주소 표기 방안 개정의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니다. 예부터 지명에는 그 지역에 얽힌 이야기들, 역사가 담겨있다는 사실은 많이들 알고계실 것. 그래서 새롭게 정착 중인 도로명 주소 역시 제각기 그곳의 이야기, 숱한 역사들을 담고 있다.

이와 별도로, 어여쁘고 감각적인 어감을 지닌 단어를 사용한 도로명 역시 있다. 현재 전국 각지에는 150여곳의 ‘푸른길’, 100여곳의 ‘희망길’이 있다. 심지어 봄마다 여린 벚꽃들이 활짝 피는 동네는 ‘벚꽃로’, 하늘과 달로 손을 뻗게 만드는 동네는 ‘하늘달빛로’,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풍기는 곳은 ‘맛솜씨길’ 등 감탄을 자아낼 만큼 예쁘고 귀여운 지명을 갖고 있다.

물론 '한 도로명 두 동네' 같은 조금 헷갈리는 부분도 분명 있다. 모두가 도로명주소를 반기는 게 아니긴 하더라.

골목골목을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아실 것이다. 문득 들어선 골목에서 낭만과 운치가 느껴지고, 그곳의 이름마저도 독특할 때의 그 소박한 흐뭇함. 단순히 XX-X번지로 무미건조하게 느껴지던 도로들도 이름에 따라 생기를 얻고 있다. 이렇듯, 이름이 미치는 영향은 곳곳에서 나타난다.

■ 두루 주(周)자에 화할 화(和)자

어르신들은 ‘사람은 결국 이름 따라 간다’는 말을 종종 하신다. 주위를 둘러보면 맞는 말인 것도 같다. ‘다정’이란 사람은 대체로 다정다감하고, ‘지혜’라는 사람들은 슬기롭고 지혜롭더라. 헤헤, 너무 확대해석이라고? 어쩌면 에디터의 이름이 ‘확대’, 아님 ‘해석’일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자녀 이름짓기가 쉽지 않음은 잘 알고있다만, 그래도 고민해주세요! [네이버웹툰 이말년씨리즈 152화 '딸아이 이름짓기']

평범한 이름은 싫다는 분들도 만나봤고, 이름이 독특한 편이라는 분들도 만나봤다. 아직 ‘석을년’씨나 ‘최대쌍녀’, ‘최소쌍녀’씨는 못 만나봤지만 그분들에게도 나름대로 짐작키 어려운 고충이 있으리라는 것도 잘 알게 됐다. 지금까지 이름의 중요성을 강조해온 것과는 정면대치되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점은, 그 이름을 매달고 있는 사람이겠다.

이름, 대단히 중요하지. 하지만 어떤 이름이건, 여러분 그 이름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는 오롯이 여러분의 몫이다. [pixabay/cc0 creative commons]

그렇지 않나. 생각해보시길. 희대의 범죄자와 같은 이름을 하고 있지만 정의를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는 분들이 있다. 존경하는 인물을 닮길 바라며 부모님께 받은 이름을 더럽히며 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고.

아무튼 에디터가 이 얄팍한 수다의 끝에 나름 고민하고 내린 결론은 그거다. 이름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을 짊어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 것인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각자의 몫이라는 거.

여러분의 이름은? 그 이름은 마음에 드는가? 아니면, 차라리 다른 이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지는 않으신지? 어떻대도 사실 상관없다. 그 이름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여러분이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부디 여러분의 이름이 반짝반짝 빛나시기를 바라면서 이번 포스트의 문을 닫겠다.

이름 얘기는 이쯤에서 접어두고, 여러분에게 꼭 전하고픈 얘기가 있다. 조금 허무하기는 하지만 에디터는 이번 포스트를 마지막으로 교양공감팀을, 공감신문 자체를 떠나게 됐다. 교양공감팀을 맡아 이끌면서 머리를 쥐어짜냈던 순간들도 있었다. 어떤 날은 정말 말 그대로 ‘창작의 고통’을 느끼면서 수십 번씩 마른 세수를 해야만 했었다. 

그런가하면 또 어떤 날은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너무나도 즐겁고, 여러분이 남겨주시는 댓글을 읽으면서 가슴 벅찬 감정을 느껴보기도 했었다. 그래서 자기가 쓴 글을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며 읽어본 적도 있고, ‘아! 이렇게 쓰지 말걸!’하며 후회해본 적도 있다. 

그랬던 에디터가 이제는 공감신문 기자라는 직업과 교양공감 파트장이라는 직함을 내려놓는다. 예상치 못한 작별이라 당황스럽고 아쉽지만, 또 새로운 모험을 준비할 것이라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기대감이 차오르기도 한다. 참 많은 것을 배우고, 겪고, 많은 것을 느끼고 떠날 수 있어 다행이다. '잘 해온 건가' 싶어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여러분 중 누군가는 "야, 너 참 수고 많았다"고 해주실 거라 믿는다. 

에디터가 떠나고 없어져도, 당분간 교양공감 포스트는 계속해서 여러분을 찾아뵐 것이다. 다른 이들의 손을 거쳐서, 좀 더 다재다능하고 유능하며, 박학다식한 분들에 의해 계속해서 쓰여질 것이다. 떠나면서도 결국 교양공감이라는 이름은 남겨둘 수 있어 다행이다. 언젠가 신나게 웹서핑을 하다가 ‘교양공감’이란 이름을 마주치게 된다면 정말로 반가울 것만 같다.

댁내에 두루 평화로우시길. 두루 주(周)자에 화할 화(和)자, 그게 지금까지 여러분을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애써왔던 에디터의 이름이다. 부디 더 많은 이들이 두루두루 평화로우시길 바란다. 그동안 얄팍하고 수다스러운 글을 잘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을 담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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