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면 쓸 데 있는 다정한 정보’...마녀사냥의 기원부터 살펴보는 들끓는 여론의 위험성

[공감신문] 사실은 종종 누군가에 의해서 왜곡되거나 다른 것으로 덮어씌워진다. 다수가 입 모아 이야기하는 거짓은 손쉽게 진실의 탈을 뒤집어쓴다.

중세의 잔혹사로 손꼽히는 마녀사냥은 지금까지도 명맥을 뚜렷하게 유지하고 있다. 최근 불거진 보육교사 논란은 그 잔재를 여실히 보여준다.

지역 맘카페가 한 보육교사의 신상 정보를 퍼뜨려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는 것이 사건의 핵심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회원 수라는 권력으로 갑질을 하는 맘카페를 폐쇄해야 한다는 글이 폭주하고 있는 상황이다.

맘카페에 보육교사가 어린이를 학대했다는 문제가 제기된 후 어린이의 실명까지 밝혀지기까지에는 반나절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한 인물이 어린이집에 찾아가 사건을 키웠다는 기사가 포털사이트 메인에 걸리자 댓글 창에는 순식간에 “그 사람의 신상을 밝혀라”라는 요구가 쏟아졌다. 소위 신상 털기를 했다는 맘카페를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이를 두고 해당 어린이집의 원장은 또 다른 마녀사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며 우려를 표했다.

인터넷 상에는 ‘맘충’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이 난무하며 특정 집단 전체에 대한 혐오까지 조장되고 있는 상태다.

이처럼 혐오의 감정과 맞닿아 있는 문제들은 언제나 여론을 뜨겁게 달군다. 그때마다 피해자일지도 모르는 가해자의 인권은 거대한 분노에 휩싸여 사그라진다.

마녀사냥은 학문적으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끝났지만, 아직 우리 주변에 선명하게 존재한다.

마녀사냥은 유럽 전역에서 수십, 수백만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냈다. [pixabay/cc0 creative commons]

15세기 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마녀사냥은 16세기 말~17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악마적 마법이 존재한다는 당시 유럽 사회의 믿음이 이 비이성적인 현상의 발단이 됐다.

마녀사냥은 이교도를 박해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종교재판이 마법사와 마녀를 처단하기 위한 지배수단으로 바뀌면서 본격화됐다.

전해지는 구체적인 일화와 수치들은 역사를 부정하고 싶게 한다. 1582년 바이에른 어느 백작의 작은 영지에서는 한 마녀가 체포됐다. 이후 연속적으로 48명이 마녀라는 낙인 아래 화형을 당했다.

1587년 도릴 지방의 약 200여 촌락에서는 7년 동안 368명의 여성이 마녀로 지목돼 화형 됐다.

1600년대로 넘어가면서 피해자의 수는 단위가 달라졌다. 나노수 지방에서는 1629년부터 4년간 2255명이 마녀로 소추됐다.

마녀사냥이 시작된 곳은 프랑스였지만 점차 유럽 전역으로 퍼지면서 독일과 스코틀랜드 등에서 무수히 많은 살인이 벌어지게 됐다.

마녀들은 흔들리는 종교의 권력을 다시 세우기 위해 공공의 적으로 몰렸다. [pixabay/cc0 creative commons]

합리와 이성으로 대두되는 중세시대에 비논리적인 피바람이 불게 된 이유는 15세기 이후 종교적 상황과 연관이 깊다.

당시 유럽 사회에는 이교도가 침입하고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기존의 종교가 크게 흔들렸다. 기득권층은 종교적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공의 적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고안했다.

이와 함께 일제히 닥친 전쟁, 기근, 전염병 등의 불행은 대중의 분노를 폭발하게 했다. 재판에 세워진 마녀는 공공의 분노를 쏟아내기에 좋은 상대였다.

공동체의 희생양으로 지목된 사람은 자백을 할 때까지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받아야 했다. 사형 방법 역시 화형과 참수, 교수 등 끔찍한 것들이 택해졌다.

일단 마녀로 지목되고 나면 목숨을 부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마법사의 존재를 믿느냐”라는 재판관의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하면 악마의 준재 자체를 부인하는 꼴이 되므로 이단으로 몰렸다. 반대로 “예”라고 답하면 “누구를 어떻게 알게 됐느냐”라고 다그쳤다.

심문은 피고가 스스로 마녀임을 인정할 때까지 계속됐다. 피고가 회개하는 모습을 보이면 교수형을 먼저 집행한 후 화형에 처하는 그들만의 인정을 베풀었다.

주로 재산은 많지만 변호해 줄 가족은 없는 부유한 과부들이 마녀 용의자로 지목됐다. [pixabay/cc0 creative commons]

마녀라는 판결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여성이었다. 부유한 과부들과 독립한 미혼 여성들이 주로 용의자로 지목됐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변호해 줄 가족이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오늘 날에는 마녀사냥의 목적이 금전적인 데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기도 한다. 죽은 뒤에 피고의 전 재산을 몰수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야 어찌됐든 마녀사냥이 추악한 여성혐오의 단면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악마와 마법, 마녀가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신념은 지배계급과 당시의 지식인인 신부와 법관들이 만들어냈고, 그 주된 공격대상은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수세기에 걸쳐 유럽의 땅을 피로 물들게 했던 마녀사냥은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점차 그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발달한 과학기술은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았고, 이것은 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을 불러왔다.

1782년 스위스의 게랄스에서 겔티라는 마녀가 고문 끝에 참수형에 처해진 것을 끝으로 마녀재판의 참혹한 역사에는 종지부가 찍혔다.

1700년대에 역사가 끝난 마녀사냥은 형태를 달리해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다수가 주장하는 정의의 제물로 바치는 마녀사냥은 형태를 바꾸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작년, 엄마만 태운 채 아이를 놓고 출발했다는 오해를 받아 비난의 화살을 맞은 240번 버스의 기사가 그 희생양이다. SNS의 글에서 시작한 이 사건은 버스기사에 대한 항의글이 쇄도해 서울시버스운송사업조합 홈페이지가 마비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당시 교통법규 위반사항이 없으며 목격자 증언이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지자 아이 엄마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몇 년에 걸쳐 학력위조 의혹에 시달린 가수 타블로 역시 현대판 마녀사냥의 대표적인 예다.

타블로는 2년 6개월간의 법적공방 끝에 학력이 사실임을 인정받았고, 가해자인 타진요는 실형을 받았다. 그러나 타블로 본인은 물론이고 그 가족까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게 됐다.

이번 맘카페 논란만 보더라도 명확한 근거가 없는 비난은 매우 위험하다. 분노의 감정을 충분히 쏟아낸 대중은 사건을 쉽게 잊지만 피해자에게는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는다.

결국 마녀사냥은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악화됐다. 각종 유언비어나 선동된 거짓이 SNS에서 블로그나 카페로, 기사로, 다시 SNS로 퍼지며 점점 더 빠르게 확산하는 행태를 보면 우려스럽지 않을 수 없다.

무차별한 비난으로 또 다른 보육교사를 낳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되돌아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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