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생의 한양이야기] 서촌① 장동팔경첩을 따라서

[공감신문=한선생 문화해설사] 600년 역사를 간직한 서울...

아니 한성 백제시대부터 하면 2000년의 유구한 역사가 된다. 어디를 가도 역사의 결들이 겹겹이 쌓여있다. 아쉬운 것은 그것을 어떻게 보존하느냐가 문제인데 개발의 명분 아래 파괴되어 가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그래도 곳곳에 잘 찾아보면 역사의 파편조각들이 어지러이 널려있다. 퍼즐 맞추듯이 잘 찾아보면 어느덧 역사는 이야기가 되고 사람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것이 서울여행의 즐거움이다.

어디를 갈까? 서촌이다. 서울의 내사산중 서쪽의산 인왕산 아랫마을 정도로 이해하자. 세종대왕이 태어난 마을이래서 세종마을로 불리기도하나 서촌의 인물이 어디 세종대왕뿐인가? 사실 세종대왕의 흔적은 거의 없다. 진정한 서촌의 주인은 아마도 겸재(謙齋) 정선(鄭歚) (1676년 ~ 1759년)이 아닐까? 오늘은 겸재정선이 태어난 서촌을 그가 그린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을 들고 돌아보자. 그 중 <인왕제색도>, <청풍계>, <수성동>을 찾아가보자

인왕제색도
1)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비가 갠 다음 날 인왕산에 가보았는가! 백악에서 불어오는 물바람을 뒤로 하고 인왕산을 마주하여 보았는가? 안개가 짙은 인왕산을 보고 있으면 백두산만이 우리의 영산이 아니구나하는 감탄할 것이다.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골산, 높지는 않지만 저 산의 품속에서 많은 시인묵객들이 노닐었다.

시인묵객들이 인왕의 품속으로 들어온 것인지, 인왕산에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겸재정선이 76살일때 5살 위인 그의 절친 이병연이 죽어가고 있었다. 겸재의 진경화폭에 진경시를 써준 친구, 서로 그림과 글을 주고 받으며 진경문화의 꽃을 피워가던 지우인 이병연이 아닌가? 친구의 회생을 마음속으로 기원하며 인왕산을 그린다. 그런데 웬일, 종일 내리는 비가 그치지 않는다. 잠시 비가 그친 뒤 자욱한 운무가 걷히며 인왕산의 청량한 모습이 드러났다. 놓칠세라 겸재는 재빨리 붓을 들어 먹을 흠뻑 담가 붓을 종이에 뉘어 척척 그려 간다. 다급한 마음에 마르지 않은 곳에 덧칠하니 묵이 번지고 모이면서 비온뒤 인왕산의 모습이 더욱 황홀하다. 70여년 인생의 원숙미를 붓에 녹여 온힘과 정성으로 그린다. 둔중하게 자리 잡은 흰 화강암은 역설적으로 검게 칠해 단단함을 더하고 다른 것들은 운무로 처리해 생략, 그러나 이병연의 집은 안 그릴 수가 없다. 드디어 인왕제색도가 완성되었다.

우리는 이 그림을 장동팔경첩에서 찾아내어 실물과 비교해 본다. 경복고등학교 스탠드에 서니 인왕산이 한눈에 보인다. 높은 건물도 보이지 않으니 감상하기에는 제격, 아니 이곳이 정선의 집터였다는 것은 교사(校舍)앞의 <독서여가讀書餘暇> 그림을 보니 알겠다. 겸재의 마음으로 산과 그림을 비교해 본다. 나는 누구이고 겸재는 어디에 있는가?

인왕산

 

2) 청풍계靑風溪
청풍계

청풍계를 보니 인왕산자락에 청신한 기운이 감돈다. 그림을 들고 찾아보자! 아무리 찾아도 덕지덕지 붙어있는 집들 때문에 찾을 수가 없다. 큰 저택 앞 각자가 새겨져있다.

百世淸風,...100세대라니 3천년 이라할까?

오랜 세월동안 청신한 기운으로 살자는 글씨. 우암 송시열이 썼다. 이곳은 병자호란때 척화파의 좌장격인 김상헌의 형인 선원 김상용이 살던 동네다. 동생 김상헌은 청나라에 잡혀가고 형 김상용은 치욕스럽게 살지 않겠다하여 강화도성 남문에서 폭약에 불을 붙혀 자결하였다. 그 절개를 높이 사 우암 송시열이 이곳 청풍계에 선생의 절의가 자손만대에 이르라는 의미로 글을 새겨 놓았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과 바람이 맑고 푸르러 청풍계....

그 물이 흘러 청계천(淸溪川)으로 흘러 조선시대에 개천으로만 불리던 청계천이름이 되었다.

벡세청풍
3)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물水,소리聲,.... 물소리가 크게 들린다는 곳이다. 옛글에 따르면 만 마리의 말이 달리는 소리가 우레와 같은 큰 소리로 들린다는 곳이다. 그러나 환경파괴로 물이 말라 비온뒤에 물소리를 들으면 큰 행운이다. 이곳이 인왕산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곳이다.

안견의 夢遊桃源圖

수양대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안평대군이 비해당(匪懈堂)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살았던 곳이다. 안평대군하면? 그렇지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이곳에 살며 이곳의 풍광과 정취에 매료되어 꿈속에 나타나 당대의 화가인 안견(安堅)으로 하여금 그리게 했던 곳... 그래서 몽유도원도와 이곳 수성동계곡의 유사점을 비교하면 그림과 풍광이 맞아 들어간다. 그러면 이곳이 무릉도원? 그렇다. 달빛을 받으며 저녁에 한번 올라와 보시라! 이곳이 무릉도원임을 알게 된다.

장동 팔경첩의 수성동계곡. 그림속에 기린교가 보인다

그런데 장동팔경첩의 <수성동>을 보니 다리가 보이네? 기린교다. 아니 그림과 풍경이 똑같다. 오세훈 서울시장때 복원한 것이다. 원래 생태공원으로 만들려고 이곳의 아파트를 헐다보니 시멘트 투성이의 그림 속 기린교를 발견했다. 정선의 그림은 진경산수화니 만큼 그림을 보고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옥인시민아파트 주민을 이주시키는데 950억, 복원하는데 80억이 들어 갔다. 그러니 저 다리하나가 1천억이 넘는다. 문화의 힘이 그렇게 큰 것이다.

이제 저녁만남은 수성동으로 가자. 달빛을 밟으며, 계곡의 소리도 마음속으로 들으며 수성동으로 가자. 이곳에 1천억이 넘는 힐링이 있다. 겸재 정선의 장동팔경첩의 여행은 이것으로 끝....

이제 서촌의 근대로 넘어가자! 다음에는 윤동주, 이중섭, 이상, 노천명을 만나보자.

*장동팔경첩; 이곳은 안동김씨가 서울에 와서 터를 잡고 산곳이다. 장의사라는절이 있어서 장동이라 했고, 이곳의 안동김씨를 장동김씨라 했다.

이 지역 장동의 8가지 아름다운 곳을 겸재 정선의 솜씨로 그림으로 엮으니 장동팔경첩이다.

현재 수성동 계곡과 복원된 기린교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