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풍취 느낄수 있는 다채로움 더해졌으면…

[공감신문=조병수 프리랜서] 딸아이가 하루 휴가를 냈다면서 수안보 온천을 가자고 했다. 찻길이 막히는 주말을 피해서 모처럼만에 어딘가를 같이 가자는 요청이니 거절할 수가 없어서, 친구와의 점심약속을 연기하도록 양해를 구했다. 그런데, 그렇게 가기로 약속한 월요일 아침에 일찍 잠이 깨길래 TV를 틀어보았더니, 대문짝 만하게 큰 글씨로 충청도 일원에 호우경보와 주의보가 내렸다고 나왔다. 큰비에 산사태도 주의하라고 했다.

수안보를 가려면 고속도로야 속도를 낮추어서 가면 되지만, 그 근방에 가면 산길이 있어서 위험할 수도 있다. 안타까운 마음에 이리저리 고민을 하다가 살풋 다시 잠이 들었다. 그만 늦잠을 잔 셈이 되었다.

아이와 아내에게 일기예보상황을 이야기했더니, 어쩔 수 없어는 하면서도 내심 아쉬워하는 기색이다. ‘날씨가 안 도와주니 그저 동네 사우나나 다녀오라’고 얘기하면서도 괜스레 내 마음도 무겁다. 중부지방에는 호우경보가 발령이 되었다지만, 우리 동네는 하늘만 잔뜩 흐린 정도일 뿐이다. 모처럼 얻은 휴가인데 그냥 주저앉으려니까 마음이 좋지 않은지, 딸아이도 그저 심드렁하다. 하릴없이 TV 채널을 돌려보아도 별로 마음에 닿는 것이 없다.

‘차라리 이럴 바에야 한번 가보기나 하자. 비가 쏟아져도 우리는 차 안에 있는 것이고, 그냥 조심해서 운전하면 되겠지’하면서 용기를 내었다. 이렇게 길을 나설 바에야, 괜히 고민만 하느라고 오전시간을 낭비한 셈이라 마음이 바쁘다.

<수안보 인근 풍경>

집을 나서자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용인 쪽을 지날 즈음엔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렇게 빗속을 한시간 넘게 달려서 충주 근방에 들어서니까, 비가 조금 잦아들었다. 시야가 조금씩 트이면서 바깥 경치가 눈에 다가온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낮게 깔린 구름들이 산봉우리를 휘감아 도는 풍경이 마음을 촉촉이 휘감는다. 정말 아름다운 자연이요, 산하이다.

‘이렇게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좀 제대로 보존하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스며든다. 산허리를 잘라내며 아무곳이나 들어서는 흉물스런 아파트들을 보는 데 질렸던 심정이 치유되는 느낌이다. 비가 마구 쏟아질 때는 조금 부담이 되었지만, 이렇듯 비 오는 날의 정취를 맛볼 수 있게 되었으니 길 나서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수안보 온천은 나에게는 제법 익숙하고, 또 좋아하는 곳 중의 하나이다. 가족들과 함께 드라이브 삼아 찾아가서 온천욕도 하고 산채비빔밥이나 버섯전골을 즐기는 재미로, 틈틈이 들리는 곳이다. 그 동네 산허리에 있는 노천온천에 몸을 담그고 있노라면, 계절별로 다른 정취와 함께 제법 자연에 돌아와서 사는 듯한 감동도 더한다.

사람들이 붐비는 주말이나 연휴시즌을 피하려다 보니, 요즘은 예전만큼 자주 들리지는 못했다. 그런데, 비 내리는 초 여름날 오후에 바로 그 자리에 다시 서보니, 그 동안 깜빡 잊고 지냈던 그 정취가 다시 일깨워진다.

몇 해 전, 보슬비 내리는 노천온천탕에 앉아서 바라본 ‘수안보의 봄’ 분위기에 취해서, 무턱대고 메모해보았던 단어들도 떠오른다.

 

겹겹이 쌓인 산들을

휘감아 도는 물안개

겨우내 마른 땅에

봄소식 실은 이슬비

저 산자락 솔잎은

푸르름을 더하고

움츠렸던 목련은

흰 꽃망울 머금네

산기슭 놓인 돌담을

기어오르는 수증기

메마른 이 가슴에

단비를 적신 봄 내음

 

세월은 흐르고 계절도 바뀌지만, 거기 그 자리에서 비구름에 휘감긴 산들을 바라보며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을 맞노라면, 잠깐이나마 시간의 흐름을 잊기도 한다.

그리고 가족들을 기다리며 카페나 숲길의 나무그늘아래에 앉아있으려면, 어느새 그 나른한 고요함에 젖어 들게 된다. 그러면서 왠지 모르게 정신은 맑아지고, 무언가 생각나는 대로 끄적거리고 싶어지게 만든다.

도로 옆 산책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조그마하고 소담스런 예배당도 있다. 아무도 없는 그 조그만 공간에서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세상과 유리된 듯한 적막함이 피부 속으로 스며든다. 아마도 그 시간들이 내게 주어진 자연 속에서의 자유시간인 듯하여 행복함을 느낀다.

   

수안보를 오가는 길가의 아름다운 산하와 그 온천탕에서 느끼는 편안하고도 고즈넉한 분위기가, 비싼 돈 들여가며 다른 나라 온천탕을 돌아다니는 것보다 더 감동적이라는 생각이 들때도 있다. 이런 좋은 자원과 기왕에 들어서있는 주변의 여가시설에다가, 삼원색의 조명과 찌개 집 일색의 시가지 모습이 아닌, 우리의 옛 풍취를 느낄 수 있는 다채로움만 좀더 보탠다면 아주 멋들어진 휴양·관광명소가 될 것 같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의 이 온천마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하는 궁금증도 풀릴 수 있을 것이고···. 

물론 그렇게 되는 순간, 지금껏 나만이 조용히 즐겨왔던 그 ‘자유함’을 유지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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