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 시대에 미국의 세계전략이 ‘총’에서 ‘돈’으로 옮겨가

[공감신문 김인영 기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코파카바나 해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이 해수욕장의 낮과 밤은 판이하게 다르다. 낮엔 긴 백사장을 따라 늘씬한 라틴계 미녀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조깅을 하거나 일광욕을 즐기는 천국이다. 하지만 어둑어둑해지면 해변도로에 초라한 모습의 노점상들이 전등불 하나에 의지해 조악하게 가공한 보석류, 가난한 화가의 그림, 싼 옷가지들을 진열하고, 인근 부유층과 외국인 관광객을 기다린다.

필자는 1999년 여름 취재차 브라질을 방문하면서, 코파카바나 해변의 야시장에 보석 진열대를 차려놓은 70대 노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뉴욕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그는 “여기에 있는 노점상들은 사실상 실업자”라며, “뉴욕 월가는 브라질에 빌려준 빚을 받아내기 위해 실업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한 게 기억난다.

상파울루의 부자촌은 미국의 부자 타운보다 호화찬란하지만, 산등성이 달동네는 한국의 1960년대 판자촌을 연상케 한다. 글로벌 경제를 받아들인 결과는 빈부 격차의 심화였다.

2002년 10월, 코파카바나 해변 야시장의 실업자들은 금속노동자 출신인 노동당의 루이스 이냐시오 룰라 다 실바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그의 당선으로 미국의 안방인 라틴아메리카에 최대의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고, 미국은 남미의 경제위기를 우려했다.

룰라가 당선되자, 폴 오닐 미 재무장관은 "룰라가 미친 사람이 아닐 것”이라며, 좌파 정권이 미국을 반대하다간 큰 코를 다칠 것임을 강하게 시사했다. 인접 아르헨티나는 미국에 대항하다가 그해초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아르헨티나에선 노동자ㆍ빈민의 시위가 격해지자 부자들의 해외송금 규모가 커지고, 그 결과는 페소화 절하와 국가파산 선언이었다. 미국이 아르헨티나의 파산을 막아주지 않았다.

브라질은 코파카바나 해변의 두 모습처럼 진퇴의 기로에 서 있었다. 룰라의 당선이 확정되자 가난한 사람들은 마치 갑자기 부자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길거리를 뛰쳐나오며 환호했다. 하지만 룰라는 당선과 동시에 그를 지지해준 서민 대중보다는 대형 뱅커등 부유층의 눈치를 살펴야 할 입장이었다. 해외 자금 이탈은 어쩔수 없다 하더라도, 브라질 부유층들이 돈을 다 빼내갈 경우 룰라는 빈털터리 국가를 인수하게 되는 것이다. 브라질 국민의 민심을 이반시킨 페르디난도 카르도수 현 대통령도 70년대 남미 종속이론의 대부였지만, 대통령이 된 후 시장 개혁을 주도했다. 부자와 관광객들이 야시장을 찾지 않는다면 노점상의 실업인구는 누가 먹여 살릴 것인지가 사회주의자 룰라의 최대 과제였다.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전 대통령 /연합뉴스

브라질에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부시 행정부는 룰라 당선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예의 주시했다. 브라질 주재 미국 대사는 룰라를 ‘아메리칸 드림의 화신’이라며 외교적 발언을 했지만, 미국의 속마음은 아니었다.

동서 냉전이 치열했던 시절에 미국은 중남미에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면 물리적 힘(총)을 동원해 붕괴시키려고 했다. 1960년대말 쿠바에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서자 미국은 피델 카스트로에 대한 반혁명 쿠데타와 암살을 지원하고, 쿠바 해역을 봉쇄했다. 또 1973년 아우구스토 피토체트 장군의 우익 쿠데타를 배후에서 조정, 민주선거로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당 정부가 무너지게 한 것도 미국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미국은 안방인 남미에 최대의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섰는데도 가만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바로 자본(돈)의 힘을 동원한 것이다.

브라질에 좌파 정권이 들어설 우려가 높아지자 헤지펀드의 대부 조지 소로스로부터 자본의 공격이 시작됐다. 소로스는 선거가 있기 5개월전인 2002년 6월초 “시장경제를 중시하는 호세 세라 후보가 당선돼야 한다”며, “룰라가 당선되면 브라질은 국가파산을 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특정 후보를 지지했다. 그의 발언이 뉴스를 탄후 헤알화는 급락하고 국채 가산금리가 10% 이상 폭등했다.

퀀텀 펀드의 소로스 회장은 외환투기자와 자선사업가로서 국제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의 발언은 이젠 뉴욕 월가 사람들이 이머징 마켓의 정치 변동기에 지지하고, 배척할 상대를 구체적으로 지목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카르도수 대통령이 3선 금지 조항으로 선거에 나갈수 없게 되자 여권은 세라 후보를 밀었지만, 여론조사에서 야당 후보인 룰라에 밀리고 있다.

룰라는 당선되면 2,500억 달러의 외채를 상환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그의 주변에 있는 좌파 인사들은 외국빚을 갚지 않겠다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이에 해외투자자들은 소로스의 손짓에 따라 브라질을 떠나기 시작했다. 한때 퀀텀 펀드에서 소로스의 부하로 일한 경력이 있던 브라질 중앙은행의 아르미니오 프라가 총재가 백방으로 뛰고 있지만 역부족이었다.

해외 자본이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브라질은 파산 위기에 처했다. 그때 부시 행정부가 나타났다. 미국은 지난 8월 국가 파산 위기에서 구한다는 명분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을 앞세워 브라질에 3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약속했다. 소로스를 대표로 하는 뉴욕 월가 자본이 브라질 경제에 병을 주고, 부시 정부가 약을 준 것이다. 하지만 우선 60억 달러를 주고, 나머지 80%는 대통령 당선자가 IMF 조건을 수용할 경우에 준다는 단서를 달았다.

룰라가 외채 동결을 주장하는 강경 좌파의 말을 따르다가는 당장에 국가가 파산하고, 노동자ㆍ농민을 굶게 할 것이 명백하다. 전투적 인물로 비춰졌던 룰라는 선거에 임박하면서 현정부의 개방 정책을 이어가겠다며 온건좌파로 변신했다.

1999년 칠레에 아옌데 정권 붕괴후 20년만에 리카르도 라고스의 사회당 정부가 출범했다. 국내에서 빈곤퇴치와 복지향상등 사회주의 공약을 내걸던 라고스도 선거 직전에 뉴욕 월가를 찾아와서 시장 경제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하며, 좌파노선을 수정해야 했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 브라질에도 나타날 것임을 예고했다.

제프리 가튼 예일대 교수는 근작 ‘재산의 정치학’에서 “국제통화기금(IMF)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보다 중요하고, 일본의 시장 개방이 미군 주둔보다 큰 이슈”라고 주장한 바 있다. 글로벌 시장 시대의 미국의 세계전략이 ‘총’에서 ‘돈’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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