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생의 한양이야기] 정조의 화성행차(華城行次)를 따라서①

[공감신문=한선생 문화해설사] 오늘은 잠시 한양에서 눈을 돌려 며칠 후에 있을 수원화성문화제를 (10월 7일~9일) 가 보자.

조선의 왕들 중에서 가장 많은 행행(行幸, 왕이 궁궐을 떠나 다른지역으로 거동하는 것)을 한 왕은 누구일까?

정조(正祖 조선 22대왕, 1752~1800 ,재위기간 1776~1800)였다. 정조는 재위 24년동안 66번의 행행을 하였는데 그중 절반이 수원지역이었다.

정조

왜 그리 많이 수원지역으로 행차를 하였을까 ?

그 이유는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가 묻힌 현륭원을 자주 찾은 것이다. 한양의 동쪽 배봉산(현재 서울시립대근처)에 있던 아버지의 묘소를 조선제일의 명당, 화산기슭(현재의 융건릉)에 있던 수원부로 이장하고 일년에 2차례 이상씩 참배하였다.

그곳에 있던 민가는 어디로 이주하였을까? 민가 244채를 10리 떨어진 팔달산 아래에 이주시켰으니 그곳이 현재의 수원이다.

현재 수원시

당연히 철거하는 비용과 집값은 이주비용이란 명목으로 보상하여 이주민들은 오히려 임금의 성은에 감격하였다고 한다. 집을 새로 짓고 관아와 사직단을 조성하고 임금이 머물 행궁(行宮)을 지어 새 고을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수원부사 조심태가 아무런 차질과 잡음 없이 진행하였다. 또한 조정에서 6만5천냥을 내려 수원의 상업을 진작시키고 이주민들이 이 돈을 빌려 생업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을 주변에 농사에 적합한 대규모 수리시설인 만석거(萬石渠)를 만들어 농사에 도움을 주었다. 명실공히 농업과 상업에 의해 자력으로 존립 할 수 있는 계획 신도시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만석거

그뿐인가? 임금이 언제라도 행차하여 머물 수 있는 행궁까지도 준비하였는데 이는 세자인 순조가 장차 15세가 되면 국사를 내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본인이 거처할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성 행궁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다. 무엇을 더 해야 했을까? 아무리 계획에 의하여 잘 조성된 곳이라도 외적에 의하여 쉽게 공격당할 수 있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외적의 침입 시 고을을 방어 할 수 있는 튼튼한 방어시설, 즉 성을 쌓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정조 18년(1794년)정월에 터닦기를 신호탄으로 공사를 시작해서 1796년 9월 마침내 견고한 화성(華城)이 완공되었다. 10년의 공사기간을 예측하였으나 2년 반만에 공사가 끝난 것이다. 현대 장비로도 5.4km나 되는 튼튼한 성벽을 그토록 짧은 시간에 쌓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화성

아버지의 죽음으로 삼년상을 중이던 약관의 정약용을 불러 성의 설계를 맡기고 현장책임자는 새로운 신도시 수원부를 잡음 없이 조성한 수원부사 조심태에게 맡겼다. 공사에 필요한 예산과 그밖의 정치적 현안들은 우의정 채재공으로 하여 해결하도록 하였다.

정약용

공사기간 중 동원된 인원이 얼마나 되었을까? 대략 연인원 70만명으로 추정된다. 총공사비는 86만냥 정도였다.

그 당시 잘 지은 기왓집 한 채가 500냥이라고 할 때 1700여채의 집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공사전 재위 18년동안 국정을 살뜰히 살펴 공사를 충당할 수 있는 자금이 국고에 있었던 것이다. 공사에 동원된 인부들에게는 품삯을 지불하여 자발적으로 일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 하였을 뿐 아니라 사전에 성곽에 사용될 돌을 규격화하여 돌을 가져온 사람에게는 값을 지불하여 인부들의 수입을 늘려주었다. 그뿐인가! 정약용에게 수많은 책들을 섭렵하게 해 공사에 필요한 여러 장비들을 제작, 공사현장에 투입, 인부들이 쉽게 일을 하도록 도왔다. 이것은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정조의 애민정신의 발로이다. 인부들의 품삯은 물론 공사에 필요한 벽돌의 수치등 모든 과정이 <화성성역의궤>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화성성역의 궤

 

한선생은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하였고, 지금은 서울에서 문화해설사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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