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이 3번이나 바뀌었건만…그날의 고통은 아직도

강란희 칼럼니스트

[공감신문=강란희 칼럼니스트] “2016년 10월 9일이면 버마(현 미얀마) 아웅 산에서 북한에 의해 테러가 자행 된지 33년이 된다. 이날 대한민국의 우수한 인재들의 목숨을 앗아간 북한은 아직도 대를 이어가며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다. 따라서 이글은 지난 2014년 10월 7일 국민행복신문(www.htimes.kr)을 통해 게재한 글을 그대로 옮긴다.”

 

2014년 10월 7일 기사 전문

오는 10월 9일이면 버마 아웅 산에서 북한에 의한 폭탄 테러 만행이 저질러진지 31년이 되는 날이다.
1983년 10월 9일 오전 버마(현 미얀마)에서 비보가 날아왔다. 그날따라 한글날이라 쉬고 있는데 A씨는 친구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는다. 친구는 다급한 목소리로 TV를 빨리 보라는 것이다. A 씨가 TV를 켜는 순간 눈과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TV모니터에 비치고 있는 그림이나 지나가는 자막 그리고 다급한 사태를 보도하는 뉴스앵커의 목소리는 A 씨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하는 가족의 이름이 사망자의 명단에서 자막으로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몇 시간 전만해도 서로 이야기하던 사람이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A씨는 생각하고 싶지 않는 아련한 31년 전을 생각했다. 그는 아직도 흘릴 눈물이 있었나 싶다. 그리고는 마지막 통화내용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형님! 괜찮겠습니까? 사회주의국가라 걱정이 됩니다.” “걱정마라, 대통령과 같이 가는데 무슨 일이 있겠냐?” “다녀오마.. 갔다 와서 만나자.” 이것이 마지막 대화였다.
그리고는 다시는 그분의 목소리는 들을 수가 없었다. 아직 까지도.......

기억하고 싶지 않는 31년 전....
1983년 10월 9일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은 버마의 수도 랭군에 위치한 아웅 산 묘역에서 북한군에 의해 대통령과 정부요인을 암살할 목적으로 미리 설치된 폭탄이 터져 당시 전두환 대통령을 수행한 정부의 핵심관료와 기자 등 17명과 버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의 희생자를 낸 폭탄 테러사건이다.
이 테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무력부 정찰국에 의해서 저질러졌으며 이 폭탄테러 사건에서 대한민국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장관 김동휘 상공부장관 강인희 농수산차관 등 각료들과 수행원 등이 사망하고 다른 수행원들은 부상당했으며 사건직후 전두환 대통령은 공식 순방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급거 귀국했다.
당시의 사건 개요를 살펴보면 1983년 10월 8일 대한민국 대통령 전두환은 공식 수행원 22명과 비공식 수행원을 데리고 동남아 5개국 방문길에 오른다. 첫 방문지인 버마는 당초 예정에도 없었으나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갑자기 정해졌으며 당시 노신영 안전기획부장과 이범석 외무부장관의 반대를 무렵 쓰고 강행되었던 나라다.
10월 9일은 버마의 독립운동가 아웅 산 묘역을 참배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아웅 산 묘역은 우리나라의 국립현충원과 같은 곳이다. 이날 서석준 부총리를 비롯한 수행 각료들과 경호원들은 행사 준비 및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고. 같은 시각인 오전 10시 전두환은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출발한다.
예행연습을 끝내고 대통령을 기다리던 서석준 부총리 비롯한 수행원들은 전두환 대통령이 예정보다 30분 늦게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는다. 마침 그때 태극기를 단 검은색 벤츠 차량이 경찰의 호의를 받으며 도착했다. 바로 이계철 주 버마대사 일행 이였다.

< 1983년 10월 9일 폭탄테러직전모습>

아수아장이 된 아웅 산 묘역.....
이런 모습을 본 버마의 나팔수들이 전두환 대통령이 도착한 것으로 착각하고 진혼곡을 연주했다. 진혼곡은 대통령이 도착해야 연주될 곡이다. 그런데 갑자기 BOOM!! 하고 주위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진혼곡 소리를 들은 북한의 테러리스트들은 미리 설치해놓은 폭탄의 스위치를 누른 것이다.
이 자리에서 정부 각료 수행원 기자 등 17명이 사망한다. 그리고 대통령 전두환은 차량정체로 이해 30분 지연도착으로 목숨을 건진다. 또 테러리스트들 중 북한 신기철은 체포과정에서 사살되었고 그 외2명은 사형 또1명은 2008년 옥사했다고 전해진다.
이때 북한군이 설치한 폭탄은 모두 2발인데 그중 1발은 터지고 1발은 불발되었다. 불발된 1발은 소이탄으로 터졌을 경우 3000도 이상의 고열을 내는 살상무기로 한사람도 살아남지 못하는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 1983년 10월 9일 아수라장이 된 아웅산 묘역>

이 사건으로 희생된 순국자 명단

서석준 (경제기획원 장관 및 부총리),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서상철 (동력자원부 장관),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주 미얀마 한국 대사), 김재익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 하동선 (해외협력위원회 기획단장), 이기욱 (재무부 차관)[1], 강인희 (농림수산부 차관), 김용환 (과학기술처 차관), 심상우[2](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국회의원)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이재관 (청와대 공보비서관), 이중현 (동아일보 기자), 정태진, 한경희 (대통령 경호원).
이 테러 사건이후 버마는 북한과의 수교를 단교했고 급거 귀국한 전두환 대통령은 작전명 “늑대사냥”으로 김일성 제거하는 계획을 세워 진행하다 당시 미국대통령인 로럴드 레이건의 설득으로 계획을 북한 고립작전으로 바꾸게 되었다.

편안히 영면하소서!
현재 순국자들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제1묘역에서 영면하고 계시며 1984년 10월 9일 파주 임진각에 버마 아웅 산 순국 외교사절 위령탑을 건립했으며 순국한 17명을 상징하는 높이 17m 탑신 17계단으로 이루어져있다.
또 이 탑에는 중앙 1개의 지주에는 대통령이 쓴 탑명이 조각되어 있고 4개의 청동군상은 외교를 통한 국력신장 민족화합 조국번영 승천영생의 뜻을 나타내고 탑 정면에 마련한 ‘구원의 불꽃’대는 순국하신 분들의 명복과 영생을 빌기 위한 것이다.
지난 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미얀마(버마) 정부는 폭탄테러 때 사망했던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아웅 산 국립묘지에 추모비를 건립하고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추모비는 테러가 발생했던 아웅 산 국립묘지의 북문 입구 경비동 부지에 가로 9m, 높이 1.5m, 두께 1m의 벽 모양으로 세워졌으며, 추모비에는 순국사절 17명의 이름과 직책 명기되어 있다.

< 임진각 추모탑>

남은 가족들은?
이때 차출되어 대통령을 수행한 각료들은 모두 청렴을 생명으로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순국 하신 분들의 가족들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다. 그 당시 모두 자식들은 어리고 미망인이 갑자기 가족의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다.
국가에서 특별히 일할 수 있는 곳도 알선해 주고는 하였으나 갑자기 사회에 적응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고 부모를 잃고 형제를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는 시간들 이었다. 우울증으로 괴로워했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북한의 만행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강산이 3번이나 바뀌어도 보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한결 같을 것이다. 미얀마 아웅 산 제막식에 동행한 보도에 따르면 유족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다.
유족들은 “유족들의 아픔을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세월이 지났으니 좀 괜찮겠지 하였으나 오히려 더 생생하다.” “일반 사람들은 잊었지만 우리는 잊을 수가 없다” “순국 하신 고인들은 특정 정권이나 개인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니라 국가를 위해 일한사람들이다.” “이제 용서는 하되 잊지는 앓을 것이다.” “한국 경제 성장에는 고인들과 같은 산업화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후세가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아버지께서는 갓 태어난 손자를 무척아 좋아 하셨는데.....” 등 생전의 고인들을 회상했다.
유족들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진 지 올해가 31년째 임에도 흐르는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언제 어느 때고 문득 문득 스치는 바람결이나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그때 그 감정이 그대로 있어 그리워하는 마음은 누가 대신하고 이해할 수 있을까? 그리고 바란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바라고 또 바란다.

< 2014년 6월 6일 아웅산 묘역에 건립된 추모비>

순국한 관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나?
이때 대통령을 수행한 사람들은 특급 인재로 분류된 정부의 핵심 참모들 이었다. 돌이켜보면 이때 대통령을 수행한 경제 관료들은 새 시대에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인재들로 구성된 드림팀이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를 책임지던 주요 인사들을 한꺼번에 잃는 바람에 이후 한국경제가 기울었다고 말한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때 이분들이 순국하지 않았으면 아마 우리나라의 IMF는 없었을 것이라고…….
대한민국은 자랑스러운  임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 임진각 추모탑에 새겨진 추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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