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보고 ‘더 멀리’ 가는 것보다 주제와 내실 있는 여행으로

[공감신문=조병수 프리랜서] 영국여행을 준비한다고 이런저런 자료들을 뒤적이다가 보니, 정말 몇 년을 그 나라에서 살았어도 제대로 몰랐던 것이 너무나 많고, 또 가까운 곳에 있는 것도 미쳐 살펴보지 못한 곳들이 너무 많았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AA(The Automobile Association: 회원제 자동차여행안내·고장수리보험회사)’에서 나온 지도와 숙소안내책자와 동료들의 경험담들에 의존해서 이리저리 다닌 처지라,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와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요즘에야 우리나라에서도 각종 보험회사별로 긴급견인이니 고장수리지원 서비스를 하고 있지만, 삼십 년 전 영국에서 경험한 회원제 자동차여행안내 및 고장수리지원 전문회사의 존재자체가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투숙할 방하나 구하려고 해도 그 회사의 숙소소개 책자에 나온 위치정보만 보고 전화로 예약하거나 아니면 길가다가 ‘공실 있음(vacancy)’이라는 팻말을 보고 찾아 들던 시절이었다. 주변 관심지역에 관한 자료도 그 책자에 수록된 장소나 동료들의 경험담이 전부였다. 물론 제대로 챙기는 노력이 부족했고 과문(寡聞)한 탓도 있었겠지만, 그저 그렇게 유명하다고 소문난 곳만 훑어보기에도 여력이 없었음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런던 남서부의 주택가에서 살면서 수시로 히드로 공항이나 윈저성(城) 주변을 돌아다녔지만, 그 중간쯤에 있는 럭비경기장에 대해서 듣거나 가본 적이 없다. 1907년에 지어졌고, 런던 풋볼 유니온의 사무국이 여기에 있으며, 8만2천명을 수용하는 잉글랜드 럭비 대표팀의 홈 구장인 트위커넘 스타디움(Twickenham Stadium)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었다.

이번 여행 때, 런던시내 관광을 위해서 호텔을 물색하다가 비교적 값이 비싸지 않고, 전에 살던 집이나 런던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서, 리치몬드 파크 인근의 메리어트호텔에서 3일간을 묵기로 했다. 트위커넘 스타디움에 부설된 호텔이라서 ‘환경이 좋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고 은근히 걱정하였었는데, 조용한 주택가와 어울린 주변환경, 그리고 아담하고 깔끔한 호텔내부시설들을 보는 순간 그런 염려는 사라졌다.

럭비가 영국에서 기원하였다고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1823년 잉글랜드의 오래된 유명 사립학교(independent school)인 Rugby School의 학생인 웹 엘리스(William Webb Ellis)라는 학생이 당시 풋볼규칙을 무시한 채 공을 안고 달린 것이 기원이라는, 그 럭비의 홈 구장에서 잠을 자게 될 줄이야 어떻게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이리저리 적당한 곳을 고르다가 우연히 찾아 든 곳이 그렇게 의미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어느 강좌에서, “19세기 아동문학 장르 중 대표적 학교소설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휴즈(Thomas Huges)의 ’톰 브라운의 학창시절(Tom Brown’s Schooldays;1857년 발표)’이란 작품이, 퍼블릭 스쿨의 개혁을 주도한 토마스 아놀드(Thomas Arnold) 럭비학교(Rugby School) 교장을 모델로 하여 기독교 신사라는 이상, 조직의 가치와 남성다움, 스포츠맨정신을 강조했다”는 내용을 접한 적이 있다.

그 트위커넘 스타디움 앞쪽 도로변에 럭비경기모습을 담은 조형물이 세워져 있는데, 그 바닥에 둥그렇게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단체정신(team work), 존중(respect), 즐김(entertainment), 스포츠맨정신(sportsmanship)”

 

이런 막연한 토막지식들이 체계적으로 연결되지 못하는 바람에, 런던을 떠난 다음 일정으로 워릭셔(Warwickshire)주의 럭비에 있다는 그 럭비학교로부터 30마일정도 떨어진 호텔에서 이틀씩이나 머무르면서도, 그 학교를 둘러보지 못하고 온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멀리, 더 많이’ 같은 외형주의 여행의 어설픔은 전에 런던에서 근무할 때부터 쭉 있어왔다. 그때 한국에서 출장자나 파견연수생들이 올 경우, 런던근교에 있고, 오가는 길가 풍경이 아름다우며, 주말에 당일치기로 다녀올 수 있다는 이유로 자주 안내하던 코스가 있었다.

아침 일찍 런던을 출발해서 옥스포드대학교와 처칠수상의 생가(生家)라는 블렌하임궁전(Blenheim Palace)을 살펴보고, 대 문호 세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Stratford-upon-Avon), 그리고 1058년 정복자 윌리엄(William The Conqueror)이 요새를 쌓은 후 성의 윤곽을 갖추어오면서 영국사람들이 사랑하는 최고의 성(城)으로 손꼽히는 워릭캐슬(Warwick Castle)을 돌아오는, 조금은 빡빡한 일정의 코스였다. 5~6월이면 오가는 고속도로 옆으로 노란 유채꽃이 만발해 있는 풍경을 즐길 수 있고, 가을철에는 단풍이 아름답고 역사와 문학, 자연의 풍광이 어우러진 아주 멋진 관광루트였다.

여러 해에 걸쳐서 자주 그 길들을 따라 다녔지만 늘 방문객들을 위한 명소(名所)탐방에만 주력했을 뿐, 그 옆길로 접어들어서 아름다운 꽃들과 초원을 느긋하게 완상(玩賞)할 여유를 가진 적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과감하게 일부 명소들은 포기하고 옥스포드와 블렌하임궁전을 거쳐서, 그 서쪽 자락에서 웨일즈 경계선까지에 펼쳐져 있는 코츠월드 지역의 시골길을 제대로 살펴보려고 계획을 세웠다.

잉글랜드 중부의 스트랫퍼드-어폰-에이번 남서쪽에서 남쪽으로 바쓰(Bath)부근까지, 대략 폭 40Km, 길이 145Km 규모의 구릉지대로 도쿄만한 크기라고 하는 코츠월드(Cotswolds)지역을 가로지르는 시골길로 들어서는 순간, ‘이런 세상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산하(山河)였다. 펼쳐지는 풍경에 탄성이 절로 쏟아져 나왔다.

양떼들의 우리(Cots)와 언덕을 뜻하는 옛날 영어 Wold가 합해진 말이라는 이 지역의 Cotswold 양(羊)들은 털이 길어서, 여기서 생산된 양모(羊毛)는 중세 유럽전역에 그 이름을 날렸고, 대륙과의 교역으로 이 지역이 번창했었다고 한다.

‘완만한 산비탈 울타리 안에 있는 양’이란 말 그대로, 유채꽃 만발한 저 푸른 초원에 구름같이 푸근한 털로 휘감긴 양떼들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며 달리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다만, 왕복 2차선의 구불구불하고 제법 경사가 있는 길이라 차를 세울 만한 곳을 찾지 못하고, 또 운전하느라고 돌담이나 꽃나무 울타리로 가려진 그 아름다운 풍광을 때때로 충분히 완상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쉬웠을 뿐, 너무나도 감동적인 경관이었다.

 

그리고 코츠월드지역에 산재해 있는 동화 같은 마을들도 둘러 보았다. 1380년에 수도원의 양모(羊毛)저장소로 지어져서 17세기에 방직공들의 오두막으로 쓰였다는 알링톤 로우(Arlington Row cottages)가 있고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로 꼽힌다는 바이버리(Bibury), 영국의 베니스라고 불란다는 버튼-온-더 워터(Burton-on-the-Water), 중세 장터마을이었다는 스토-온-더-월드(Stow-on-the-Wold), 그리고 아름다운 집들과 시내중심가(High Street)가 길다는 브로드웨이(Broadway) 같은 마을들을 들리느라고, 늦게 해가 지는 영국의 초여름임에도, 하루가 너무 짧아 아쉬울 정도였다.

예나 지금이나 길을 나서면 욕심이 앞선다. 그래서 또 건성건성 건너 뛰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음을 발견하고는 혼자서 실소(失笑)하기도 했다. 그렇게 유채꽃과 양떼가 어우러진 푸른 초원과 구릉들 사잇길을 누비면서, ‘전에는 왜 바로 곁에 있는 이런 길들을 버려두고 고속도로만 쫓아다녔는지’ 안타까워진다. 그저 많이, 그저 멀리 가보려는 욕심과 미숙함 탓이었을 게다.

그래도 살아가면서 또 이렇게 새로운 것을 보고, 깨우치고, 배울 수 있음이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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