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밑그림이 그려져 있을 수 있다…색깔을 입히는 건 본인 같다”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지해수 칼럼니스트] 얼마 전 영화 <죽여주는 여자>를 보았다. 영화는 단순히 노인 성매매뿐 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노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그 영화를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였다는 댓글을 달았다. 나는 그 댓글이 너무 슬펐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삶의 마지막’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채, 당장 내일, 당장 1년, 당장 10년만 바라보고 사는 느낌이라 그러했다.

 

현대인들은 정말 열심히 산다. 그리고 또 열심히 놀려고 한다. 휴가가 생기면 그 잠시 동안의 휴식을 만끽하며 보상 받기 위하여 계획을 세운다. 심지어 그 와중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주말에는 파티에 가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진짜 스트레스를 풀어준다면 다행인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소진시켜가며 논다. 노는 것도 일이다. 다들 정말 열심히 놀고, 정말 열심히 일한다. 대충 대충이 절대 없다. 나는 좀 무계획으로 여행을 떠나서 찾는 편인데, 어떤 사람들은 타이트한 스케줄로 움직이더라. 개인적으로 그건 요즘 말하는 ‘힐링’하고는 좀 거리가 있지 않나, 싶다.

 

우린 당장 내일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거의 안하고 산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죽음을 금기시하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에는 섹스를 금기시하고 죽음을 ‘내 옆’에 두었다. 그래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이 계신 곳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다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 백 개의 광고와 마주한다. 우리는 소비하여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돌아간다. 소비한다는 것은 대부분 내 것으로 소유한다는 것인데, 그것들은 거의 저승에서 쓸데가 없다. 내일 죽는다고 해도 당장 보석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

(영화 <그레이트 뷰티> 중에서)

<죽여주는 여자>에서 극중 소영(윤여정 분)은 정말로 죽여준다. ‘나 좀 보내줘’라는 부탁을 받으면 정말 저 세상으로 보내준다. (이 정도는 예고편에 나오니 스포일러라 욕하지 마시길.) 현대의 노인들은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군가에겐 정말 비참한 삶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정말 옛말일 거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수명은 점점 늘어가지만 노인 빈곤 문제는 정말 심각한 수준이다. 예전에 패스트푸드점이나 편의점에 가면 10대 또래 친구들이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노인 분들이 그 자리를 메우시는 경우가 많다.

“아, 아저씨 그냥 아메리카노 말고 아이스라고 했잖아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스파이스, 디럭스, 아메리카노, 슈퍼 쉬림프, 유러피안 스모크, 핫 크리스피.... 노인 분들에겐 너무도 생소한 단어들일 것이다. 그러나 패스트푸드점은 말 그대로 빨라야한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도 바쁘다. 노인들은 느리고 어설프고 굼뜬 모양새일 수밖에. 그러니 화를 낸다. 노인들은 정신이 없다. 재차 물어보면 짜증이 날아온다.

일제의 탄압을 견뎌내고, 한국 전쟁을 치러냈으며, 전쟁 기근에도 꿋꿋하였다. 열심히 새마을 운동을 하며 허리띠를 졸라맸고, 그 와중에도 운동권 학생들을 몰래 숨겨주며 밥을 챙겨주던 이 사회의 노인들. 그들에 대한 공경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다. 다들 진짜 빨리 까먹는다. 누가 치매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영화 <그레이트 뷰티> 중에서)

난 내 노후에 대하여 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우선 당장 내일 한 치 앞을 모르는 게 인생이라 생각했다. 대신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내 옆에 두려고 노력했다. 하루하루 후회 없이 살자고. 알베르 카뮈가 한 유명한 말처럼, ‘자살을 할까 커피를 한잔 할까’정도는 아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저 영화를 보자니, (아니 사실은 나이가 먹을수록 시간이 빨라지는 걸 느끼니) 죽음말고, 그 전의 내 노후는 어떠할까 머릿속에 그려보기 시작했다.

 

작가라는 직업의 좋은 점은 평생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의 고용주는 본인 자신이기 때문이다. 누가 보던 말던 나 스스로 작가야, 라며 집필 활동을 하면 작가인 것이다. 근데 그 때도 내 글을 돈을 주고 사서 봐주는 사람이 있을까? 엄청 꼰대가 돼서 아무도 내 얘길 듣기 싫어하면 어쩌지? 아니 그 때도 사람들이 글을 읽는 것에 관심이 있을까? 나는 노인이 되었을 때 추울 때 더운데서 일하고, 더울 때 시원한 곳에서 일할 수 있을까? 갑자기 엄청 인생이 고꾸라져서 길바닥에 내몰려 가진 거라고 하나 뿐인 몸뚱아리를 팔게 되진 않을까?

나는 아예 독신주의까지는 아니지만 결혼을 안 해도 괜찮다는 주의였는데, 저 영화를 보자니 갑자기 나를 보호해줄 보호자가 필요하겠다는 계산적인 생각이 들었다. 덧붙여 ‘당신 참 열심히 살았어.’라며 서로의 인생에 있어서 인정해주고 격려를 보내줄만한 동반자가 생기는 것도 되게 괜찮은 것 같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이미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이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가’ 이 말은 즉, ‘어떻게 늙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다가 죽을 것인가’로 이어진다. 요즘 대기업에서는 사원을 뽑을 때 인문학적 소양을 많이 본다고 한다. 이제는 가전이든, 자동차든, 뭐든 실용적 측면보다도, 이로 인하여 내 삶이 어떻게 변하는 지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 나에게 그 대표적인 아이템은 아이폰과 맥, ‘애플(apple)’이었다. 사실 애플이 광고한 것은 기술적인 측면보다도 이 물건을 쓰면 네 삶은 이렇게 변할 것이야, 라는 면이 더 강했던 것 같다. 난 거기에 혹했다. 잘은 모르지만 현대카드 역시 그런 것 같다. 카드 혜택 이런 것보다 현대카드를 쓰면 왠지 문화적인 소양이 드높아질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현대카드 컬쳐 공연들 뿐만 아니라, 이태원을 지나며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를 볼 때마다 그런 느낌을 받는다. 아무튼 요즘은 이렇게 단순히 물건만 파는 게 아니라, 소비자들에게 ‘삶의 모습’을 파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것들을 잘 팔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인재들을 찾는 게 아닐까? 이력서 한번 안 써본 짧디 짧은 나의 생각으론 그러하다.

 

내가 매주 칼럼에 현대인들은 이렇게 살고, 자본주의에 갇혀서, 돈의 노예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사실 다 개소리다. 사실 맘만 먹으면 제 멋대로 살 수 있는 시대다. 히피처럼 살고 싶으면 히피처럼, 원시인처럼 살고 싶으면 원시인처럼, 해커처럼 살고 싶으면 해커, 골드디거처럼 살고 싶으면 골드디거, 집에서 게임만 하다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면 된다. 사실 남 피해 안 주고 신경 안 쓰면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는 시대다. 그러니 오히려 조심해야 한다. 어떻게든 고를 수 있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더욱 철학과 가까이, 죽음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살다 죽을지 매 순간 고민해야 한다. 예전에 내 신분이 노예였으면 노예처럼 밖에 살지 못하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사실 현대처럼 철학이 필요한 시대는 없었던 것 같다. 근데 너무도 철학을 안 한다. 대단한 게 아닌데. (난 연예인 중에 유병재랑 사유리도 좀 철학인 것 같다.)

 

게다가 시간은 또 얼마나 빠른가! 이러다 정말 훅 간다니까? 나도 예전에 어느 노래 가사랑 똑같은 생각을 어릴 때 한 적이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오래 있으면 안 돼! 시간이 정말 빨 리가. 이러다가 정말 할머니가 되어버리겠네!’ 그러나 난 지루한 1시간 보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1분을 살자고 선택했었다. 매번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매 순간 고민하여야 한다.

 

‘네가 아는 것은 단지, 네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다’라고 칸트가 말했었나, 엄청 시니컬한 누군가가 말했었는데.... 아무튼 난 정말 아는 게 없다. 다들 나보고 작가니까 똑똑하겠지 라고 하는데 정말 나 같은 바보가 없다. 알 이유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현대 사회에 수많은 정보가 그렇게 많은데 대부분은 솔직히 쓸데없고, 어떤 것은 음모론이고, 어떤 것은 진짜 말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 것들을 아느라고 시간을 허비할 바에야 카뮈가 ‘자살을 할까 커피를 한잔 마실까’ 생각하듯, 오늘 누구를 만나서 무슨 저녁을 먹고 무슨 음악을 듣고 무슨 얘기를 할까 고민하는 게 훨씬 값진 것 같다. 그 이야기 거리를 만들기 위하여 쓸데없는 정보 거리를 습득하는 것은 무조건 찬성이지만!

 

이 칼럼도 그냥 당신들이 누군가를 만나서 소중한 시간을 보낼 때, 이야기 화제로 꺼낼 수 있는 심심풀이 술안주 오징어 땅콩이었으면 좋겠다. 그럼 정말 오히려 이 글의 탄생이 값지고 영광스러울지도.

<에곤쉴레와 클림트의 그림들>

삶에는 어쩌면 밑그림이 그려져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색깔을 입히는 것은 본인 스스로 인 것 같다. 우리가 잘 아는 화가 에곤 쉴레 역시 클림트의 제자였다. 그러나 두 화가 그림의 분위기가 확 다른 것은 역시 색감 차이일 것이다. Color your life! 엄청 이상한 색이라도 괜찮다. 죽음의 사자는 늘 가까이에 있으니까. 글은 다 썼고.... 저녁 일정 전까지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커피를 한잔 마시고, ‘난 왜 귀여울까’에 대해 생각하며 운동 겸 산책을 나가봐야겠다. 지구별 소풍하러! 오늘 내 오후는 아마도 오렌지색일 것이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