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사부 함대 제작지 여건

가. 이사부장군은 어디로 왔는가?

필자는 ‘삼척군지’를 통하여 이사부 장군이 제일 처음 이곳 실직에 올 때는 ‘수륙군(水陸軍)을 동원하여 오십천 하구로 상륙하였다.’ 라고 알고 있었는데, 최근에 항로탐사를 하고 여러 문헌을 살펴 본 결과 해로가 아닌 육로로 왔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첫째, 당시 신라의 수군은 위험한 해로를 이용하여 적을 공격할만한 능력이 안 되었다, 소지마립간 10년(468)에 전함을 수리하였으나, 수군의 활약상이 삼국사기에 전혀 안 보이고, 소지마립간 22년(500) 3월에는 왜병들에게 장봉진이 함락되었다.

둘째, 이사부 장군이 503년-504년경 신라의 선봉장이 되어 북진을 하면서 실직성을 탈환한 이후 504년 11월에 수복지구에 12개성을 쌓았고, 505년 2월에 실직군주로 임명되었다.

셋째, 이사부 장군이 실직에 있던 기간이 6-7년 정도로 우산국정벌을 위하여 전선과 목우사자를 제작하는데 기간이 오래 걸렸다. 수군이 있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실직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넷째, 동해안로는 울진·삼척 부근은 해발300-400m 정도이나 대체로 평탄하여 이동하기 쉽고 소지마립간 9년(487)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다.

이상 몇 가지 사항으로 보아 위험한 해로 보다는 안전한 육로를 이용하여 적을 완전히 섬멸한 다음 12성을 쌓고 우산국 정벌 계획을 준비하였다고 본다.

 

▲ <도2-9> 삼척진영도(1872년 서울대 규장각)

 

나. 이사부 함대 출항지 정라진의 모습

이사부 함대를 제작하여 출항시키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고려사항이 있다. 안전한 항구, 제작 장소, 보안, 기술자 및 인력수급, 선박 재료 및 이동수단, 배후지 여건 등이다.

오십천은 태백산맥 동쪽 경사면의 강수량과 태백산맥의 서쪽에서 흐르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석회암지대를 관통하여 동쪽으로 흐른다. 이 강물은 신기에서 합수되어 흐르데 연중 마르지 않고 비교적 고르게 흐른다.

오십천 하류의 남쪽으로는 고성산, 북쪽으로는 광진산에 막혀 동쪽으로 흘러 정라진에서 삼각주를 이루고 양쪽으로 흐른다. 여름철의 폭우, 봄철의 눈 녹은 물 등 수량이 많으면 고성산 아래 물길로 흐르나 시간이 지나면 파도로 인하여 고성산 수로는 얕아지거나 막혀서 정라진의 육향산(죽곶도) 쪽으로 흐른다. 오십천은 육향산에서 부딪히어 소(자라바위)를 이루는데 여기서부터 바닷물이 합수되어 수심이 깊어져서 항구를 이룬다.

 

다음은 삼척포진 영장 겸 토포사였던 홍지호(洪志浩, 1781.12-1783.6)의 삼척포진성의 진동루 관련 글이다.

 

이 루는 처음 현종 임자년(1672년)에 세워졌고 영조 계해년(1743년)에 중수했으니 그때부터 지금까지 112년이 되었다. 아! 누각을 고치는 까닭은 관문을 견고하게 하고 창문을 엄중하게 하고자하기 때문이니 어찌 놀고 즐기기 위해서 이겠는가. 높은 관문으로부터 동북쪽으로 오가는 사람들이 큰길을 통하지 않으면 선박들이 정박된 바닷가로 가야하니, (초병들이) 누각 아래를 철저히 지키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바다 지키는 임무가 막중한 것이다. /이효웅 해양전문가

 

▲ <도2-10> 삼척포진성(1872년 서울대 규장각)

 

삼척포진성의 진영은 1898년 폐지되고, 정라진은 1920년대 정라항 개발로 삼척포진성의 성벽이 허물어지면서부터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오십천 하류는 삼척 제일의 갑자평야로 1930년대 일본인들에 의하여 정어리유 가공공장인 삼정유지공장이 건설되면서부터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삼척화력발전소가 건설되었고, 1990년대 항만매립공사로 오십천 수로의 옛 모습은 사라졌다.

이와 같이 정라진이 변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십천 하류의 안전한 항구와 갑자평야 및 삼각주인 건너불, 연중 흐르는 오십천 등으로 삼척은 1970년대 30만 군민으로 공도삼척의 일번지였다.

삼척의 오십천 주변은 두타산, 근산, 미로, 활기 등에서 예로부터 황장목 등 좋은 나무들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겨울철에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봄철에 눈 녹은 물이나 폭우 시에 오십천의 강물을 이용하여 하류로 옮기기 쉬운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사부함대의 정확한 출항지는 고성산(오화리산성) 아래의 오분항이 아니고 정라항이다. 일부 학자들은 오늘날의 오분항을 옛날의 오분진과 혼동하는데, 오분진은 고성산(오화리산성) 남동쪽의 작은 어촌 마을로 오늘날 선창이라는 지명이 남아있고, <도2-10> 삼척포진성 지도에도 고성산 넘어 자진오리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 <도2-11> 육향산에서 본 정라항(1928년 김진원 소장)

 

 

▲ <도2-12> 나룻골에서 본 정라항(1930년 김진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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