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위, 현대상선 계열제외 요청 승인…29년만에 대기업집단서 제외

[공감신문 김송현 기자] 한때 한국 재벌서열 1위였고, 세계 50대 기업(미국기업 제외)에 올랐던 현대그룹이 창업 59년만에 재벌대열에서 탈락했다. 창업보다 어려운 것이 수성이라고 했다. 고 정주영 회장이 창업한 현대그룹은 계열사들이 갈라지고(계열분리), 매각되고,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적인 재벌그룹(대기업집단)에서 제외됐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일 현대상선의 현대 계열사 제외 요청을 승인했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현대 측의 감자로 현대상선의 동일인(총수) 관련자 지분이 23.1%에서 1%로 줄어들었고 채권단이 출자전환을 통해 최대지분(39.9%) 확보한 점 등을 들어 현대가 현대상선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계열사 21개, 자산총액 12조8,000억원이었던 현대는 12개 계열사, 자산총액 2조5,643억원 수준의 기업집단으로 위축돼 상호출자제한을 받지 않게 됐다.

현대의 대기업집단 지정 제외는 1987년 자산 규모 1위로 지정된 이후 29년 만이다.

공정위는 매년 4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을 지정해 공개하지만 현대처럼 자산규모가 7조원 미만으로 급격하게 감소할 경우 중간에 지정을 제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현대그룹은 현대증권을 KB국민지주에 매각한데 이어 현대상선의 경영권도 잃었다. 남은 것은 현대엘리베이터를 비롯해 현대글로벌, 현대아산, 현대유엔아이, 현데엘앤알, 에이블현대호텔앤리조트, 현대투자네트워크, 현대경제연구소등 10개 정도다. 남은 계열사의 총매출을 합치면 2조원대에 불과해 현대그룹은 중견그룹으로 위축됐다.

현대상선 /연합뉴스

1947년 고 정주영 회장이 현대건설의 전신인 현대토건을 설립하면서 현대그룹은 한국 경제의 성장과 궤를 함께 했다. 정주영 회장은 1950년 1월 현대자동차공업과 현대토건을 합병해 현대건설로 명칭을 변경했다. 현대건설은 6.25가 끝난뒤 1한강교, 한강 인도교, 인천항 등의 복구공사를 비롯해 전후 복구사업에 진출하면서 그룹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정주영 회장은 1967년 12월 현대자동차를 설립한데 이어 1973년 현대중공업, 1977년 현대증권, 1983년 현대전자(하이닉스 반도체의 전신), 1984년 현대엘리베이터를 각각 세우며 삼성그룹과 경쟁하는 국내 1위의 재벌 기업을 형성했다.

현대그룹의 비극은 1992년 창업자 정주영 명예회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통일국민당을 창당하면서 시작됐다. 정 명예회장은 그해 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득표율 16.3%로 낙선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는 현대그룹 계열사들에 대한 세무조사를 벌이고, 현대건설에 정부발주물량을 제한했다. 정 명예회장은 1993년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를 발표했지만, 현대그룹은 정권의 눈밖에 났다.

현대그룹은 1998년 기아자동차를 인수했다. 그해 정주영은 통일소 1,001마리를 싣고 북한을 방문했고, 이어 현대아산을 세워 금강산관광, 개성공단사업 등 남북 경제협력 사업을 전담했다.

하지만 2000년 3월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두고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이를 계기로 정몽구 회장이 현대자동차 등 10개사를 이끌고 현대그룹에서 떨어져 나갔고, 현대그룹 경영권은 5남 정몽헌 회장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이후 현대중공업, 현대백화점이 잇따라 그룹에서 분리되고, 하이닉스·현대건설은 경영난으로 채권단에 넘어가면서 현대그룹은 규모가 크게 축소됐다.

2003년 8월 정몽헌 회장이 목숨을 끊었다. 그룹 경영권은 부인인 현정은 회장이 맡았다. 그뒤 현정은 회장은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동생인 정상영 KCC 명예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겪으면서 현대종합상사가 그룹에서 분리됐다. 2006년 현대그룹이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의 우호지분 40%를 확보하면서 분쟁을 종식시켰다.

2011년 채권단이 현대건설을 매각하자, 현대그룹은 인수전에 뛰어들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지만, 곧이어 자금 조달 능력 문제가 불거져 우선협상자 자격을 박탈당했다. 현대건설은 현대자동차그룹에 넘어갔다.

현정은 회장은 극심한 자금난에 시달리는 현대상선을 살리기 위해 지난 3월 현대증권을 KB금융지주에 매각했지만, 현대상선을 끝내 회생시키지 못해 채권단에 경영권을 넘기고 말았다.

1976년 '20세기 대역사'로 평가했던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 현장의 고 정주영 회장. /연합뉴스

현대상선과 현대증권이 떨어져 나가면 현대그룹에 남는 계열사는 지주회사인 현대엘리베이터를 비롯해 10개 정도로 지난해말 21개에서 절반 가까이 줄어들게 된다. 주력 회사들이 줄줄이 떨어져 나가지만 남은 회사는 알짜라는 분석이다. 현대엘리베이터는 올 1분기에 364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렸고, 반얀트리 호텔도 성장성이 있다는 평가다.

현대그룹은 지난 4월 공정거래위원회가 발표한 대기업집단에서 자산총액 12조3,000억원으로 30위에 올라있다. 대기업집단으로 지정되면 공정거래법상 상호출자, 신규 순환출자, 채무보증이 금지된다. 하지만 한때 국내 1위 재벌기업이 대기업집단에서 제외될 경우 서운함은 클 것이다.

현대그룹 상징성 또는 정통성에도 논란이 될 가능성이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규정한 대기업집단에 현대자동차가 2위, 현대중공업 12위, 현대백화점 29위, KCC 39위, 현대산업개발 56위등 현대가가 줄줄이 랭크되고 있는데, 재벌 서열에서 끼지도 못하는 그룹이 창업자 정주영의 정통성을 잇는다고 하기 어렵게 된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토건을 설립한지 59년만에 그의 적장자 그룹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중견그룹으로 새출발 선상에 서게 됐다.

지난 6월 16일 서울 대한상공회의서에서 열린 한 행사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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