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아메리카나는 로마제국보다는 선조인 대영제국의 뒤를 이어

[공감신문 김인영 기자] 팍스아메리카나(Pax Americana)는 두단계를 걸쳐 전개된다. 그 분기점이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다.

첫째 시기는 두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며 영국이 쇠약해지고, 미국이 서방세계에 제1의 강국으로 부상해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동구권과 대치하는 기간이다. 1917년 소련은 볼셰비키 혁명으로 세계최초의 공산국가를 형성한다. 서유럽이 두차례의 대전을 걸치는 사이에 소련은 사회주의 실험을 거치고, 2차 대전후 유럽이 약화된 틈을 타서 동유럽과 중국, 북한, 베트남으로 세력을 확대해갔다. 서방세계의 강자 미국은 공산주의 강자 소련과 세계 분할을 위해 치열할 각축전을 펼치는데 그것이 이른바 동서 냉전이다.

두번째 시기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공산권이 와해되고, 미국이 이른바 세계 유일의 수퍼파워로 등장하는 기간이다. 20세기 마지막 10년동안 향유한 미국의 절대적 우위는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그 초입에 당한 9·11 테러로 인해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990년대 10년간의 미국은 ‘부드러운 수퍼파워’라면, 테러 이후의 미국은 ‘성난 수퍼파워’, 또는 ‘강경한 수퍼파워’라고 규정할수 있다.

미국 워싱턴 DC의 펜타곤 건물.

미국은 2000년을 전후로 전세계 600여개 기지에 20만 가까운 미국을 주둔시켰다. 주요 병력 배치를 보면, 유럽에 10만명, 중동지역에 2만5,000명, 한국에 3만7,000명, 일본에 2만명등이다. 대영제국이 전성기인 19세기말에 55개 대대, 4만명의 군대로 ‘태양이 지지 않는 제국’을 유지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군사력을 배치하고, 군비를 지출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 지배는 2,000년 전의 로마 제국보다는 200년 전의 대영제국의 유산을 많이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대영제국은 미국인들의 조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미국의 제국주의 속성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보다는 대영 제국의 그것을 비교할 필요가 있다.

영국에 의한 세계 평화, 즉 팍스 브리태니카(Pax Britannica)는 18세기부터 20세기초까지 200년을 지속했다.

대영 제국이 대규모 전함대를 구축, 5대양 6대주의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경제적 이유다. 레닌의 이론에 의하면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형태다. 레닌은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의 통계를 통해 제국주의가 독점자본과 금융자본의 결과물임을 입증했다. 공산주의 세계가 와해된 지금, 레닌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지만, 그의 이론 자체는 당시 유럽 제국주의를 설명하는데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대영 제국은 프랑스나 독일, 오스트리아 제국보다 앞서 산업혁명에 성공했고, 산업 자본이 독점화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를 강화했다. 자본주의 실험에 성공한 영국은 무역 자유주의, 해양 자유주의를 주창한다. 전세계 바다를 장악한 영국은 무역을 통해 값싼 원료와 자원을 들여와 본국의 공산품을 해외에 팔았다. 영국의 로이드 보험은 영국 상선대와 무역을 뒷바침하는 당대 최대의 금융회사였고, 런던의 금융가(the City of London)는 오늘날 뉴욕 월가처럼 세계 금융의 중심지였다. 로이터 통신은 전세계 교역 자료와 각국간 환율 변동, 금값 동향, 항해 일지를 영어로 서비스했고, 로이터의 정보가 곧 세계 뉴스였다. 런던 금융시장에선 전세계의 석탄, 선박, 보험, 금화가 거래됐고, 영국은 전세계 무역 거래의 선두주자이자 최후의 보루였다. 영국은 미국이 독립한 후에도 미국 서부철도 건설, 아프리카의 금 채굴, 아르헨티나의 팜파 초원 개척에 막대한 자본을 투자했다.

오늘날 말하는 ‘세계화’ 또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은 해양 제국 영국이 이룩한 것이다.

로마 제국은 피점령지에서 각종 재화와 사람을 획득하는 ‘착취적 노예제’ 국가였다. 로마는 교역을 위해 군사력을 동원한 적이 없다.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점령한 후 그 곳을 불태워버린 것은 그들이 원한 것이 노예였지, 농경지나 상거래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영 제국은 중상주의 국가였다. 영국이 원한 것은 교역 상대였고, 이를 위해 때론 무력을 동원하고, 상선대 보호를 위해 전세계 행해 요지에 등대를 설치하고, 갑곳과 대양 거점에 군대를 파견했다.

대영 제국은 아주 효율적인 제국주의를 유지했다. 영국군은 가장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1차 세계 대전과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1899~1902년) 때에도 15만명을 넘지 않았고, 그것도 해외주둔 군대가 4만명에 불과했다. 지금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병력만큼으로 영국은 세계를 지배한 것이다. 그 비결은 점령과 지배를 최소화한다는 것이다. 영국은 상선대 보호를 위해 지브롤터, 몰타, 수에즈, 포클랜드, 키프러스, 싱가포르, 홍콩, 케이프타운등 전세계 대양에 점점이 작은 영국 해군 주둔지를 조성했지만,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은 가급적 피했다. 점령과 지배는 엄청난 군사력과 비용이 필요하고, 로마가 망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다.

영국의 제국주의화 시기에 대해 학자들에 따라 논란의 소지는 있지만, 대체로 영국군이 미국 독립군에 의해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에서 물러나던 1781년 이후부터라는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이전까지 영국은 세계를 지배하기보다는 유럽의 여러 제국과 각축전을 벌어던 단계였고, 불행하지만 미국을 잃고난후부터 영국은 본격적인 제국주의 길을 갔다. 이전까지 영국은 동인도 회사, 허드슨만 회사 등 식민 회사를 통해 해외 식민사업에 주력했고, 영국의 하류층을 형성했던 종교적 이단자, 부랑자, 빈민이 이주해간 해외 거주지역을 물리적으로 통치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럴 힘도 없었다.

미국 동부 13개주를 잃고부터 영국은 본격적으로 ‘영국해군(Royal Navy)’을 강화했다. 대영 제국은 해외 영국 상선대, 자본이 가차없이 막강한 해군을 동원했다. 그리스에서 영국 상인 소유 창고가 불탔을 때 영국 해군은 그리스 항구를 가차없이 포격하고, 그리스 정부로부터 사과와 대가를 받아냈다. 로마인이 제국내에서 자유인이듯, 영국인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자유인이었고, 그것을 전세계에 깔려있는 영국 함대가 뒷바침해주었다.

또 1876년 이집트가 영국과 프랑스의 빚을 갚지 않자 군대를 보내 채무이행 조약을 체결하고, 수에즈 운하 건설 및 운영권을 획득했다.

대영제국의 세계지배는 가급적 점령과 지배를 피하고, 현지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선호했다. 영국은 이집트 왕조와 내각, 군대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이집트 왕정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내륙에 뚜렷한 정부가 없는 곳에는 총독을 보내 직접 통치했다.

영국이 전쟁을 일으켜 직접 통치한 곳은 남아프리카와 인도다. 두 곳에는 현지 주민으로 세포이(sepoy) 군대를 조직했는데, 이 인원이 로마 제국의 군대 수를 웃도는 35만명에 이르렀다.

미국의 니미츠급 핵추진 항공모함인 로널드 레이건호(10만4,200t급)가 지난 16일 해군 부산기지에 입항했다. 축구장 3개 넓이인 1,800㎡의 갑판에 슈퍼호넷(F/A-18) 전투기, 전자전기(EA-6B), 공중조기경보기(E-2C)를 비롯한 각종 항공기 80여 대를 탑재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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