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정벌항로 고증 및 전선 선형에 관한 연구

서기 512년 신라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을 정벌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항로로 갔는지에 대해서 사료가 빈약하다.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사)이사부기념사업회(회장 안호성)는 지난 11월 27일(금)~28일(토)과 12월 4일(금)~5일(토) 두 차례에 걸쳐 「2015 이사부 장군 울릉도 정벌항로 고증 및 전선 선형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특강 및 세미나 발표회를 가졌다.

행사의 목적은,

①신라장군 김이사부(金異斯夫)가 울릉도·독도를 우리 영토로 복속시킬 당시의 항로와 전함의 선형에 관해 실증적으로 고증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②항로의 고증을 통해 항로탐사를 체험할수 있는 새로운 토대를 마련하고, 전함의 선형에 관한 전문적인 연구를 통해 전함 복원의 계기를 마련하며,

③이사부 장군의 우산국 복속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함으로써 독도 영유권에 관한 일본의 억지주장을 불식시키고, 국토수호의 의지를 다지기 위함이었다.

이사부 장군의 울릉도 정벌시 항로와 전선 선형에 관한 사료는 거의 없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짧은 기록이 있을 뿐인데, 그나마 두 사료가 전하는 내용에 미세한 차이가 발견된다. 따라서 출항지가 어디냐에 대한 논쟁이 아직도 마무리되지 않은 실정이며, 항로와 전선 선형에 대한 연구는 경험과 추정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특강에는 ▲해양탐험가 이효웅씨 ▲정채호 코리아나호선장 ▲채바다 고대 해양탐험연구소장 ▲섬 탐사 및 연구가 이재언씨 ▲연안해운연구가 전우홍씨가 발표자로 참여했다. 이번 행사에 역사학자들이 참여하지 않고, 오랫동안 해상 경험을 한 전문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이사부 항로와 선형 연구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행스런 점은 직접 배를 만들어 탐험을 하고, 범선을 운영한 실천경험의 전문가들이 주제발표에 참여한 까닭에 경험에서 추론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는 사실이다. 사학자들이 실증론에 빠져 사료와 유적 및 유물이 없으면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는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기회였다.

하지만 경험에서 나온 추론 또는 주장만으로 이사부 항로와 선형을 구체화할 수 없다는 단점이 노출됐다. 현재로는 결론을 낼수 없는 주제였다. 다만 이사부가 어떤 배로, 어느 항로로 우산국을 복속했는지에 대한 주제에 대해 백지와 같은 상태에서 어렴풋한 윤곽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는다. 이런 노력이 한걸음 한걸음 진척되고, 바다에서 건져올리고 뭍에서 발굴한 고대 유물의 연구가 더해진다면 이사부 선형을 그려낼수 있을 것이며, 항로에 대한 연구도 심화될 것으로 믿는다.

이사부기념사업회의 행사에서 얻어진 내용은 이어 12월 12일(토) 서울 한성백제박물관(잠실 올림픽공원 내)에서 열린 한국이사부학회의 학술심포지엄에서도 발표됐다. 삼척 이사부영토수호관 건립을 위해 개최된 이번 학술심포지엄에서 이효웅씨는 「이사부 삼척출항의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이사부장군 울릉도 정벌 항로 고증 및 전선선형 연구」에 관한 특강 및 세미나 행사에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 ‘이사부장군의 울릉도 정벌’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맞춰 ▲이사부의 출항지 ▲선단 구성 ▲선형에 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으며, 발제자에 따라 약간의 의견 차이도 보였다. 이번 발표 내용은 향후 연구의 초석이 될 것으로 믿으며, 견해차가 드러난 부문은 보다 진전된 연구를 위한 논쟁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세미나에서 제기된 주요 내용을 요약한다.

 

1) 이사부 장군의 실직군주 부임시 행로

해양탐험가 이효웅씨는 최근에 항로 탐사 경험과 여러 문헌을 살펴 본 결과 이사부 장군이 해로가 아닌 육로를 통해 실직(삼척)에 부임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근거로,

①당시 신라의 수군은 위험한 해로를 이용하여 적을 공격할만한 능력이 되지 못했다. 소지마립간 10년(468)에 전함을 수리헸으나, 수군의 활약상이 삼국사기에 전혀 보이지 않고, 소지마립간 22년(500) 3월에는 왜병들에게 장봉진이 함락되었다.

②이사부 장군이 503년-504년경 신라의 선봉장이 되어 북진을 하면서 실직성을 탈환한 이후 504년 11월에 수복지구에 12개성을 쌓았고, 505년 2월에 실직군주로 임명되었다.

③이사부 장군이 실직에 있던 기간이 6-7년 정도로 우산국정벌을 위하여 전선과 목우사자를 제작하는데 기간이 오래 걸렸다. 수군이 있었다면 이렇게 오랫동안 실직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④동해안로는 울진·삼척 부근은 해발300-400m 정도이나 대체로 평탄하여 이동하기 쉽고 소지마립간 9년(487) 관도를 수리하게 하였다.

이상 몇 가지 사항으로 보아 위험한 해로 보다는 안전한 육로를 이용하여 적을 완전히 섬멸한 다음 12성을 쌓고 우산국 정벌 계획을 준비하였다고 이효웅씨는 파악했다.

 

반론) ‘삼척군지’에는 이사부 장군이 제일 처음 이곳 실직에 올 때는 ‘수륙군(水陸軍)을 동원하여 오십천 하구로 상륙하였다’로 기록돼 있다. 김태수 삼척문화예술센터 소장(국학박사)는 종합토론에서 “이사부가 실직군주로 부임해 올 때 해로로 왔다는 것이 정설인데, 이효웅씨의 주장은 더 토론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2) 이사부 함대 출항지

이효웅씨는 이사부 함대의 출항지를 그동안의 통설인 삼척시 오분항이 아니라, 정라항이라고 주장했다. 항구의 안전성, 전선 제작 여건, 기술자 및 인력수급, 선박 재료 및 이동수단, 배후지 여건 등을 고려하면 오분항보다 정라항이 적합하다는 주장이다.

오십천 하류는 고성산에 막혀 동쪽으로 흘러 정라진에서 삼각주를 이루고 흐른다. 여름철의 폭우, 봄철의 눈 녹은 물로 수량이 많으면 고성산 아래 물길로 흐르나 시간이 지나면 파도로 인하여 고성산 수로는 얕아지거나 막혀서 정라진의 육향산(죽곶도) 쪽으로 흐른다. 오십천은 육향산에서 부딪히어 소(자라바위)를 이루는데 여기서부터 바닷물이 합수되어 수심이 깊어져서 항구를 이룬다.

이효웅씨는 이같은 이유로 이사부함대의 출항지가 고성산(오화리산성) 아래의 오분항이 아니고 정라항이라고 주장했다.

▲ 오화리산성 평면도
3) 이사부 함대 제작지

이효웅씨는 이사부 함대를 제작하기 적당한 곳으로 삼척 정라진의 갑자평야와 삼각주인 섬을 꼽았다. 육향산 남쪽의 갑자평야는 너른 곳으로 실직의 곡창지대이고, 육지와 연결이 되어있어 인력관리 및 보안이 어렵다. 건너불은 오십천 하류의 외딴섬으로 백사장과 송림으로 이루어져 있어 파도로부터 안전하고, 송림으로 가려져서 항구가 보이지 않아 적으로부터 안전하며 고성산, 광진산, 육향산 세 방향에서 감시하기가 쉽다.

고성산(오화리산성) 정상에서는 멀리 동북쪽에서부터 남쪽까지 볼 수 있으며 산 중턱에서는 건너불과 오십천을 출입하는 모든 선박들을 감시할 수 있고, 광진산 동쪽 끝에서는 북쪽에서 남쪽까지 볼 수 있으며, 육향산은 항구의 정박지로 백사장의 건너불과 강이나 바다로 출입하는 선박들을 감시하기 좋은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진동루가 세워졌다.

세 곳의 망대는 연계되어 깃발로 광진산에서 고성산으로 고성산에서 육향산으로 신호를 보낼 수 있다.

이효웅씨는 이같은 이유로 정라진은 이사부장군의 비빌병기인 이사부 전선과 목우사자를 만드는 최적지라 보았다.

▲ 정라진 지도(198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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