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이냐, 강릉이냐 논란…학계에선 삼척 출항설 지지

이사부 장군이 505년 실직군주에 부임한후 7년후인 512년에 하슬라군주에 부임한다. 우산국 정벌은 같은해에 이뤄졌다. 이에 따라 우산국 정벌 출항지가 강릉인지, 삼척인지에 대해 논란이 분분하다. 그 주요 쟁점을 정리한다.

 

1) 강릉(하슬라) 출항설

이사부의 우산국복속 출항지가 강릉(하슬라)이라는 주장은 아직도 제기되고 있다. 홍문식(이사부정신문화연구소장)씨가 강릉 출항설을 주장하는 대표적 논객이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① 2012년11월 강릉 현대호텔 신축부지 발굴조사에서 죽도봉에 신라 토성이 발굴되었는데, 그 축성연대는 510년경으로 추정도고 있다. 이사부가 하슬라로 올라 온 것은 499년경에서 510년경 사이에 하슬라를 점령하고 북방으로 더 올라가 지금의 양양 근처까지 전선을 밀고 올라갔을 것으로 본다. 지증왕 때 동북방에 12개성을 쌓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강릉에서 발굴됐다. 이 토성의 발견은 이사부가 하슬라에 510년경 이미 진출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 하슬라가 안정이 된 시기인 512년 3월 이사부를 하슬라의 군주로 임명 되었고 이사부는 하슬라에 진출하여 우산국으로 갈 수 있는 선박의 건조 등을 착실히 준비한 후에 지증왕에게 상주하였을 것이다.

② 하슬라에서 출항 했다는 증거는 바로 선곡소다. 선곡소란 “배만드는 골짜기”다.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6년 506년 겨울 주즙법(선박운용에 관한 법)을 처음 시행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선곡소와 월대산은 강릉부 동쪽 6리에 있다” 라고 하였다. 이 선곡소는 지금의 월대산 북쪽 임암동 부근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③수(戍)다. 명주에는 영평수·해령수 등 5곳의 수(戍)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중 선곡소에서 4리 떨어져 있는 해령수를 주목해야 한다. 해령수는 강릉부 동쪽 10리에 있다고 하였다. 이곳은 바로 신라시대부터 수군기지라고 볼 수 있다. 또 경포호와 강문이 마주보는 죽도봉도 이번 발굴에서 선박을 정박하였던 흔적이 있는바 군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고 이 시대의 군선을 안전하게 정박할 천혜의 장소라고 볼 수 있다.

④선박의 조영을 위한 조건. 신라시대의 군선을 건조하는 목재는 주로 소나무를 사용하였는데 이 소나무는 월정산(월대산) 일대에 많이 있었고 또 대관령과 칠성산 일대의 우람한 숲은 군선건조의 목재를 대어 줄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선곡소가 있어야 군선을 건조할 수 있다.

⑤이사부는 사후에 강릉지방에서는 대성황사의 신으로 모셔졌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강릉의 대성황사는 강릉부 서쪽 100보 지점에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칠사당 뒤가 바로 그 곳이다. 이 대성황사에서는 봄 가을에 제사를 올렸는데 이사부신을 비롯하여 12신이 봉안되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목사자를 만들어 우산국을 복속시킨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이사부를 신격화하여 하슬라 백성들이 자연스럽게 바다의 신으로 모신 것이라고 본다.

⑥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도 하슬라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우산국은 하슬라로부터 이틀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만약 실직에서 출항하였다고 하면 삼국유사에 반드시 실직으로부터 얼마의 거리에 있다고 하였을 것이다.

 

2) 학계에서 인정하는 삼척(실직) 출항설

강릉시를 중심으로 하는 강릉출항설은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12월 12일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한국이사부학회 학술심포지엄에서 손승철 이사부학회장은 “이사부 장군이 삼척에서 출항한 것은 학계에서 인정된 사안”이라고 못밖고, “강릉에서 신라시대 토성 흔적이 발견되면서 강릉출항설이 제기되고 있지만, 삼척에서도 신라시대에 대한 발굴작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승철 교수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기록을 중심으로 볼 때 국가차원의 동해와 울릉도에 대한 관리가 가장 수월한 곳이 삼척이며, 삼척의 오분항을 최적의 출항지라고 주장했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손승철 교수의 주장을 따른다. 강봉룡 교수가 삼척의 실직주를 군사중심도시로, 강릉을 행정 중심도시로 두었기 때문에 주력부대를 실직에 두었고, 실직에서 출항한 것이 가장 유력하다고 주장햇다. 유재춘 교수는 삼척지역에 소재한 성곽유적의 현황과 수군관련 유적, 그리고 이러한 유적 가운데 신라의 군사활동과 관련하여 연구한 결과로 삼척의 오분항을 출항지라고 주장한다. 유명철 교수는 삼척은 김이사부의 발진기지로서 조건을 비교적 잘 갖추고 있어 출항지의 역할을 주도하였고 강릉과 울진의 연합 체제를 갖추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3)이사부, 삼척에서 육안으로 관찰하고 출항했다

무엇보다 삼척 일원에서 울릉도가 보인다는 점이다. 울릉도에서 정서쪽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항해기술이 부족한 고대에 육안으로 관찰되는 항구에서 출항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는 특성을 십분 이용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삼척 지역에서 울릉도를 관찰했다는 기록이 많다. 이번 행사에서도 이 점이 대두됐다.

주제발표자인 이효웅씨는 이사부 장군이 우산국 정벌에 관한 정보를 삼척에서 수집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고려 1253년 이승휴의 동안거사집에도 실려 있다. 이승휴는 삼척에 거주하면서 몽골군의 침입을 피해 주민들과 함께 요전산성에 들어가 있는 동안, 파도 속에서 출몰하는 산을 보았는데 마을 어른들이 무릉도라고 일러주어 망무릉도행(望武陵島行)이라는 시편을 지었다.

 

越癸丑秋 因避胡寇 一方會守 眞珠府 寥田山城

城之東南面 熐浡際天 而四无涯 極中有一山

浮沈出沒 於雲濤 煙浪之間 震昏媚嫵 若有爲之者

父老云 武陵島也 江陵田使君命子賦之 聊以鄙語形容云

성에 올라 성의 동남쪽은 바다가 하늘에 닿아 사방은 끝없이 펼쳐졌다. 그 속에 산이 하나 있는데 구름, 물결, 안개, 파도 속에 떴다 가라앉았다 나타났다 잠겼다 하였다. 아침저녁에 더욱 아름다웠는데, 마치 무슨 일 치례하는 것 같았다. 노인들이 무릉도입니다고 하였다.

▲ 삼척 임원의 소공대에서 촬영한 울릉도. 이 사진은 소니 a900에 700-300렌즈(1.5크롭)로 촬영했다. 촬영 방법은 우선 일기가 좋아야하므로 태풍직후나 큰비가 온 다음 하늘이 쾌청할 때가 좋다. 옛 문헌에는 가을철 청명할때 주로 봤다고 한다. 소공대를 오르는 길은 삼척 임원에서 호산으로 가는 구 도로에 소공대로 가는 안내 표지판이 있는데, 그곳에서 약 5.5킬로 정도되며 해발 약 300미터정도입니다. /사진 이효웅. 촬영일자 2010년 9월 27일

 

이승휴는 고종40년(1253년) 7월초에 몽고군이 침입하자 강도(江都) 정부가 7월8일에 5도 안찰사(按察使)와 3도 순간사(巡間使)로 하여금 본토 주민들을 산성(山城)과 해도(海島)로 입보시키도록 한 조처에 따랐을 것이다.

우산국은 동해안 높은 곳에서는 보이지만 막상 항구에서 배를 타고 가려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먼지 항해하기가 쉽지 않다. 날씨가 흐리거나 우천, 안개 등으로 정방향을 잊어버릴 수가 있다. 울릉도 항해는 멀고 중간 수역에는 여름철에는 안개가 자주 발생하는 등 기상이 수시로 바뀌어 필자도 두 차례 정도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 야간항해 시에도 마찬가지로 어렵기 때문에 날씨가 좋은날을 잘 선택하여야 한다. 다행히 울릉도는 성인봉이 높으므로 날씨가 좋으면 2/3(100km) 정도만 가면 멀리서도 보이므로 찾기가 쉽다.

 

이사부 장군은 우산국이 보인다는 사실을 들었거나 가을이나 직접 볼 수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산국은 실직(삼척)의 정동의 멀지 않는 곳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우산국 정벌의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다음은 조선시대의 이산해와 허목의 시에 나타난 울릉도를 살펴보자.

이산해(李山海)의 울릉도설(蔚陵島說)

蔚陵島在東海之中 距海濱不知其幾百里也 每秋冬之交 陰曀捲盡 海氣澄朗 則自嶺東望之

如一片蒼煙橫抹於水天之間 獨眞珠府與此島最爲相對 故行人之登召公臺者 或見基

林木岡巒之狀 了了然可辨 以此知不甚遠也

울릉도는 동해 가운데에 있는데 바닷가로부터 떨어진 거리가 몇 백리인지 모른다. 항상 가을과 겨울이 바뀔 시기에 흐릿한 기운이 깨끗하게 걷히고 바다 기운이 맑게 개이면 영동지방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 마치 한 조각 푸른 연기가 물과 하늘 사이에 가로로 길게 놓여 있는 것 같다. 특히, 진주부는 이 섬과 가장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행인들 중 소공대에 오르는 자들은 간혹 이 섬과 숲과 나무 그리고 언덕과 산의 형상을 볼 수 있는데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다. 따라서 대단히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許穆(허목)의 陟州記事(척주기사)중에서

德蕃召公臺 有黃翼成公功業碑 海晴 望蔚陵島晴峯白沙 風便一日可到云

덕번의 소공대에는 황익성공의 공업비가 있는데 바다가 맑게 개이면 울릉도의 맑게 갠 산봉우리와 흰 모래를 바라 볼 수 있다. 바람이 순조로우면 하루 만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이효웅씨는 삼척에서 울릉도를 직접 촬영한 경험을 소개했다.

“울릉도를 촬영하기 위해서는 일기가 제일 중요하며, 시간은 여명의 해뜨기 직전이 제일 좋다. 여명의 사진촬영은 신속히 촬영지로 이동하거나 야영을 해야 하므로 추천장소로는 ▲남화산 ▲소공대 ▲강원·경북 경계 구휴게소(MBC중계탑) ▲초록봉(MBC중계탑)이 좋다. 가장 좋은 때는 이승휴의 ‘무릉도’ 시편에 나오는 것 같이 동해상에 태풍이 지날 때 하늘이 가장 청명하고 좋다. 필자도 2011년 9월 6일 태풍이 동해상을 지날 때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공감신문 김인영 기자] 이효웅 발표자는 이사부가 하슬라 군주로 부임을 명받고 하슬라가 아닌 실직을 우산국 정벌 기지로 삼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김이사부 장군이 실직군주로 있을 당시 고구려와의 경계는 확실하지 않으나 두 가지로 예상할 수 있다. 동해시 사문재와 강릉시 옥계재로 사문재 까지는 직선거리로 16km, 옥계 터널까지는 28km로 우산국을 공격하려고 실직에서 많은 전선이 떠나면 금방 이웃지역에 소문이 날것이다. 실직을 비운 사이 적이 공격하면 실직을 빼앗길 위험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우산국을 점령한 아군은 피항지가 없어 울진이나 영덕까지도 밀릴 수 있다. 그러므로 하슬라를 공격하고 우산국을 점령하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 하슬라를 점령하면 양양의 남대천(직선거리 87km)까지도 신라의 영토로 만들 수 있다.

하슬라를 점령해야하는 다른 이유는 전쟁에 나가려면 함선 이외에도 군사, 각종병기, 화살, 식량, 군복, 훈련 등 많은 군사와 물자가 필요하다.

당시 보급로가 먼 신라나 실직의 백성들로 함대를 건조하는데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511년경 하슬라를 공격하여 512년 하슬라군주가 되어 군사와 군비를 조달한 다음, 날씨가 좋은 6월에 실직항에서 20여척의 전선에 목우사자를 싣고 출항하였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