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진 전 IBK기업은행장
김도진 전 IBK기업은행장

[공감신문] 김도진 칼럼리스트 = 에필로그입니다. 가슴에 와 닿기도 하거니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글이라 全文을 옮겨봅니다.

젊고 예쁜 여성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46세의 남성이 새벽 2시까지 문이 열린 담뱃가게 앞에 잠시 차를 세운다. 그가 차에서 내린 순간, 우악스러운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웬 젊은이들이 우르르 달려든다. 그가 뭘 잘못했느냐고? 마흔이 넘은 자는 인류에 대한 모욕이다. 나이가 범죄다. 이것이 그 밤의 심판관들의 슬로건이었다. 그들은 30세 이하의 젊은 여성을 동반한 늙수그레한 남성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이 그들의 눈에 특히 거슬렸기 때문이다. 남성은 동행한 여성에게 빨리 시동을 걸고 출발하라고 신호를 보내고는 미친 듯이 도망쳤다. 덩치 좋은 젊은 남성 일고여덟 명이 그를 추격했다. 그 무리의 대장은 레고라라는 젊은이였는데 실은 그 남성에게 개인적으로 원한이 있었다. 건강하고 기력 좋은 40대 남성은 밤새 죽어라 달려서 그들을 거의 따돌리는가 싶었다. 그가 새벽까지 버텼다면 경찰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고라는 끝내 그를 따라잡아서는 벼랑 끝에서 밀어버렸다. 추격전은 끝났다. 하지만 가해자도 진이 다 빠졌다. 동이 틀 무렵, 레고라는 노인이 되어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고 이까지 빠졌으니까. 결국 그 무리는 레고라에게 등을 돌리고 그를 죽일 계획을 꾸민다.

디노 부차티(Dino Buzzati 1906~72 이탈리아)의 이 현대적 우화는 놀랍다. 우리가 기성세대를 바라본 경멸 반 연민 반의 그 눈빛으로 다음 세대가 우리를 바라볼 날이 언젠가 온다. 이것이 인생의 뼈아픈 교훈, 마침내 돌아온 부메랑이다. 우리는 우리가 옛날에 멸시했던 바로 그들이 되었다.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려면 세대들을 우정, 관심, 대화로 한없이 엮어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서로 다른 세대들이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교류할 수 있다. 각 세대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로 대표되는 고유한 정신 구조, 거의 독자적인 하나의 사회다. 이 사회는 윗세대나 아랫세대하고 결합할 때만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한다. 50세가 넘으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자든 가난뱅이든 점점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어제의 세계로 밀려나는 것을 느낀다. 노력을 한다고는 하지만 이러다 발을 헛디딜까 두렵다. 성장이 나를 긍정하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노화는 비틀거리는 것이다. 꿋꿋이 살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소유자로 만들어주기는커녕 내게서 소유권을 빼앗아간다. 나는 지난 세월을 박탈당했다. 마치 그 나날이 쌓이면 쌓일수록 마이너스가 되어 내 존재를 축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난 세월은 보물처럼 모이지 않고 되레 나의 빚으로 기록된다. 시간은 확신을 앗아갔고 결심에 상처를 냈다.

 

어릴 때는 원래 고마운 것도 모르고 온 힘을 성장에 쏟기 마련이다. 고마운 마음은 나중에, 자기가 뭔가를 바치거나 무사공평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 삶은 증여인 동시에 채무다. 신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부조리한 선물이자 우리가 이웃에게 진 빚이다. 가족, 친구, 부모, 조국에 입은 은혜를 돌려주어야 할 때가 결국은 온다. 하지만 삶의 빚은 그들에게 상환할 게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후손에게 똑 같이 베품으로써 갚아야 할 것이다. 빚 청산의 날은 생을 청산하는 날, 우리가 더는 돌려주거나 선사할 것이 없으므로 죽음으로써 산 자들의 먹이가 되는 날이다.

 

생은 우리 이전에도 있었고 우리가 떠난 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 생을 받았다기보다는 잠시 빌려 사는 사람들이다. 요컨대, 우리에겐 생의 이용권만 있고 소유권은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으레 생각하듯 의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 오래 살려면 새로운 의무를 질 각오부터 해야 한다. 자유는 느슨한 풀어짐이 아니요, 책임의 증대에 더 가깝다. 자유는 우리 어깨를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 1912년에 샤를 페기는 노인에게 존중과 휴식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도 않다! 생활은 벗어나고 회복되어야 할 병이 아니다. 어느 나이에나 구원은 일, 참여, 공부에 있다.

 

 

저마다의 운명은 두 심연 사이에 놓인 구름다리다. 우리는 그 누구에게든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이름 없는 티끌이 되어 우주 속으로 사라질 테지만 그건 서러워할 일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익히 말했듯이 생은 늘 약속이라는 구조를 띤다. 무엇에 대한 약속인가? 약속의 대상은 특정되지 않았다. 우리의 요람을 들여다본 요정은 없었다. 지켜진 약속, 결코 지워지지 않을 약속은 우리가 지금껏 살아온 그 삶이다. 그 삶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가없는 감사를 우러나게 한다.

 

우리는 존재를 긍정하고 무조건 찬동하는 사람으로 끝까지 남아야 한다. 세상의 광휘, 그 눈부심을 찬양하라. 지상에 살아 있음이 기적이다. 비록 위태로운 기적일지라도 기적은 기적이다. 성숙은 끝없는 찬탄의 연습에 드는 것이다. 동물, 풍경, 예술작품, 음악의 아름다움을 마주하고 경탄할 만한 기회를 찾도록 하자. 세상이 추해지지 않도록 숭고한 것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매혹을 발견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환상을 잃는 이유는 그것이 원래부터 굳이 품고 갈 가치가 없던 환상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환상은 청소년기의 신기루 혹은 달콤한 유토피아였을 것이다. 흐르는 시간을 저주하기보다는 열정적으로 이 시간에 동조하는 편이 낫다.

 

그러니 마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처럼, 70, 80세에도 황금기를 추가로 더 받아낸 사람처럼, 자기 신체와 정신과 애정에 허용된 능력 이상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운 거라곤 딱 하나밖에 없다. 생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지다는 것. 우리는 어두컴컴한 오솔길에서 길을 잃은 채 이성과 아름다움의 빛에 비추어 더듬더듬 나아가는 존재다. 우리는 형제, 친구, 동지, 가족이라는 타자들 속에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체념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때만 자유롭다. 결국 우리는 육신의 껍데기를 벗고 거대한 흐름 속에서 사라져 티끌로 돌아갈 것이다. 원래부터 우리는 잠시 스치는 존재, 우리를 초월하는 전체의 한 파편이었다. 그동안 잘 버텨왔고 아직도 세상의 호의를 느낄 수 있음을 기뻐하자.

행복한 인생이었든 고통스러운 인생이었든, 어느덧 땅거미가 내려앉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행운의 크기가 가늠된다. 우리는 상처받았지만 충만함을 얻었다. 이루어지지 않은 기도가 참 많다. 그렇지만 우리가 올리지 않았던 기도가 100배로 성취되기도 했다. 우리는 악몽을 관통했고 보물을 받았다. 삶은 참 잔인하거나 지독할 수도 있고 풍성할 수도 있었다.

매일 아침, 받은 바에 감사하면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

당연히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이 터무니없는 은총이 감사하다.

어려운 일이지만 일생을 아름답게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감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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