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응답에 상처받지 말고 ‘나’ 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낫지 않을까?”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지해수 칼럼니스트]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있었다. 난 우리의 조우를 기억하고 싶어서 사진을 남기자고 말하며 내 휴대폰에 셀카 어플을 켰다. 그러자 친구가 갑자기 손사레를 친다. 사진 찍는 건 좋은데, 자기 걸로 찍자고 한다. 난 별 상관이 없어서 그러자고 했다. 근데 찍고 나니 궁금해서 물었다. 너랑 나랑 같은 기종 휴대폰인데 뭐가 다르냐고.

“난 내 어플로 안 찍으면 얼굴이 못생기게 나와.”

그리고 본인이 애용하는 어플을 소개해주었다. 글쎄, 그 어플은 그녀의 얼굴을 예뻐 보이게 만들어준다기보다, 그저 상당히 왜곡하고 있었다. 그녀는 SNS에 올릴 것, 즉 타인들이 그녀 사진을 볼 것이기에 ‘그 어플’로 찍는 게 굉장히 중요했다. 난 그녀의 SNS를 구경했다. 난 그녀가 마치 가면을 쓴 듯 느껴졌다, 그리스 어원의 ‘페르소나(persona)’라 불리는, 그 가면.

 

사실 페르소나는 일상적으로 쓰이는 용어는 아니다. 대부분 영화나 연극 분야에서 특정 배우에게 쓰일 경우가 많다. 작가주의적 감독들이 자신의 세계를 대변할 수 있는 특정한 배우와 오랫동안 작업할 경우, 그 배우는 감독 자신의 분신이자 즉 페르소나가 된다. 우리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지기로는 팀 버튼 감독에겐 조니 뎁, 오우삼 감독에겐 주윤발, 김지운 감독에겐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페르소나다. 하지만 페르소나는 사실 영화적 용어가 아니다. 사실 이 말은 그리스에서 유래했는데, ‘외적 인격’, 즉 ‘가면을 쓴 인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러한 가면을 끼고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당연히 필요할 수밖에. 우리는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그렇기에 타인이 원하는 모습대로 페르소나라는 가면을 인격에 끼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 가면 때문에 자기 맨 얼굴을 돌보지 않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내 친구가 어플 속 자신의 얼굴이 진짜 제 얼굴인줄 알고, 사실적인 카메라의 자기 맨 얼굴을 외면하듯 말이다.

사실 내가 나를 안다는 것만큼 어려운 건 없는 것 같다.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든다. 하지만 당장 현재의 나를 알고자할 때, 한 가지를 알면 쉬워지는 것 같다.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 지금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가!’

살아있는 것들은 누구든 욕망하기에, 욕망하는 것 자체가 현재의 '나 자신'이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가끔 배가 무지 고픈데 뭘 먹고 싶은지 모르겠을 때 너무 슬프다. 먹고 싶다는 건 정말 단순한 욕망일 텐데, 난 페르소나, 즉 타인이 선호하는 나를 채우려고 내 맨얼굴을 돌보고 있지 않는 건 아닌지.

 

근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타인이 생각하는 내가 그렇게 중요한가 싶다. 말했지 않나, 세상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시간은 모든 것을 변하게 만든다. 타인이 생각하는 나도, 얼마든지 변할 수 있지 않나? 타인에게 맞춰지는 내가 얼마나 위험한 지, 우리는 역사적으로 '전체주의'에서 이미 간접적으로 맛보았다. 타인을 위하여 나의 생각을 맞춘다? 그거야말로 엄청 위험한 행위일지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위하여 ‘책임감’에 경중을 두어야한다. 여기서 책임이라는 것의 의미는 우리가 평소 쓰는 것과 좀 다르다.

책임은 영어로 ‘responsibility’다. 이 단어는 응답(response)과, 가능성(ability)가 합쳐진 단어이다. 즉, ‘응답 가능한 것’이 바로 책임이다. 책임감에 경중이 무슨 얘기냐고? 책임감이 서로 높은 관계일수록 서로에 대해 응답하고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서로를 인정한다는 거다. 그러나 책임감이 낮은 관계라면? ‘나’라는 사람에 대해 인정해주지 않는 것이다. 이걸 현대적으로 보자면, 우린 우리의 정신 건강을 위하여 책임감의 경중을 상당히 차별해야하지 않느냐는 거다. 굳이 내가 머리 아플 만한 관계에서는 응답을 크게 기대하지도 말고, 그 응답이 어떠하든 별 신경 쓰지도 말자는 거다. 쉽게 말해 좀 쉽게 살자는 거다, 남 신경 너무 많이 쓰지 말고. 난 너에게 책임이 없고, 너도 나에게 책임이 없다는 거다! 어차피 그들, 즉 타인들도 당신에게 책임감이 낮은 응답을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사르트르는 ‘지옥, 그것은 타인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부모-자식 간에도 완벽히 타인으로 인정해주는 것이 어렵다. 부모는 자식이 자신의 분신, 어쩌면 '타고난 페르소나' 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겉모습부터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아무리 그것이 사랑일지라도, 자식의 맨얼굴을 제대로 보는 부모는 드물다. 부모들은 늘 무언가 요구한다. 베르길리우스의 저서 <아이네이스>에 나오는 아이네이스는 전쟁터에 나가며, 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아! 너는 용기와 진정한 노고는 나에게서 배우고, 행운은 다른 사람에게서 배우도록 하라.”

그의 페르소나가 되길 원했던 마지막 한 마디. 에이, 근데 사실 나도 동방예의지국의 후손인지라.... 사실 부모님은 페르소나가 되길 원하셔도 되지, 완전완전!

 

이와 반면에 책임감이 낮은 관계의 타인을 대하는 방법은 저마다 가지각색이다. 누구는 요즘말로 ‘개쌍마이웨이’로 남들을 대할 수도 있고, 누구는 나의 인격을 숨기려 여우같이 철저한 ‘페르소나’를 쓸 수도 있다. 단, 그 페르소나를 쉽게 쓰고 벗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맨얼굴에 자신 있는 사람일 것이다. 맨얼굴이 망가지면, 우리는 나중에 페르소나를 쓸 수 없게 된다. 맨얼굴이 문드러지면 그 가면은 살가죽에 붙어 이 얼굴에서 벗어나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맨얼굴을 다시 볼 수 있기는커녕, 다른 가면을 쓸 수 없게 될지 모른다.

 

타인이 있기 전에 ‘나’라는 주체가 있다. 무한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 살고 있긴 한가보다. 그러니까 자신의 편리 혹은 만족을 위하여 상대방의 응답(response)도 무시하고, 맨얼굴을 들여다보려하지 않지! 착한 척하며 타인을 배려하자-고 말하고 싶지 않다! 이 글을 보는 독자는 이 세상 사람들에 비하면 아주 소수일 것 일테니.

그러면 우리도 이기적이 되자. 중요하지 않은 타인의 응답에 상처받지 말고 뭐든 ‘나’위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그게 시대의 흐름이라면. 단, 책임감이 높은 관계의 사람들에게 만큼은 서로 맨얼굴을 보여주고, 맨얼굴을 쓰다듬어 주자. 호주머니에 넣어 둔 따뜻한 손으로 맨얼굴을 만져주자고. 네 얼굴은 이렇게 생겼구나, 자세히 보니, 오래보니 참 어여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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