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우리는 모두 앨리스였다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지해수 칼럼니스트] 어린 시절부터 난 초현실적인 것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 그때부터 호러 영화도 즐겨봤었다. 근데 당시 그 어떤 호러영화보다 무섭게 느껴지던 만화 영화가 있었다. 그건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 Land)>. 그 영화는 그냥 무서운 게 아니라, 나를 우울하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앨리스가 경험한 이상한 나라가 어린 나에게 왜 그리 잔혹하게 느껴졌을까.

 

모두들 알겠지만 앨리스는 잠이 들어 꿈을 꾼 거다. 그녀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세계 속에서 고양이는 말을 할 줄 알거라고! 그러던 그녀는 꿈에서 시계토끼를 발견한다. 자꾸 바쁘다, 늦었다고 말을 하는 토끼를 왜 그리 쫓았던 걸까? 그렇게 그녀는 이상한 나라에 입성한다.

 

그 곳에서 앨리스가 겪은 수난들을 보라! 속임수와 사기극이 난무하는 이상한 나라! 무엇이 실체인지 알 수가 없다. 그 뿐인가?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주며, 황금빛 오후를 예찬하던 꽃들이 행한 짓을 생각해보라. 앨리스도 그녀들의 합창에 동참하며 마음을 열었다. 근데 꽃들이 그녀에게 묻는다.

“넌 어느 정원에서 왔니?”, “넌 어느 품종이니?”

앨리스는 사람이지 꽃이 아니다. “난 앨리스라는 종(種)이야!”

그러자 꽃들은 그녀를 이름 모를 잡초라고 정의해버린다. 작은 봉오리가 그녀가 예쁜 것 같다고 말하자, 큰 잎사귀가 그 입을 가려버린다. 소수의 의견을 묵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앨리스를 집단으로 따돌리고 조롱하며 심지어 내쫓는다.

그녀가 어쩌다 합류하게 된 티 파티(tea party) 역시 그녀에게 상당히 기분 나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생일 아닌 날’이라 축하를 한다는 억지스러운 논리로 주구장창 차를 마셔댄다. 근데 차를 마시는데 이상하게 얼굴이 벌겋다. 그리고 앨리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고 해놓고 결국 그녀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한 얘기를 계속 또 해댄다. 잠깐, 이거... 우리가 어디서 많이 봤던 장면들이 아닌가. 보통 우리 몸을 알콜이 지배할 때 저렇게 된다.

그렇다. 앨리스가 겪은 이상한 나라는 결국, 어른들의 세계인 것이다.

 

 

이상한 나라에서는 대부분 흡연자다. 그중 제일 골초는 송충이다. 얼마나 담배를 피워댔으면 연기로 그 흔한 도너츠도 아닌 알파벳을 만들어낼 줄 안다! 송충이는 그녀에게 묻는다, 넌 누구냐고. 앨리스는 대답한다. 자신도 모르겠다고, 그걸 당신이 알려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그도 그럴 것이 앨리스의 몸은 자꾸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에 그녀 자신을 어쩔 수 없이 맞추는 것이다. 이젠 그녀의 키가 원래 어느 정도였는지 잘 기억도 안난다. 이 정도였나? 싶다. 그저 ‘아이’였던 그녀에겐 정체성 혼란이 올 수밖에. 그러니 묻는거다. 후아유? 후엠아이?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상한 나라에선 모두가 이런 일을 겪나보다. 그녀가 만났던 체셔 캣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기는 모두가 미쳤어. 넌 곧 알게 될 거야. 여기서 ‘나 자신’은 없다는 사실을.”

... 나는 이 대목에서 원작자 루이스 캐럴이 그린 ‘이상한 나라’가 ‘어른들의 세계’일거라는 내 해석이 맞을 거라, 100% 확신했다. 그래서 이 칼럼을 쓰게 됐다.

 

토끼, 그러니까 시간-세월을 쫓던 앨리스는 결국 그 나라를 지배하는 여왕을 만나게 된다. 여왕의 이상한 나라는 어떠했는가? 장미에 싸구려 페인트를 누가 발랐냐고 여왕이 화를 내자, 그 신하들은 서로 칠하지 않았다고 책임을 전가한다.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세월호 사건 때 우린 그 장면을 처절하게 지켜보아야 했다.

앨리스는 그 이상한 나라에서 여왕을 화나게 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된다. 재판은 법에 따라 집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한 나라, 즉 현실에서는 어떠한가. 법이 만인 앞에 평등한가? 아니다 권력의 편이다. 그래서 판결은 이렇게 내려진다. 앨리스의 목을 쳐라! 힘없고 빽없고 편없고 연줄없는 앨리스 계집애 따위!

(전체주의를 연상케하는 카드 병정들)

 

이 만화의 소설 원작자 루이스 캐럴은 수학자이자 초현실주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초(超)현실주의? 아니, ‘초(대박)’ 현실주의자인 작가인거다! 이렇게 현실적인 동화는 전무후무하다. 어린 시절 정말 초(超)현실에 살며 산타클로스를 믿던 나에게 앨리스가 겪은 ‘이상한 세계’, 즉 ‘어른들의 세계’는 지나치리만치 우울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아, 잔혹하다, 저런 세계가 존재한다니! 귀신보다 무섭군! 그래서 어른들이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고 하셨었나 보다.

 

사실 루이스 캐럴은 소아성애자라고 알려져있다. 그는 아이들의 사진을 1,500장 이상, 심지어 나체 사진도 촬영했다고 한다. 그는 어딘가에서 “나는 아이들이 좋다. 아, 물론 사내애들 빼고.”라고 쓴 적이 있단다. 이게 농담으로 한 이야기일수도 있겠지만 그가 했던 행적들과 주변 사람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냥 지나칠만한 말은 아닌 듯싶다. 게다가 "친구 놈은 내가 애라면 다 좋아하는 줄 안다. 하지만 난 돼지 같은 잡식성이 아니란 말이다! 나 까다로운 남자야." 라고도 했단다. 맙소사. 까다로운 ‘어른’도, ‘선생’도 아닌 ‘남자’라고 했다. 그가 ‘애’를 ‘남자’로서 대할 대상으로 생각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그가 왜 이런 소설을 쓴 것일까?

 

나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소아성애자로서 소아를 괴롭히고 싶은 새디스트적인 욕구를 이런 방식으로 표출했을 가능성. 또 하나는 그가 아이들을 너무 사랑해서 미리 예방 접종을 놔주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하는 거다. 그는 아이들을 정말정말 사랑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당연히 시간(토끼)을 따라가다 보면 어른이 될 것이다. 그때 받을 상처들을 예고해서 덜 아프게 해주려는 게 아니었을까? 아, 글을 쓰다 보니 또 이런 생각도 든다.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루이스의 입장에선 그게 싫을 것이다. 그러니 어른이 되면 이렇게 무시무시한 이상한 나라에 살게 될 테니, 넌 제발 어른이 되지 말라고 겁을 주는 건 아니었을까?

 

(영화 <로리타> 중에서)

 

어른이 된 우리 모두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다. 우리의 모습이 이 작품에 나오는 문고리 같고, 송충이 같고, 장미 꽃 같고, 쌍둥이 같고, 카드 병정 같고, 여왕 같을 수 있겠지만 우린 알고 있다, 우리 모두 앨리스였다는 사실을! 아니 사실 마음속으론 지금도 다들 앨리스라는 걸. 나도 하루에도 여러 번 앨리스처럼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할 수 있는 쿠키 몇 개를 마음속으로 챙겨먹는다. 어딘 가에선 정말 만만해보이지 않으려고 내 몸을 엄청 불려야하기 때문에.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선, “역시 집 밖은 위험해”라며 앨리스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앨리스가 시계토끼를 쫓아 이상한 나라에 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이치였을 것이다. 수능이 끝났다. 수많은 앨리스들이 이상한 나라로 오게 될 테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이상한 나라에 계속 살다보면 여기에 익숙해질 수는 있다만, 여기서 받는 상처들은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상한 나라를 지키는 나, 당신, 우리 앨리스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앨리스들이여 화이팅!

 

-이상한 나라에서 심지어 이상한 국가에 사는 또 하나의 앨리스가 앨리스들에게.

 

'앨리스! 너의 부드러운 손으로

동심이 가득한 이 이야기를 가져가

추억의 신비로운 가닥 속에 넣어 두어라.

어린 시절의 꿈들이 엮이어 있는 그 곳에.

멀고 먼 나라에서 꺾어 온

순례자의 시든 꽃다발처럼.'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서문의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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