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층 반발로 이탈리아 개혁 실패…프랑스서도 포퓰리즘 득세

[공감신문 김인영 기자]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가르는 동서냉전의 시대가 붕괴된지 30년 가까이 지나면서 글로벌 사회에 좌와 우의 대립은 사라졌다. 미국에선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온 러스트벨트(중부 공업지대) 노동계급이 보수세력인 공화당 지지로 돌아서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됐다. 영국에서도 노동세력이 주축이 돼 영국만 살겠다며 브렉시트를 지지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와 올랑드 대통령의 사회당 정권은 경제개혁법안을 추진하며 사회당의 성역인 ‘주 35시간 근로제’를 손보는 노동개혁을 단행했다. 올 여름 프랑스 광장을 메운 수십만의 노동법 개혁 반대시위대는 올랑드의 지지를 철회했고, 올랑드는 4%의 지지율로 이번 대선에 출마를 포기했다. 미국과 유럽에서 자유주의자와 좌파는 더 이상 근로자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4일 치러진 이탈리아 헌법개정 국민투표에서 마테로 렌치(41)가 이끄는 좌파정부는 실업률 40%에 이르는 젊은층의 지지를 얻지 못해 결국 사임했다.

국민투표 패배를 인정하고 사퇴를 선언한 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 /AFP=연합뉴스

 

이탈리아, 높은 청년 실업에 개혁 빛바래

그는 2014년 2월 중도좌파 성향의 집권 민주당을 이끌고 이탈리아 역사상 최연소 총리에 올라 취임 초기부터 급진적이고, 즉각적인 개혁 조치를 강조하며 기존 관행을 전면적으로 깨뜨리는 개혁 작업에 나섰다. 민주당의 전통적인 지지 기반인 노조와 좌파의 반발을 사면서까지 쉬운 고용, 쉬운 해고를 보장하는 시장 친화적인 노동개혁을 이끌어냈고, 전방위적인 저항을 무릅쓰고 교육 개혁과 사법 개혁에도 나섰다.

그는 일련의 개혁 작업으로 '로타마토레'(Rottamatore, 파괴자)라는 별명을 얻으며, 이탈리아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2차 대전 종전 후 70년 동안 63차례나 정부가 바뀔 만큼 불안한 정치 체계를 안정시키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어 상원 축소와 중앙 정부 권한 강화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마련했다. 정치인들을 줄여서 비용을 줄이자는 취지였다. 올해초만 하더라도 개헌안에 대한 찬성률이 60%를 웃돌아 국민투표 통과는 무난할 것으로 예상됐다. 그는 마지막 승부수로 국민투표가 부결되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이라고 공표했다.

그러나 노동대중은 더 이상 좌파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의 개헌안을 무산시킨 것은 젊은층이었다. 젊은 유권자들이 개혁에 환멸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난해 이탈리아의 성장률은 유로존 평균 경제 성장률 4%를 밑도는 0.8%에 그쳤다. 실업률은 11%대 중반을 넘나들고, 청년실업률의 경우 40%에 육박했다. 이탈리아 청년 10명 중 4명이 일자리 없는 팍팍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EU 통계에 따르면 이탈리아 15∼29세 젊은이들 가운데 취업을 하거나 직업교육을 받지 않는 이른바 '니트족'(NEET·Neither in Employment nor in Education or Training)의 비율이 2008년 19.3%에서 작년 25.7%로 치솟아 유럽 최고를 기록했다. 젊은이 4명 중 1명이 사실상 미래를 포기하고 백수로 지낸다는 의미다.

당장 일자리가 없는 이탈리아 청년들은 "미래와 우리의 자녀들의 앞날을 위해 국민투표에서 찬성표를 던져달라"고 호소한 렌치 총리의 말에 냉소했다.

이 틈을 포퓰리즘이 끼어들었다. 좌파와 우파로 구분된 기존 정치에 반기를 들고 2009년 창당된 포퓰리즘 성향의 제1야당 오성운동은 이번 국민투표에서 렌치 정부의 실정을 심판해야 한다며 국민투표 부결 운동의 선봉에 섰다. 베페 그릴로 오성운동 대표는 투표 운동 기간에 "2조 유로의 천문학적인 빚을 지고 있는 이 나라는 완전히 망가졌으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기존 시스템을 버리고 교육부터 의료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이 직접 맡아 운영하는 시민 혁명이 필요하다"는 말로 기득권 심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젊은 세대는 이에 환호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헌법개정 국민투표 포스터 앞을 지나는 청년 /[AFP=연합뉴스

 

이탈리아 은행 위기 우려

문제는 헌법개정이 아니다. 경제개혁을 주장하는 렌치 총리가 사임하고 정치혼란이 지속되면 은행 위기가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탈리아의 은행 부실은 위태롭다. 이탈리아 은행들의 무수익여신 비율은 17%로, 미국의 10배에 이른다. 무수익여신(NPL: None Perfoming Loan)은 금융기관이 빌려준 돈을 회수할 가능성이 없거나 어렵게 된 부실 채권을 말한다. 미국 은행들이 2008~2009년 파산위기에 빠졌을 때 이 비율이 5%였는데, 이탈리아에선 현재 이의 3배가 넘는다. 2010년 이른바 PIGS(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스, 스페인) 위기때보다 3배 가까이 늘어났다. 유로존 부실채권의 거의 절반이 이탈리아에 몰려있다는 분석도 있다.

그중 가장 위험한 은행이 이탈리아 3위 은행인 방카 몬테 데이 파스키 디 시에나(BMPS)다. 1472년 이탈리아 중부 시에나 시정부가 창업한 이 은행은 현재까지 살아있는 은행중 세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키고 있다.

이 은행은 연말까지 도산을 피하기 위해서는 50억 유로의 유상증자를 해야 하는데, 이를 완료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자문기관인 JP모건과 메디오방카는 국민투표 결과가 나온 이날 오전 기존 유상증자 안을 계속 밀고 나갈지 논의할 계획이다. BMPS는 유상증자의 전제조건으로 꼽히는 출자전환을 시작했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이 은행은 2일 10억 유로의 부실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는 데 가까스로 채권자들의 동의를 얻었다. 이는 전체 출자전환 대상 부실채권 43억 유로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규모다. 유상증자를 위해서는 이 밖에 주요 투자자로부터 현금을 확보해야 한다.

앞서 영국의 파이낸션타임스는 BMPS는 물론 중소은행인 포폴라레 디 빈첸자, 베네토 방카, 카리게, 방카 에르투리아, 카리키에티, 방카 델레 마르케, 카리페라라 등 모두 8개 은행이 청산절차를 밟게 될 수 있다고 업계와 금융당국의 평가를 바탕으로 경고한 바 있다.

이탈리아 은행권의 특성은 은행채 투자자 중 개인투자자 비중이 45%에 이른다는 것이다. 은행 위기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자 이탈리아 최대은행인 우니크레디트는 재빨리 자구책 마련에 나서 산하 자산운용사 파이오니어를 30억 유로 이상에 프랑스의 아문디에 매각할 계획이다.

 

이탈리아발 유로화 급락

이탈리아 정정불안이 심화하면서 유로화 가치가 급락했다.

유로화는 5일 한때 전거래일보다 1.5%까지 하락해 지난해 3월 16일 이후 20여 개월 만에 가장 낮은 유로당 1.0506달러를 기록했다. 이후 낙폭을 다소 만회해 오전 11시 현재 0.96% 하락한 유로당 1.0562달러에 거래됐다.

전문가들은 이탈리아의 국민투표가 부결되면 정치적 불안정성이 커져 유로화가 지난해의 저점인 유로당 1.0460달러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고 전망한 바 있다. 취약한 고리로 지목되는 이탈리아 뱅킹 시스템이 무너질 경우 그 충격이 유럽 금융시스템 전반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날 주요국 통화는 달러 대비 약세를 보이고 있다. 블룸버그 달러지수는 0.5% 상승했다.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엔화는 이날 오전 달러 대비 0.6%까지 올랐다가 11시 현재 0.2% 떨어진 달러당 113.77엔에 거래됐다. 한국 원화 가치는 달러 대비 0.2% 떨어졌으며 중국 역외 위안화도 0.2%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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