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지해수 칼럼니스트] 98년생들이여 미리 축하한다. 사회생활의 시작을! 드디어 당신들은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그 만큼 책임이 따르며 조금 더 위험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 글은 98년생과 더불어 20대 초반의 청소년 및 사회 초년생, 그 중에서도 지방의 ‘내 고장’ 부모님 댁을 떠나 대도시-특히 서울-로 ‘독립’할 친구들을 위한 것이다. 혹은 독립을 꿈꾸는 나이 꽤 먹은 성인이지만, 자신의 불안정한 가치관이 사회 초년생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이 글이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 나는 묻고 싶다. 첫 독립을 꿈꾸는 당신, 어느 동네에 살 것인가?

보통 새로 독립할 동네를 고를 때 이 둘 중 하나에 의해 결정된다. 직장 혹은 학교와 가깝거나 자주 활동할(?) 동네이거나.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나는 무조건적으로 그것에 따라 동네를 결정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직장/학교 혹은 여가시간 이외에도 환경의 영향을 너무도 많이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맹모삼천지교>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다. 맹자의 어머니가 그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3번했다는 이야기.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맹자이자, 맹모가 되어야한다. 아직 성장하고 배우는 중이며, 아마도 이 무한경쟁시대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트레이닝 해야 되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던 중, 내가 예전에 알고 지내던 한 동생이 떠올랐다. 그녀는 경기 어느 소도시에 살다가, 취업 준비를 위하여 서울로 상경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직장과 가까운 논현동에 첫 보금자리를 잡는다. 그녀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말하기 미안하지만 그녀는 머리가 좋은 부류가 아니었다. 분별력이 조금 없었다고 해야 할까? 심지어 스무 살, 너무 어렸다. 그 환경은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기에 충분했다.

그녀의 삶에는 부족한 것이 많았다. 당연했다, 스무 살이니까. 하지만 그녀가 외제차를 타지 않아서, 외제차 모는 남자친구가 없어서, 명품백이 없어서, ‘갤백’ ‘현백’에서 옷을 못 사 입어서 그렇다고 느끼게 될 줄이야? 이런 것들의 부재 때문에 행복을 느끼지 못할 줄이야! 하지만 분별력이 없던 그녀에게 이 모든 건 그런 것들의 문제로만 보이게 만들었다! 난생처음 화려한 동네에 입성한 그녀는 또래의 여자들이 화려하게 사는 것을 보고 처음엔 주눅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곧 ‘어쩌면 저런 삶의 모습이라면 좀 더 행복에 가까워질거야’ 라는데에 생각이 닿게 된 거다. 난 조심스레 그녀에게 말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어.’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후, 조금 더 고수입에 아르바이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서울시에서 투표율이 낮은 동네 중 한군데가 강남구 논현1동이다. 논현1동은 먹자골목과 1인가구수가 무지 많다. 논현1동에는 서울 타 동네와 비교했을 때도 월세가 저렴한 집들이 꽤 있다. 비교적 사회초년생들이 서울 입성(?)이 쉽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강남구에는 크게 두 가지 부류가 존재한다. 정말 돈이 많거나 정말 돈이 없거나. 그런데 이 돈이 없는 부류는 또 두 가지 형태로 나누어진다. 분별력이 없거나 분별력이 있거나. 후자가 보통 제 2의 ‘피츠제럴드’가 될 확률이 높다.

 

(소설가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로 유명한 미국의 대표 소설가,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그는 1920년대 재즈의 시대(Jazz age)에 활동했으며 ‘방황하는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생애는 순탄치 않았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난한 학창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도 신분 차이 때문에 결별을 당한다. 그는 뉴욕에서 3주 동안 술만 퍼마시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글을 쓴다. 그리고 작품은 성공하고 많은 돈을 번다. 이후 그는 화려하고 쾌락적인 낭비 생활을 즐긴다. 피츠제럴드는 재능과 돈이 많은 데다 ‘미남’이었기 때문에 그 광경이 꽤나 잘 어울렸을 것이다.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의 향락 자체가 그의 작품 세계에 엄청난 ‘글감’인 것을!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데이지’는 실제로 개츠비가 사랑했던 ‘지네브라 킹’이 투영된 것이다. 지네브라는 실제로 미인인데다 돈이 무지 많았다고 한다. 피츠제럴드는 그 간격을 경험한 것이다! 그가 그녀와 신분 차이가 없어서, 그녀와 전혀 ‘안 드라마틱하게’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그가 <개츠비>를 쓸 수 있었을까? 그가 일평생을 부자로 살았었더라면, 개츠비가 즐기는 향락을 일반 독자들로 하여금 그렇게 제대로 느껴지도록 묘사할 수 있었을까? 소설 <은교>에서 늙은 이적요 시인이 은교의 젊음에 매혹 당했듯, 피츠제럴드에게 그 ‘물질적’인 간극이 그러했던 것이다. 물론 피츠제럴드처럼 관능적인 파티를 즐긴 젊은이들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왜 그들 모두 ‘피츠제럴드’가 되지 못했나? 그가 분명 분별력이 있는 인사였기 때문이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와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그는 분명 인간 자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여인의 매끄러운 목덜미와 거기 걸린 진주뿐만 아니라, 그 목에 진주가 채워진 과정, 그 것을 얻기까지 그녀가 부린 노력 역시 궁금해 했을 거라는 거다.

 

(영화 <위대한 개츠비> 중에서)

 

“모두 불안해하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칵테일 잔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가 말했다.

“모두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지켜보거나, 자신에게 명에가 될 사람들과 함께 있다고 믿으려 애쓰고 있어요. 물론 당신의 집에서는 해당되지 않겠지만요.”

그가 허둥대며 자신이 한 말을 감추었다.

“제 말은 단지 할리우드에서는 대개 그렇다는 뜻이었습니다.”

스텔라도 동의했다.

(피츠제럴드 소설 <광란의 일요일> 중에서)

 

즉,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할 수 있는 사람에게 오히려 화려한 동네는 사회를 아는 데에 공부가 될 수 있지만 멍청한 부류에게는 아니라는 거다. 그들에게는 행복의 조건이 확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선 나 스스로가 어떤 것에 행복에 가치를 크게 두는지 알기도 전에, 화려한 동네에서는 행복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도 쉽게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4년 전 ‘왜 여자들은 샤넬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질문에 당차게 대답하던 ‘스무살’을 본 적 있었다. “루이비통은 가죽이 안 좋고 에르메스는 너무 비싸니까!” 그리고 그녀는 결국 에르메스가 왜 비싸냐 묻던 내 지인에게서 에르메스 켈리백 하나를 받아갔다. 그녀는 무지 행복한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겨우 스무 살인 그녀에게 그건 행복의 전부였을지도. 그러니까 꽤 여러 가지를 희생했던 거다.

요즘 성행하는 핫플레이스는 단연 라운지다. 나는 왠지 모를 거부감에 한 번도 안가다가, 얼마 전 지인에게 인사하러 잠시 들렀다가 낭패를 볼 뻔했었다. 나와 한 자리에서 샴페인을 즐기던 처음 보는 여자가 내가 방심한 사이, 내 코트를 훔쳐 달아난 것이 아닌가! 맙소사.... 다행히 평일이라 손님도 별로 없었기에 직원의 도움을 받아 금방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명품으로 휘감은 그녀였다. 둘 다 민망해지는 순간이었다. 내꺼 같은 코트를 입으면 조금 더 행복해 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걸까? 도둑으로 잡혀 들어 온 순간, 그 때는 무슨 감정이었을까? 누가 그녀에게 화려한 세계를 보여주어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하게 만든 거지? 심지어 그녀의 그런 모습은 거기 CCTV에 다 담겼을 텐데. 누가 그녀를 청담동 파티를 배회하는 ‘강남 거지’로 만들었나. 그녀의 잘못도 있지만 환경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는 거다. 꽃뱀들도 사실 처음부터 그렇게 꽃뱀이었겠나. 언제부터 당신들 머릿속에 돈 10억 20억이 ‘한번 제대로 당기면’ 나오는 액수였냐는 거다! 심지어 비교적 작은 액수를 노리는 꽃뱀의 수는 더욱 많아지는 추세다.

굳이 주거 환경 때문이 아니더라도 SNS에서 보이는 화려한 사람의 일상을 쫓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마냥 부러워할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과연 내 행복의 조건이 델보 백과 돔 페리뇽이냐고. 물론 좋고 예쁘고 성능 좋은 것을 가지면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어디까지 양보할 것인지도 스스로 물어보아야 하지 않겠나. 나도 예쁜 거 비싼 거 좋아하지만 그걸 얻기 위하여 내가 팔 수 있는 건... 글 정도?

주거 환경이 행복의 조건을 정하는가, 혹은 행복의 조건이 주거지를 결정하는가에 대하여 누군가는 닭이 먼저 달걀 먼저라고 생각한다는데... 사회 초년생들에겐 전혀 그렇지 않다. 주거 환경이 행복의 조건을 결정하게 만든다. 그러니 스스로 냉철하게 진단했으면 한다!

본인 스스로 생각해도 난 좀 잘 휩쓸리고 모자라고 분별력이 떨어진다 싶으면 화려한 동네에 살지 않기를. 노인과 아이들이 많고, 어느 정도 투표율이 나오고, 학원도 좀 있고, 아침 출근 시간마다 마을버스가 북적거리는 그런 동네를 알아보길 권고한다. 반대로 본인이 생각해도 난 똥과 된장을 구분할 줄 안다 싶으면, 화려한 동네에서 큰 그림을 보고 사회의 또 다른 이면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와, 세상에 이렇게 사기꾼과 허언증 가진 사람들이 많구나! 부자들이 이런 데에 돈을 쓰는 구나! 그런걸 알기에는 책보다야 직접 보는 게 나으니까. 이것이야말로 문화 유학이 아니겠는가. 당신이 제 2의 피츠제럴드가 될 지도 모르지.

그렇다면 이렇게 잘난 척 하는 난 어디 사냐고? 난 경리단길, 이태원2동. 남산에 근접해서 매일 산책하는 나에게는 딱 인데다가, 강남보다 생활비도 적게 들고, 차가 없는 나에게 여기만큼 교통 편한 동네가 없지! 게다가 동네가 주는 느긋한 분위기가 좋아서, 곧 이 동네 3년차가 된다. 수동적으로 부지런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경리단길에 사는 건 조금 비추천이다. 여유로움이 만연한 이 동네에서, ‘빡세게 살아야 되나’ 자괴감에 빠질지 모르니.

산책하는 게 세상 제일 행복한 나는 여기서 피츠제럴드까지는 안 되더라도 최소한 작가로서 꿋꿋하게 버텨나가는 듯 싶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행복이 있는 동네에서 행복하게 사시길. 최소한 짜장면이 행복의 조건이라면, 내 입맛에 딱 맞는 배달 중국집 하나라도 있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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