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지해수 칼럼니스트] 겨울이라 부쩍 잠이 많아졌다. 전날 조금 무리했다싶으면 11시간은 족히 자는 것 같다. 일어나서 정신을 차리고 나면 친구들이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카톡방에 올려놓는다. 어제 B동영상 봤니, 응 봤지 근데 B가 아니고 A지, 아니야 A는 어제고 B도, C도 나왔어 너 자는 사이에.

내가 11시간 고요히 숨만 쉬는 사이, 또 무슨 일이 났다더라, 누가 이랬다더라, 뉴스에 찌라시에... 뉴스 내용도 터무니없는 찌라시 같아서 뭐가 뉴스고, 뭐가 찌라시인지.

근데 너무 졸려서 여기에 별로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게다가 난 읽을 책도 많고, 유튜브에 볼 강의도 많고, 친구들도 만나야 되고, 산책도 해야 되고... 아... 그래서 뭐? 내가 직접 관련 있는 사람 아니면, 뭐 어쨌다는 거야? 다들 왜 이렇게 열광하는 거야? 할 일이 없어서? 아니 전혀. 다들 할 게, 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그렇다. 그래서 오히려 ‘자기가 한 게 없어서’ 그렇다.

사진출처 : The Simpsons

‘자기가 한 게 없어서’라.

건방지게 들리는가? 그렇다면 내가 잘난 척을 해볼 테니 내 일과와 비교해보시길.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어제 일과를 읊어보겠다. 병원에서는 월요일이라 예약이 찼으니 다음 날 오랬다. 자유시간이 생긴 데다 날씨도 좋았다. 집에서 남대문까지 걸어가 회냉면을 먹었다. 그저께 본 연극에서 언급된 소설책 한권이 읽고 싶었다. 청계천에서 혼자 사진을 찍으며 광화문까지 걸었다. 교보문고에서 책 한권과 커피 한잔을 사서 야외에서 책을 읽었다, 엉덩이가 한기를 버틸 수 있을 만큼. 그러다 또 걸어서 집에 왔는데 아까 산 책이 갑자기 집어치우고 싶을 만큼 지겨웠다. 나는 어떤 무속인의 사주팔자 강의와 설민석 강사의 한국사 강의를 무작위로 10개쯤 보았다. 보다보니 재밌었다. 그리고 잠들었다. 정말 내 멋대로 인 하루였다. 물론 작가라는 내 직업의 특수성 때문에 비교 자체가 의미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당신은 어떠한 월요일을 보냈는가? 당신이 한 일들 중, 자기 스스로 결정해서 한 게 몇 가지나 되는가? 퇴근길 음악 선곡? 글쎄, 멜론 추천 실시간 차트를 재생시키는 게 어떻게 당신의 선곡이란 말이지?

요즘 사람들은 정말 자기 이야기가 없다. 자기 스스로보다 누군가가 원하는 것 위주일 수 있기 때문. 우선 당신은 근본적인 문제에 부딪힐지 모른다. 당신이 하루에 8시간 정도 일한다고 치자. 그 일이 당신의 장래희망이었던 일이라면 정말 행운아이겠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런데 심지어 자는 시간 빼고 하루의 반을 이렇게 성취감과 동료애, 어쨌든 시간은 간다, 뭐 이런 식으로 버티다가 집에 오면, 그러면 편안한가? 피곤에 찌들어 온 당신에게 와이프는 양말을 제대로 벗지 않는다며 잔소리를 해댈지 모른다. 이런, 양말 하나도 내 맘대로 못 벗어던지는 더러운 세상! 그 밖에는 말해 뭐하겠나.

정말 놀 줄 모른다. 스스로 뭘 좋아하는지 알기도 전에 우리는 어릴 적부터 이거 해야 된다, 저거 해야 된다, 의무감을 부여받으며 살아왔다. 그래서 더욱 자기 이야기가 없는 거다. 시키는 것만 했는데 무슨 동기부여가 있겠나? 이게 한국 남자들이 골프에 빠지는 이유란다.

문화 심리학자 김정운 교수의 저서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 한다>에 나오는 관련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이러하다. 골프가 한국 중년 남자들의 유일한 스토리텔링이라는 거다. 그들이 술 안마시고 네 시간 이상 이야기할 수 있는 주제! 한국의 중년 남자들이 가장 신나게 할 수 있는 ‘내 이야기’, ‘내가 했던 일 이야기’. 마치 낚시 이야기처럼 화자는 과장을, 청자는 (순 뻥인 걸 알면서도)아쉬움의 리액션을 반복하며. 게임비, 장비, 그리고 내깃돈까지... 나는 골프를 치지 않아서 잘 모르지만, 대충 골프 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얘긴 지 알 것 같다. 대부분 반복되는 패턴이라 그러하다.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신이 난다. 진짜 골프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할 수 있는 자기 이야기가 이것뿐이라 그런 사람들이 꽤나 많다는 거다. 근데 골프마저 안친다면? 당연히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통해 상대방과 소통하려 들 것이다. 너 그 얘기 들었어?

그게 찌라시다. 맙소사, 우리는 찌라시를 외면하기에 너무 수동적이며, 너무 외롭지 않은가! 내 이야기를 만들기엔 너무 바쁘고 해야할 게 많고.

사진출처 : The Simpsons

다 '자기 이야기'가 없어서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거다. 우리는 환경적인 이유 외에도 생물학적으로 찌라시에 열광할 수밖에 없는 심리구조를 지닌다. 인간의 감각 체계가 원래 타인의 선한 행위보다 수치스럽고 악한 행위를 더욱 인상 깊게 기억하니까. 게다가 그걸 전달한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편집’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창조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면 절대 편집할 수 없다. 내가 어떠한 현상/이야기를 접하고 산책을 통해 내 것으로 소화하고 글을 쓰듯, 배우가 대본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분석해야 연기를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듯이. 그게 재창조, 즉 편집이다. 우리는 남들의 나쁜 일화에는 더욱 이것을 잘 하게 된다. 편집을 통해 스토리텔러가 되는 거다! 거기서 우리는 부수적으로 이런 걸 얻는다, 잘 나가는 사람들의 추락을 통해 상처받은 나의 열등감의 회복!

사진출처 : The Simpsons

찌라시는 그저 찌라시에 불과해야 한다. 사실 그건 정말 심심풀이 오징어 취급만 받아야한다. 우리 모두 추하게 살아간다. 중요한 건 남한테 피해안주고 범법 행위가 아닌 선에서 추하게 살아가되, 내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최소한 찌라시에 뜨는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 있어서 어느 에피소드를 가지게 된 거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 입에 회자될 만큼 흥미로운 일.

인터넷 커뮤니티의 주인공이 되라는 게 아니다. 최소한 내 지인들 속, 그 소소한 커뮤니티 속 찌라시의 주인공이 되라는 거다. 오늘 저녁에 무엇을 했는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단체 카톡방에 소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일들을 벌이라는 거다. 진짜 별게 아닌 이야기라도 좋다. 그게 진짜 사는 이야기니까. 골프 이야기처럼 약간의 양념을 쳐도 뭐 어때?

그러니 찌라시의 주인공들아, 당신들도 크게 노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어쨌든 당신이 남에게 피해준 게 아니라면 찌라시를 듣는 사람들도 너그러워지고, 그러면 말하는 사람도 흥미를 잃을 거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영화 <내부자들 :디오리지날>에 이강희(백윤식 분)가 이런 말을 한다.

 

"어차피 그들은 씹어댈 안주꺼리가 필요한 겁니다.
적당히 씹어대다가 싫증나면 뱉어버리겠죠. 이빨도 아프고 먹고 살기도 바쁘고.
우린 끝까지 질기게 버티기만 하면 됩니다. (중략) 어차피 그들이 원하는 건 진실이 아닙니다.
고민하고 싶어 하는 이에겐 고민거리를, 울고 싶어 하는 이에겐 울 거리를, 욕하고 싶어 하는 이에겐 욕할 거리를 주는 거죠. 스트레스 좀 풀다보면 제풀에 지쳐버리지 않겠습니까."

 

찌라시 속 연예인이 지인이라면, 찌라시 속 기업에 투자를 했다면야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말 ‘제일 쓸데없는 걱정들’일랑 집어치우시길!

스토리가 있는 사람이 아름답다. 누군가에게 호감이 생기면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남자가 자기 이야기라고는 골프 이야기뿐이라면? 정말 사랑스럽지 않을 것 같다. 당신 이야기를 해줘, 당신 얘기! 어릴 때 아이스께끼 한 짝궁 팬티 색깔이라도 기억해놓으란 말야!

이제부터라도 '내가 하는 일'을 하려고 시도해 보는 건 어떨까? 아니 그런 마음이라도 우선 먹어보는 건 어떨까. 새해엔 다들 풍부한 스토리로 할말이 듬뿍듬뿍 꽃을 피우시길.

 

(p.s. 이 칼럼의 제목을 ‘찌라시 주인공이 당신보다 나은 단 한 가지 이유’라고 지었다. 맞다. 낚시다. 원래 좀 낚시나 골프나 제목이나 과장되게 양념 좀 치는 거다! 독자분들 관심 받고 싶어 도발 좀 해봤으니 너그럽게 봐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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