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지해수 칼럼니스트]요즘 뜨거운 키워드 중 하나가 바로 #역사 다. TV프로그램은 물론이요, 대형서점에서도 '역사'가 서가(書架)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다만 한국사에 국한되는 것이 안타깝다만 그래도 다시금 지난날에 묻고 답하고 반성하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 얼마나 값진가! 지금 우리는 사회 전반을 뜯어고치는 보수공사에 해야 한다. 그렇다면 역사는 정말 거기에 키(key)를 쥐고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말하고 싶은 건, 정말 역사는 반복이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나는 이번 사태와 비슷한 역사를 우연히 성경에서 발견한다. 한반도도 아니요 이스라엘 땅, 그것도 모세가 살던 시절에.
이 내용은 구약성경 민수기 22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먼 이국땅에서도 돈을 싸매고 온 이들이 줄을 설 정도로 저명한 주술사가 있었다. 그 이름하여 발람. 그의 소문을 익히 들은 당시 모압의 왕이 그에게 부탁을 한다. 이스라엘을 저주해달라고. 발람은 당시 하나님의 존재는 물론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신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한다. ‘내가 아무리 저주해도 이스라엘은 축복받았기때문에 괜찮을 거야.’라고! 그를 이런 생각으로 이끈 것은? 바로 모압왕이 그에게 보인 돈이었다. 그 화려한 돈은 곧 그의 눈과 이성을 멀게 만든다. 심지어 나귀조차 그의 행동이 그릇됨을 알고 그에게 ‘이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도 말이다.
그 시대에 주술사가 나랏일에 관여하는 게 사실 엄청난 이슈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전쟁 같은 중대사를 결정할 때도 주술사의 입김은 강력하게 작용했다. 그의 입을 빌려 신이 말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지자라 불렸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도 비슷한 순간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발람 같은 주술사가 과연 옳은 말을 했을까? 그들은 분명 왕 곁에서 그들의 의사결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기에 엄청난 권력을 누렸을 것이다. 비선실세가 아니고 무어겠는가. 심지어 가족사에도 엄청난 관여를 하는데! 그들은 그 권력을 지키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왕이 듣기 좋은 말을 골라했을 지도. 우리가 운세를 보러갈 때, 혹은 친구에게 연애 상담을 할 때랑 똑같다.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보러가고 묻지 않나. 답은 정해져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 라는 식이다. 결국 우리는 자기가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곳을 ‘점 잘 본다’고 합리화를 한다. 점을 보는 이유? 한 치 앞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시 주술사들은 앞일을 딱딱 맞춰서 그 당시 비선실세 노릇을 한 걸까?
1950년대 미국, 여기 한 사이비 교주가 있다. 그는 곧 큰 홍수가 있을 것이며 수많은 인명피해가 날거라 예언한다. 자신을 따르며 신께 기도하는 자만이 그 홍수를 피할 수 있을 거라 한다. 두려워진 사람들중에는 전 재산을 그에게 맡기고 열과 성으로 철야 기도한다. 하지만 그가 예언한 날, 날은 쨍쨍하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했냐고?
“우리의 기도가 세상을 구했습니다!”
이렇게 말했단다. 그리고 그에게 감사함을 느낀 누군가는 자신의 친구를 전도하기 시작한다.
‘후회’는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드는 아주 건강한 뇌의 활동이다. 가끔 후회할 만한 상황을 성숙한 태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 합리화를 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태도와 신념, 혹은 행동이 모순된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불안해져서 심리적으로 불편한 것이다. 이런 불편을 피하기 위하여, 이성적으로 아닌 것을 맞다고 생각하려 드는 것이다. 이게 바로 인지의 부조화이자 자기 합리화다.
한 기독교 대학생의 이야기를 방송에서 본 적이 있다. 신학을 전공할 정도로 컸던 믿음에 대한 그의 열정, 그것을 누군가 이용하려 든다. 그에게 접근하여 그가 알지 못하는 ‘진리’에 대해 설파한다. 신학을 전공하던 그였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실로 놀라웠다! 어디서도 듣지 못한 하나님 말씀이었다. 그는 거기서 6개월 정도 ‘진짜 성경’을 공부한 뒤, 알게 된다. 그게 ***라는 '이단 of 이단'이라는 사실을. 자신이 ***에서 성경 공부를 했다는 사실에 그는 한마디로 멘붕에 빠진다. 그 뿐인가. 그가 반년동안 열심히 섬긴 하나님은 과연 누구시란 말인가! ....그는 곧 자기합리화를 시작한다.
‘이렇게 잘 맞아 떨어지는데 어떻게 진리가 아닐 수 있다는 거지?’
'여기서만 진짜 성경을 말해주고 있잖아? 넌 왜 모르느냐며 참 하나님 말씀을 알려주는 유일한 진리의 교단!'
‘넌 왜 모르느냐. 넌 왜 모르느냐. 넌 왜 모르느냐……. ’
그래요…. 어떻게 한낱 ‘닝겐’이 신의 뜻을 알겠어요? 감히 그 큰 뜻을…….
‘내 딸이 우매해 아무 것도 모르고 슬퍼만 한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게 아니라 너의 시대를 열어 주기 위해 길을 비켜 주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왜 모르느냐!
최태민, 그가 당시 박근혜 영애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다. 아이러니한 건 민수기 성경에 나오는 주술사 발람과 최태민,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엄청 경외한 것으로 보여 진다는 거다! 최태민의 묘에는 시편의 성경 구절이 쓰여 있고 심지어 그의 최측근들 말로는 그가 하나님을 엄청 두려워했다는 거다! 근데 왜 그랬냐고? 다 돈과 탐욕 때문이다. 심지어 ‘발람’ 이름의 뜻은 ‘탐욕자’, ‘백성을 악에 빠트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어이쿠.
내가 이런 이름부터 타고난 발람의 이야기를 듣다가 뭔가 최태민이 떠올라서 검색을 해보니, 심지어 최태민의 행보에 발람이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 씨와 10여년 함께 했던 전기영 목사는, 당시 박근혜 영애의 영향력이 커지니까 한 목사가 최씨에게 발람의 이야기를 하며 주술사를 하지 말고 목사를 하라고 했단다! 맙소사. 측근들이 보기에도 그가 발람 같아 보였나보지? 하지만 목사님 코스프레를 하면 뭐하겠나, 발람은 발람이다. 탐욕자, 백성을 악에 빠트리는 사람…….
내가 성경이야기를 해서 독자 여러분 중에 불편을 느끼시는 분들도 꽤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시국에 종교 얘기가 어떻게 빠질 수 있겠는가. 더욱 불편한 건 현실이다. 최태민은 죽기 전에 그렇게 하나님을 두려워했단다. 본인에게 잡신이 많아서라며.
가만 보니 대통령은 ‘불성실한 크리스찬’ 같은 느낌이다. 성실하게 종교 생활을 하면, 최소한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에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한낱 인간이지만 상식적으로 알만한, 이웃을 챙기고 거짓말 안하고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러나 어떤 크리스찬들은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일 거라고 맘대로 생각하고 합리화한다. 신과의 소통? 하지 않는다. 귀를 닫아버리고 입만 살아서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녀가 국민을 대하는 방식이, 딱 불성실한 크리스찬이 하나님을 대하는 식이 아니겠는가. 불성실한 크리스찬은 필요한 게 있을 때만 하나님을 찾는다. 유권자를 대하는 그들의 방식처럼. 이런 크리스찬들은 교회에서도 자기랑 쿵짝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하나님의 일을 한답시고 허튼 짓을 하고 다닌다. 그리고 본인들 듣기 좋은 이야기만 한다. 그들은 그렇게 개인보다 집단이기에 더욱 용감하며, 색이 짙은 자기들 식의 합리화를 한다. 그러니 그들로서는 억울할 수밖에.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소원이었잖아요?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했을 뿐이라고!
…오로지 국민을 위하는 노력이었다고 말하던 그녀가 피눈물이 난다고 한 이유가 이건가.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셔서 용서해주신다고 너희도 이웃을 용서하라하셨지만, 최소한 죄에 대한 회개가 있어야 용서받을 수 있는거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 먼저 나의 죄를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죄를 시인하기는커녕 나타나질 않는다. 신이시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들을 용서해야하는 겁니까?
서문에서 역사가 이 시국에 키를 쥐고 있는지 물었다. 거기에 답변을 하자면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누구는 물을 것이다. 지금도 하루에 수많은 뉴스가 쏟아지는 데 굳이 옛날 일을 고치고 바로잡을 이유가 무엇이냐고. 이유가 분명하다. 평가되어진 옛날 일이 바로 앞날의 방향성을, 그리고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이고 고쳐지고 왜곡되어지고 사라져왔다. 왜 그들이 역사의 방향을 수정하는가. 그게 그들 행보에 대한 이미지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뼈아픈 역사 중 하나인 위안부가 돈 얼마에 그렇게 해석되어지고 말았다. 일본의 주장을 인정한 꼴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에게서 침탈에 대한 사과대신 경제적 원조를 받아냈다. 배상은 상대방에게 뭔가 잘못했을 때 금전적으로 피해를 보상하는 거다. 일본은 우리에게 당시 5억 달러를 ‘배상’이 아닌 ‘경제 협력’ 명목 하에 줬단다. 경제 개발 대통령? 대신 우리가 잃은 게 무엇인가. 그를 추모하는 기념사업 이야기가 많다. 그의 이미지가 더욱 뜨겁고 위대한 대통령이 된다면? 사람들은 박정희스럽거나 박정희다운 사람에 대한 행보에 격려를 보내기 쉬울지도. 비단 이들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가슴 아프고 되풀이되지 말아야할 역사들이 존재해왔다. 역사는 누군가가 할 일에 '명분'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러니 역사는 열쇠이자, 윤활유이자 휘발유인 셈이다.
크리스마스를 한국에서 보낸 게 오랜만이었다. 재작년과 작년 모두 해외에 있었다. 올해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경기 침체를 체감했다. 서울 시내, 특히 신사동 청담동은 교통이 정말 헬(hell)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길거리에 사람들이 고만고만했다. 차도 안 밀리고 택시도 금방금방 잡혔다. 여느 주말 밤 같았다. 서울 근교에 살면서 크리스마스랍시고 와인 마시러 가로수길에 나와서 10-20만원씩 쓰는 사람들이 줄어든 거다. 내가 본 크리스마스 중에 제일 조용한 크리스마스였다.
교회는 안 갔지만 기도를 했다. 마음이 씁쓸해서 그랬다. 나와 내 주변 말고 진짜 오랜만에 ‘민족’을 위해서. 다음 예수님 생일에는 우리 국민 모두 지갑이 빵빵해져서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해달라고. 정말 메리(Merry)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이 날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신 분이 태어난 날이시니까 그들이 깨닫길 바란다고. 죄지은 자들이 자기합리화를 멈추고 죄를 시인하고 용서를 빌게 해달라고!
하지만 결국 오늘, 기다리던 그녀는 청문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성경구절로 마무리를 짓겠다. 시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시편 49:20)
‘존귀’하신 VIP여, 깨달으소서.
청문회 나오기 ‘존’나 ‘귀’찮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