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조병수 프리랜서] 언론인 박권상 씨가 1980년대 초에 쓴 『영국을 생각 한다』라는 책의 제목이 참 인상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었다. 

갓 서른을 넘긴 새내기 젊은 부부가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나가서 살게 되었던 1980년대 중반의 그 영국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금방 가슴에서 원색의 초록물감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다. 젊은 시절에 맨몸으로 부딪히며 배워나가는 다른 세상에서 때로는 남모르는 아픔도 있었지만, 그렇게 부딪히며 보고 배운 그 새로운 세계와 그 배경으로 등장하는 아름다운 풍경들이 너무나 가슴 저리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싶었다. 영국을 방문한 어느 분이 ‘영국에서는 흙이 안  보인다’라고 하던 말처럼, 아름다운 색조의 하늘과 양떼, 솜털 같은 구름과 돌담길, 목가적인 시골풍경과 동화 같은 고성(古城)들, 유서 깊은 도시와 왕궁, 기마병과 마차, 마룻바닥 소리가 울리는 아기자기한 선술집 퍼브(Pub)의 모습들과 라거맥주(lager beer)의 고소한 맛, 좁다란 수로를 거슬러 가는 배들과 수채화폭 같은 바닷가 언덕들…. 

그리고 자동차 경음기(警音器) 소리란 들어볼 수 없이 여유롭게 기다려주고 비켜주고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운전자들, 왕궁 같은 근엄한 느낌의 호텔 리셉션장(場)입구에서 서서 봉으로 바닥을 치며 웅장한 소리로 입장 손님을 호명하던 안내자의 모습들…. 

<버킹검 궁전 근위병교대식>

첫 해외근무지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었다던 영국이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런 곳에서의 색다른 경험들이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지나고 나니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되는 것인가 보다. 

처음 런던으로 향하던 1983년 말은 요즈음과 달리 해외여행도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88서울올림픽 이후인 1989년부터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되었으니, 그 당시 유일한 국적 항공사이던 대한항공도 런던으로 가는 직항 편이 없었다. 앵커리지를 거쳐 파리로 가서는 다른 비행기로 갈아타고 가야 하던 때였다. 

비행기라고는 그 몇 년 전 제주도로 신혼여행 간다고 처음으로 비행기 안전벨트를 매고 앉아 있다가 태풍 때문에 출발도 못하고 내린 것이 전부였던 사람이, 갓 돌이 지난 딸과 부인을 대동하고 먼 타국으로 떠나게 되었으니 잔뜩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다. 

떠나는 날 김포공항 저쪽에는 얼마 전 갑자기 발견된 종양으로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부친께서 아들내외와 손녀가 외국으로 떠나는 모습을 보신다면서 불편하신 몸을 이끌고 전송을 나오셨다. 딸을 안고 출국장 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고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멈춰 섰다. 그때 뒤돌아보면서 석별의 목례를 드리며 바라보던 그 순간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뵙는 마지막 장면이 될 줄은 그 당시로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건강하셨던 분이라, 느닷없이 듣게 된 그 질병의 의미를 '설마.'하는 생각으로 너무 소홀히 여기고 지냈던 것이 늘 죄스럽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전해지던 그 황망한 순간과, 그 때 불편한 몸을 가누며 공항대합실 의자에 앉아서 손을 흔들던 부친의 그 모습은 잊혀 지지 않는 장면으로 늘 마음  속에 남아있다. 

그렇게 떠난 첫 해외여행은, 미지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는 설렘과 긴장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는 내내 잠시도 눈을 붙일 수 없게 만들었다. 주위에 앉은 어린아이의 칭얼거림이 ‘외국으로 입양 가는 어린아이의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충격과, 이를 보살펴 주는 승무원들의 정성스런 모습도 생경하게 다가왔다. 
옆에 앉은 독일인이 묻는 말에 무어라고 답변을 하면서도 그런 ‘외국인과의 대화’가 제법 부담스러웠고, 어린 딸이 갑갑한 기내공기와 소음 속에 조금이라도 칭얼거릴라치면 주위 분들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서 노심초사하던 그 모든 상황들이, 말 그대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중간에 앵커리지에 기착한다는데 그곳에서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파리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때는 어디로 가서 어떻게 하나?’, ‘영국에서의 입국심사 때는 무슨 질문을 할 것이며, 뭐라고 대답할까……’ 등등의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비행기가 중간기착지인 앵커리지에 도착할 때가 되어갈 즈음에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기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앵커리지가 아닌 “가까운 미 공군기지에 착륙한다.”는 것이었다. 착륙한 뒤 내다 본 창밖은 깜깜한 밤중에 엄청난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안내도 없이 그렇게 좌석에 매여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대책 없이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까 모두들 걱정과 함께 시장한 모습들이었다.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장면과 표정들이 현실로 보여 지던 순간들이었다. 

여기저기서 어린아이들의 칭얼거림과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식사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요기할 음식도 제공되지 않고 있으니 모두들 시장기가 역력한데, 특히 어린아이들이 참고 견뎌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 와중에서도 다행이었던 것은, 딸을 모유로 키웠던 아내 덕분에 내 딸은 그런대로 넉넉한 포만감과 여유를 부리면서 그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렇게 너 댓 시간을 기내에서 꼼짝 못하고 갇혀있는데 비행기 출입문이 열렸다. 그 문으로 기내식 상자들이 교체되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뭐가 좀 해결되어가고 요기라도 할 수 있겠구나'하는 안도감이 몰려들었다. 그때 잠깐 열린 비행기 문 밖으로는, 저 멀리 불빛 몇 개만 보이는 깜깜한 밤하늘에 세찬 눈보라가 거의 수평으로 휘날리고 있었다. 

긴장되고 어려운 시간들이었지만 어쨌거나 무사히 다시 출발 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할 일이었다. 하지만 ‘처음 타보는 비행기’에서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신고식 끝에 다시 출발한 비행기가 파리로 향하는 동안에는, 또다시 ‘도착시간이 지연되는 바람에 파리에서 런던으로 가는 연결 편이 없으면 어떻게 하나? 빈자리는 있을까?'하는 걱정들로 잠시도 눈을 못 붙일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시간은 흘러 파리 공항에 도착했다. 갈아탈 비행기를 확인한 후에 런던사무실에다 저간의 사정을 알려주고는 공항 대합실을 서성거리는데, 머리를 짧게 깎은 남자가 말을 걸며 다가오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은 반드시 소양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그 교육에서 “외국 여행할 때 괜히 접근하고 말을 거는 사람은 수상한 사람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으면서 섬뜩했던 기억이 있다. 아내와 같이 장충동 쪽 어딘가에 가서 그런 교육을 받은 터에, 낯선 파리공항에서 왜 자꾸 나를 따라오며 말을 거는 것인지 덜컥 겁이 났다. 

대충 인사만 하고 아내와 눈짓을 주고받으며 슬슬 피해가려는데, 그 사람은 계속 따라오며 말을 걸어오는 것이었다. '이거 이러다가 해외여행 초행(初行)길에 우리 가족모두 납치되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으로 약간은 당혹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그분이 "교통부 공무원인데 영국 남서부 웨일즈(Wales) 지방에 연수하러간다"는 말에 조금 안심은 되었으나, 마음 한 구석으로는 ‘그 말도 어떻게 믿을 수 있나?’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웃기는 장면이었다. 
젊은이답게 용감하게 그 사람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끝까지 들어보며 부딪쳐 보았어야 했는데, 어설픈 초보 해외여행자의 지나친 소심함과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투철한 반공정신과 소양교육 덕분에 ‘가족을 보호해야겠다.’는 본능이 앞서고 말았던 것이다. 

나중에 웨일스 지방의 주도(主都)인 카디프(Cardiff)로 연수(硏修)받으러 온 친구를 보면서 우리 공무원들이 그 곳으로도 연수를 간다는 것을 확인했다. 혼자서 여행하다가 비행 중에 어려운 일을 겪고 동병상련의 기분을 나누고자 했던 그분이 국가의 큰일을 담당할 재목임을 미처 알아보지도 못하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려던 그 풋내기 직장인의 결례를 오해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물 안 개구리의 해외근무’는 그렇게 시작했다. 

2009년 3월 당시 아우디코리아 사장이던 트레버 힐은 매일경제신문 칼럼에서 “해외에서 근무하기”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외국인으로서 다른 나라에 파견근무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은 영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다국적기업들은 자사 직원들을 국외 지사로 파견함으로써 새로운 비즈니스문화를 접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파견 근무 시 여러 가지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한다는 측면에서 기업가치 증대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힐 사장의 이야기처럼 문화와 환경이 다른 곳에서 근무하며 세상을 배우는 기회를 갖는 것은 남다른 경험일 것이다. 우리가 젊은 시절 군 복무 때의 색다른 경험과 고생담을 두고두고  이야기하듯이, 다른 문화와 생활환경에 적응하느라고 겪었던 숱한 에피소드들도 나름대로의 추억거리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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