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원전(璿源殿)의 선자는 아름다운 옥, 원자는 근원 원으로...

[한선생 문화해설사] 궁궐에는 임금과 왕실을 보좌하고 궐내의 일상과 의식을 위한 관청들이 모여 있는 궐내각사가 있다. 창덕궁에서는 한 때 정규 해설로 궐내각사를 드나들었지만 지금은 관람 동선에서 빠져있고 특정한 기간에 특별 해설로 이곳만을 따로 정규 해설을 하기도 한다.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아 유교적 이상 국가를 지향하였고 제사를 매우 중요시하여서 한양도성을 건설할 때 제일 먼저 북악을 중심으로 좌종묘 우사직의 배치를 우선한 다음 궁궐을 지었다.

유교에서는 인간의 죽음을 육체와 혼백의 분리로 본다. 왕이나 왕비가 죽으면 육체는 재궁에 담기고 하늘과 땅으로 흩어지는 혼백을 위해 신주(위패)가 만들어진다. 재궁은 빈전에 모셨다가 5개월 후에 사릉(산릉)에 모시고 신주는 27개월 동안 혼전에 모셨다가 종묘로 부묘하게 된다. 죽은 왕을 모시기 위해서는 생전에 그려둔 초상화인 어진을 선원전에 모시게 되는데, 왕실은 궁궐 안에 왕실의 정통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선원전에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다과나 음식으로 인격에 대한 제사를, 혼백에는 종묘제사를, 육신에는 산릉 제사를, 백성들은 집안에 가묘를 설치하여 제사를 지냈다.

#. 창덕궁 가이드북 선원전 영역 안내 그림

선원전(璿源殿)의 선자는 아름다운 옥, 원자는 근원 원으로 조선 왕족의 유구한 계보를 의미한다고 풀어 얘기할 수 있다. 또한 역대 임금님의 어진을 모신 곳이라 하여 진전이라고도 하며 창덕궁, 경복궁, 경운궁에도 있었다.

특이하게도 창덕궁에는 인정전 서쪽인 서궐내각사 안쪽의 선원전과 일제 강점기하에 지어진 신선원전 두 곳이 있다. 창덕궁 선원전은 도총부 자리에 효종 1656년에 경덕궁 경화당 건물을 옮겨다 지어 춘휘전이라 하였으며 숙종 21년(1695)에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봉안하면서 선원전이라고 불렀다. 어진은 1919년 고종의 사후 1920년 창덕궁 선원전에 잠시 모셨다가 1921년 일제 강점기에 신선원전으로 옮겨 모시게 된다. 현재 비공개지역에 위치한 이곳은 1950년까지 태조 실부터 순종 실까지 12감실에 총 48점의 어진이 보관되어 있었고 일제 강점기 하에 유일하게 궁궐 내에서 진전의례가 행하여진 특별한 장소였다. 하지만 한국전쟁으로 부산 동광동 소재 부산국악원 내 건물 창고에 임시 보관되었던 어진이 1954년 12월 용두산 일대 동광동 피난민 판자촌 화재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 후 이때 구제된 유물들은 창덕궁에 보관되었다가 1992년 궁중유물전시관을 거쳐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2016년 내부가 텅 빈 선원전과 측백나무 우하단 신선원전편액

선원전은 1695년에 지어졌으며 신실7실, 정면7칸, 측면2칸, 익공계 팔작지붕 건물로 앞면 좌우로 진설청과 내찰당을 덧붙여서 제사 의례에 사용하는 곳으로 선왕들에게 엄숙함의 예를 갖출 필요성에 따라 불필요한 장식을 구조적으로 생략한 건물이다.

한경지략에는 '선원전은 인정전 서쪽에 있으며 진영(眞影)을 모시고 달마다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생신날에 임금께서 친히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리고 차례를 드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 23년에 집상전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선조와 숙종이 착용하였던 옥대가 나와서 선원전에 향을 피우고 선원전에 고했다.”라는 기록을 보면 왕실과 나라의 중차대한 일이 생기면 선왕들에게 고하는 제를 올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조임금의 경우는 편집증이 심해서 평소에는 신하들과 함께 선원전에 제사를 지내러 양지당 동문인 만안문으로 자주 출입하였지만 기분이 나쁘면 경화문으로만 다녔다고 하며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어 갔던 임오화변 당시 영조는 세자를 데리고 경화문을 지나 숙종의 어진이 모셔진 선원전으로 가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혜경궁 홍씨는 아주 불길한 무언가 큰일이 일어 날거라고 염려를 하였는데 그 예측이 맞아 영조임금이 선원전에서 숙종 어진에 절을 올린 뒤 다시 세자와 창경궁 휘령전으로 가서 정성왕후서씨의 신위에 사도세자가 사배례를 하게 한 후 군대로 하여금 경계를 엄하게 한 후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화변이 벌어졌었다.

구선원전 천장의 칠조룡 일월오악도 현재 텅 빈 선원전 내부

선원전에서 보춘문을 통하여 들어서면 양지당이 있다. 임금이 제사 전날 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해 머무는 어재실로 선원전의 개보수라든지 비상상황 발생 시 잠시 어진을 임시로 모시는 장소로 활용했다.

왕실에서는 연중 여러 차례의 제사를 치르려면 제상을 차리게 되므로 선원전과 감귤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원전에서는 전통적인 제상을 차리지 않고 향을 피우고 다례를 주로 행하여야 하는 이유로 전국에서 진상되어진 과일들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제사상에 오르는 과일 중 으뜸은 감귤이다. 왕실에서는 해마다 동짓달과 섣달에 귤이나 유자 같은 특산물을 제주목사(牧使)에게 진상(進上)하도록 하여 성균관과 사학 유생들의 사기를 높이고 학문을 장려하기 위하여 진상된 귤을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성균관에서 과거 시험의 일종인 황감제(黃柑製)를 실시하여 경축했을 정도다. 숙종 때는 당금귤(唐金橘) 종자를 제주에 보내었는데 그 뒤 귤나무가 열매를 맺어 목사(牧使)가 해마다 공물을 바치면 임금은 곧 선원전(璿源殿)에 천신(薦新: 철을 따라 새로 난 과실이나 농산물을 신(神)에게 먼저 올리는 것)하였다.” 영조실록에는 영조 51년에 “제주(濟州)에서 감귤(柑橘)을 바쳤다. 임금이 왕세손에게 명하여 창덕궁(昌德宮)에 나아가 천신례(薦新禮)를 행하게 하였다.” 라는 기록이 이를 증명하고 있어 선원전에서의 귤의 위상을 엿볼 수 있다.

동궐도의 선원전 만안문은 보이나 경화문은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 먹거리 특히 과일이 풍부하지 않던 시절의 감귤은 매우 중요한 진상품이었다. 특히, 감귤은 왕실에서 여러 용도로 사용되어진 사실이 왕조실록에 99회나 기록되어져 있을 정도로 귀중한 과일이었다. 이처럼 귤이 너무 귀하고 구하기 어렵다보니 아무나 먹지 못하였으며 감귤은 천신이나 진상으로 바쳐지는 공식적인 용도 이외에도 중앙의 재력가에게 바치는 뇌물로 쓰이거나 사적인 용도를 위해 관리들까지도 이를 획득하기 위해 다툼이 심했고 때로는 대신들 간에 감귤(柑橘)을 품에 넣어 서로 뺏고 뺏기는 일로 상소가 일어나는 등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매우 컸다. 조선시대 제주도민들에게는 감귤 진상이 커다란 노역과 부담으로 작용하여 영조 때의 경우 감귤나무에 끓는 물을 부어 죽이는 일이 비일 비재할 만큼 관리들의 혹독한 수탈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다. 또한 감귤이 풍작이면 진상을 위하여 제주에서 한양까지의 운송 또한 어려움이 많아 거센 풍랑을 만나면 표류하고 목숨을 잃기도 하였으며, 운송 도중 감귤이 썩어버리면 심한 문책을 받기도 하였다.

베이비붐 세대에게는 어릴 적 하루 종일 먹을거리를 찾아 다녀야하고 배고픔을 견디어 내어야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여 귤은 지금처럼 편하게 구하여 양 것 먹어 볼 수 없는 매우 귀한 과일이었다. 현재 궐내각사에 위치한 보물 제817호인 선원전에 들어서면 창문은 열려있어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지만 단청이 단순하고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텅 빈 상태로 적막한 기운을 쏟아 내고 있으며 오직 앞마당 측백나무만이 관람객들을 쓸쓸함으로 맞이하여 아쉽기만 할 뿐이다. 내부에 용상과 어진 일월오봉도 그리고 반듯하게 제상에 귤이 놓여져 있는 모습으로 빨리 복원되어 우리들 곁으로 돌아오기를 소원하며 우리 조상들의 문화를 눈과 귀로 보고 듣는 것도 좋지만 종묘처럼 선원전도 한 달에 한 번 정도의 천신례를 복원하여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기회와 해설사의 해설이 함께한다면 더 유익한 창덕궁 관람의 묘미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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