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전쯤 청담동 어느 라운지에서...

지해수 칼럼니스트

[지해수 칼럼니스트] 한 달 전쯤 청담동 어느 라운지에서 만났던 ‘강남 거지’ 얘길 쓴 적이 있었다. 더 정확히는 도둑년. 멋들어지게 차려 입고와선 우아하게 샴페인을 마시던 옆자리 그녀는, 내가 한눈 판 사이 내 코트를 슬쩍해서 그 자릴 빠져나갔었다. 아직 그 코트를 입고 다닐 만큼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그러니까 아직 그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데 얼마 전 또 그런 사건이 있었다. 심지어 이건 내가 직접 겪은 일도 아니며 아주 찰나에 벌어진 일인데도 아직 어안이 벙벙하다. 
거의 ‘코트사건’ 이후 간만에 클럽엘 놀러갔었다. 신년이 된 후 첫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더 많은 거 같았다. 들어가기 전부터 용무가 급했던 나는 화장실을 찾았다. 아, 이쯤 되면 나오는 매너리즘적 질문... 왜 항상 클럽들은 여자 화장실 칸을 부족하게 만드는 걸까? 그리고 여자들은 왜 그렇게 화장실을 더럽게 사용하는가! 같은 여자지만 이건 정말 미스테리.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다’고? 정말 머문 자리를 비춰주는 거울을 다들 달고 다녔으면 한다. 심지어 클럽에 그렇게 잔뜩 꾸미고들 오는데 말이다. 밤 1-2시 밖에 안됐는데 두 칸 정도 화장실 변기가 이미 막혀있는 상황이었다. 아마도 ‘그날’인 누군가가 변기통에 위생용품을 집어넣은 모양이었다. 굳이 휴지통이 있는데 왜? 이건 정말 나쁜 심보가 아닐 수 없다! 화장실 청소를 하시는 아주머니께서 딸 같은 나이 또래에 이쁘게 꾸민 아가씨들이 화장실을 이리 사용하니 지치고 어이가 없으셨나보다. 화장실 문밖에서 때려대는 강한 비트도 한몫했는데 아주머니께서 좀 큰 목소리로, “아이고! 알만한 아가씨들이 왜 이렇게 화장실 변기에 뭘 넣어대! 휴지통 안보이나!” 하셨다. 누군가를 겨냥한 말도 아니고 그냥 혼자하시는 푸념 정도?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던 나는 그러려니 하고 나가려 했다. 그.런.데. 내 옆에서 마스카라로 속눈썹을 올리던 여자가 자기 친구에게 하는 말은, 굳이 나의 고개를 돌려 그 예쁘고 화려한 얼굴을 기억하게 만들었다. 

“지랄이야, 지 직업이 변기 뚫는 거면서.”

화장실을 빠져나와 언니와 동생 앞에서, 난 일부러 엄청 재미없고 지친 척을 했다. 그렇게 추해빠진 생각을 가진 ‘년’들과 한 자리에서 어울린다는 게 기분이 더러웠다. 

진짜 말도 안 되게 배신감이 든다. 요즘은 솔직히 그냥 조용히 노는 게 좋아서 클럽이나 라운지를 잘 안 가는데 최근 간 몇 번 사이에 이런 광경을 자꾸 보게 된다. 그래도 한 때 내가 좋아했던 풍경들인데, 그런 식에 추악한 꼴들을 보니 이전에도 이랬나 싶다. 만일 정말 내 친구가 저런 말을 했더라면 나는 그 자리에서 온갖 정이 다 털려나갔을 것 같다. 그리고 저렇게 말하는 그녀들이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지 엄청 궁금했다. 물론 정말 괜찮은 직업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요즘은 무슨 일을 하는 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게 중요한가, 뭘 타고 뭘 걸쳤느냐가 더 중요하잖아?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에, ‘그랜져XG’로 대답한다는 광고처럼 말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직업’은 ‘노동(Arbeit:아르바이트)’인가 혹은 ‘소명(beruf)’인가? 만일 당신에게 평생 쓸 돈이 보장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직업을 가질 생각인가? 아니, 직업을 찾을 생각이 있나?

 

(현대 자동차 광고 중에서)

 

직업이 갖는 의미, 또 각 직종에 대한 인식 역시 사회의 요구에 따라 달라졌다. 이를테면 지금 ‘문과생’들은 굉장한 위기에 처해있다고들 하는데 조선시대에는 의술이나 상인처럼 수리적/과학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글 쓰고 철학을 논하는 이들이 더 출세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때는 어떠했나? 말을 타고 전 세계를 정복하던 그들은 오히려 서방 외국인보다도 내국의 문인들을 더 낮게 취급하기도 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전문 기술직이 인기가 좋았다. 전기를 만질 줄 알고, 주판을 잘 두드리면 취업이 쉬웠다. 그러나 그 이후엔 타자가 빠른 사람이, 그리곤 워드 프로세서 자격증 있는 사람이, 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또 그리고선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이런 식으로 계속 변해왔다. 앞으로도 계속 변할 것이다. 직업에 자체에 대한 인식 역시 그러하다. 중세시대 평민에게 일은 ‘아르바이트’, 즉 노동 그 자체였다. 먹고 살기 위하여 무조건 해야만 하는 것. 그러나 마틴루터, 칼뱅 등 종교개혁자들은 직업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버린다. 직업은 하나님이 준 ‘소명(beruf)’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일 지라도 그게 소명이요, 더 나아가서는 나의 ‘천직’일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은 혁명과도 같았다. 더 나아가 근대사회의 직업관은 ‘보람’으로까지 이어진다.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이 되는 때에 우리 선배세대들은 말도 안 통하는 타국에서 온갖 어렵고 궂은일을 했었다. 육체적 뿐만 아니라 심리적 고통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당시 27명의 광부가 사고로 안타까운 목숨을 잃었으며, 4명의 광부와 19명의 간호사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이렇게 삶의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환경에서도 꿋꿋이 일을 했던 건? 본인이 입을 거, 먹을 거 아끼고 아껴서 고국에 있는 가족에게 피땀 묻은 돈을 송금하며 보람을 느낀 것이다. 내 동생 등록금, 우리엄마 병원비 하라고. 

현대사회의 우리는? 이제 웬만해서는 의식주 해결이 가능하다. 직업은 ‘라이프 스타일’을 결정하는데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리고 곧 그것은, 나를 드러내주는 정체성 중 하나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꾸준히 묻는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2,30대, 더 나아가 4,50대에게도 묻는다. ‘넌 뭐가 될 거니? 아니, 앞으로 뭐할 거니?’
청소년들이 꿈이 없단다. 왜? 직업에 대한 의미가 다시금, 중세시대 평민으로 돌아가 노동, 즉 ‘아르바이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수단. 진짜 하고 싶은 ‘소명’과 같은 일이 있어도, 돈이 되지 않는 일이면 안하겠다는 거다. 응, 시장경제 사회에서 당연한 논리다. 

 

(영화 <국제시장> 중에서)

 

‘하고 싶은 게 없어요. 그냥 돈만 많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과연 행복할까? 하고 싶은 것도 있고, 돈도 많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감히 말하건대- 저렇다고 무조건 행복하진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생산을 하며 살아야한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 뉘엿뉘엿 지는 해가 우울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과연 오늘 나는 무엇을 하고 살았나.’라는 기분이 드는, 그렇게 무료하게 보낸 날이다. 특히 전날 과음한 탓에 하루를 늘어지게 보내면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다! 한 두 번이야 괜찮지만 그런 날이 반복되면 스스로가 무지 한심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소소한 일이라도 생산적인 일은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에게 확인시킨다. 원시시대부터 최소한 내가 먹을 것은 내 손으로 벌어먹어야했던 그런 유전자는 생득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또한 사회에 어느 정도 이바지하고자 하는 성질 역시 가진다. 누가 사냥을 해오면 적어도 불을 뗄 나뭇가지라도 주워 와야 된다는 거다, 내 입이 안 민망하려면!  
때문에 노인들이 노동을 하는 것도 본인들을 위해 좋은 활동이다. 우리는 가끔 어르신들이 패스트푸드점 같은 곳에서 근무를 하면 안타까운 시선으로 볼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분들에게 여쭤봐라. 집에 있기 심심해서 용돈을 벌러 나오신 분들도 계신다. 그게 그분들에게 보람된 일이기 때문. 인간은 죽을 때까지 생산성을 확인받으며 보람을 느낀다. 초경을 했을 때 대부분의 딸들은 부모님에게 꽃을 선물 받는다. ‘넌 여자가 되었어.’라는 의미다. 이건 즉 아기를 생산할 수 있다는 거다. 여자들은 오랜 시간 아기를 잘 낳으면 칭찬을 받아왔고, 남자들은 사냥을 잘하거나 돈을 잘 벌어오면 인정을 받았다. 생산적인 행위인 것이다. 지금의 노인들은 더욱 그렇게 살아왔다. 심지어 주5일제는커녕, 매일 새벽같이 나가셔서는 우리보다 일도 더 많이 한 세대다. 노인들이 주일날 교회에 가서 성도들이 먹을 밥을 짓고,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해서도 있겠지만) 다 생산 활동을 통해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은 현대에 ‘무의미한 직업(meaningless job)’이 상당히 많다고 했다. 의미 있는 직업과 무의미한 직업의 차이는 ‘감명’에서 오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상대방 혹은 사회에 내가 도움 또는 감명을 주고 있다, 혹은 받는다는 교류가 있을 때 그 직업은 의미가 있다고 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건 무의미한 직업이며 내면의 죽음을 몰고 온댔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 그런 직업이 많은 이유? 현대사회가 ‘의미’를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지! 중요한 건? 아까 말했듯이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뭘 타느냐, 어디에 사느냐, 뭘 마시느냐 아니겠어? 내 ‘직업’이 아닌, 내 ‘소비’로 나를 표출하는 사회다. 그러기에 중요한건 얼마를 버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강남 고급 술집에는 요즘 그렇게 ‘불법 토토’하는 오빠들이 넘친다더라. 

요즘은 10대 청소년들도 뭘 하면 돈을 벌지 그게 고민인 것 같다. 그나마 조금 덜 메마른(?) 친구들은 묻는다. ‘돈 버는 일을 할 것인가,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인가’. 난 이 해답을 어느 토크콘서트에서 윤종신 씨가 한 발언에서 얻었다. 어떤 일이든 잘하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정말, 완전 맞는 말이다! 누구나 안정적이고 ‘돈 버는 일’을 하려고 하니까 한군데 몰리고, 경쟁이 심화되는 것이다. 그럼 공급이 많으니 당연히 고용주는 인건비를 적게 줘도 된다. 억울해? 어쩌겠는가, 너 말고도 하겠다는 사람이 많은데. 
내가 잘하는 일을 하면 된다! 그것을 탐닉하고, 즐기고, 열심히 하면 된다. 몇 년 전에 책상에 앉기 너무 싫을 때가 있었다. 침대와 책상의 거리가 서울과 부산처럼 느껴졌었다. 그 사이엔 ‘넘사벽’이 존재한다고 느꼈다. 소설 출간을 준비하며 내가 쓴 소설을 몇 십번씩 보다보니 너무 지겨웠던 거다. 그때 어쩌다가 마술사 최현우 오빠랑 통화를 하게 됐었다. 오빠랑 이제 거의 8년을 보는데, 오빤 진짜 꾸준히 열심히인 사람이다. 말은 안하지만 존경스럽다. 아무튼 그 때 오빠는 지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재능 낭비하면 벌 받는 거야.”
정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떠올랐다. 중학교 때 난, ‘달란트(talent)’를 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던가! 그래 이건 소명이야! 천직이야! 노동(아르바이트)이 아니라 소명인 거야! 돈은… 잘하고 노력하다보면 벌게 되겠지?

 

 

클럽에서 청소를 하시던 그 아주머니에게 그 일은 어쩌면 아르바이트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어떤 식으로든 그녀에게 보람을 선사할 것이다. 그녀가 하는 일은 불쾌한 일이 아니라 어려운 일이다. 오히려 불쾌한 건 그녀를 그렇게 바라보던 ‘년’들의 변기처럼 냄새나는 뇌구조였다. 

주변에 클럽이나 라운지에 가서 돈을 펑펑 써대는 남자 지인들이 많다. 그들에게 완전 다 말해줄 거다! 물론 요즘 남자들도 여자들만큼 여우겠지만, 이 정도는 알고 여자들에게 술을 사주라고. 이렇게 몰지각한 여자들도 종종 있다고! 아유, 불쌍한 남자들.

나중에 ‘느그 어무이 뭐하시노’라고 내 자식에게 질문이 날아 들어왔을 때, 내 자식이 작가인 날 자랑스러워하면 얼마나 뿌듯할까? 어쩌면 통장보다 훨씬 두꺼울 나의 저서들을 보며 멋지다고 느껴주길! 그래서 본인도 의미 있는 직업을 가지길.
 
앞으로도 다양한 뇌구조를 가진 인간들이 모이는 자리에 꾸준히 나가볼 예정이다. 서로 냄새를 풍겨줘야, 자기 냄새가 뭔지 알 거 아냐? 클럽의 꽉 막힌 냄새나는 변기를 뚫는 게 그 아주머니의 직업이라면, 난 꽉 막힌 냄새나는 그녀들의 뇌를 뚫는 게 나의 소명… 아, 아니 적어도 자기네가 냄새난다고 느끼게 하는 게 소명이라고 생각해! 이런 칼럼이라도 써야지 한명이라도 예방주사 맞은 기분 아니겠어? 오, 뭔가 이바지한 기분이야! 알랭 드 보통이 한국어를 읽을 줄 알았더라면 이 글을 보내서 칭찬받고 싶었을 거야, ‘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라고 말이다. 덕분에 오늘 뉘엿뉘엿 지는 해는 떳떳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더불어 오늘 하루도 행복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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