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연인 혹은 친구와...

지해수 칼럼니스트

[공감신문=지해수 칼럼니스트] 당신이 연인 혹은 친구와 사람 많은 식당에 갔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곳에 자리를 잡으려 하겠는가? 겨울 날씨에 창가, 화장실 앞이 아니고서야 대부분 구석의 가장자리에 앉으려고 할 것이다. 아, 적어도 나는 그렇다. 중앙에 앉아 식사를 하는 것 보다 훨씬 편할 것 같기 때문이다. 밥 먹는데 왔다갔다하는 사람들 때문에 정신 사나워지는 것도 싫고, 괜히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가 나 밥 먹는 거 구경하는 것도 싫다(쳐다본다고 나 혼자 하는 착각이겠지만). 근데 알고 보면 이게 다 유전자 속에 저장된 정보들 때문이라면 믿겠는가! 심지어 몇 년 전 나는 엄청 ‘관심종자’였는데, 그 때도 밥이나 술은 꼭 가장자리에 가서 먹고 싶어 했다. 왜 그럴까? 그 비밀을 캐기 위해서 우리는 고조선의 마늘과 쑥내음 나는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보겠다. 

구석기에서 신석기, 그리고 신석기에서 청동기 시대로 오면서 가장 큰 인류의 변화는? 아무래도 ‘계급’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 이전 시대에는 모두가 평등했다. 선사시대의 인류들은 처음부터 사냥을 하는 등 생존을 위해 무리지어 생활했었다. 정착 생활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에 화덕은 중앙에 있었다. 모두 옹기종기 모였었다. 그들은 함께 밥을 먹고, 함께 몸을 녹이고, 함께 쉬었다. 따끈한 화력은 모두의 몸을 평등하게 골고루 녹여주었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로 오면서? 화덕의 위치가 구석의 가장자리로 이동한다! 아니 이동한 것으로 보여 진다! 이 말은 즉, 화덕의 위치와 멀리 떨어진 누군가는 상대적으로 추울 수밖에. 누구는 따뜻하게 몸을 녹이고, 누구는 그걸 누리지 못했다. 게다가 ‘권력’을 드러내는 누군가의 무덤인 고인돌까지. 평등? 개나 줘버리라지, 우리 평범한 인간들은 뼛속부터 계급에 대한 개념을 타고났다는 거다. 계급의 상위자들, 그러니까 권력자들이 누리는 것들도 DNA속에 따박따박 입력이 되어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족장(권력자)은 가장자리에서 쉰다… 가장자리가 따뜻하다… 가장자리는 마른자리… 가장자리는 좋은 자리… 여자들은 저기만 쳐다봐… 여자들은 저길 좋아해… 여자한테 인기가 많으려면 저기서 쉬는 사람이 되어야해!

현대사회는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하게 한다. 내가 요즘 칼럼에 누누이 쓰는 이야기지만, 현대인들은 이제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한다. 그리고 그것에 돈을 쓴다. 우리에게 노동은 불가피한 활동이다. 산업 사회에는 내 노동력이 뭐냐에 따라 화이트칼라, 블루칼라 이렇게 계급을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가? 아니다. 어디에 어떻게 돈을 쓰느냐가 그 계급을 드러낸다. 그 중 아마 현대적인 소비란, ‘휴식’에 관한 것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난 우리 할머니만 보더라도 왜 그리 억척스러우신지 모르겠다. 할머니는 쉴 줄을 모르신다. 돈이 생기면 모아야지, 왜 돈 조금 생겼다고 그걸로 여행을 가냐고 하신다. 나이가 여든이 넘으셔도 굳이 버스를 타신다. 허리 아프니까 택시를 타야지 왜 굳이 버스를 타냐고 하면, 밤에 와서 장판에 허리를 지지면 낫는다고 하신다. 거짓말! 맨날 여기 아파, 저기 아파, 하시면서! 
할머니가 이해하지 못하는 요즘 젊은 것들, 현대인들은 ‘힐링(healing)’에 포커스가 맞춰져있다. 古마이클잭슨이 아름다이 부르짖던 ‘힐(heal)’과는 좀 대상이 다르다. 

If you care enough of the living (만일 네가 삶을 신경 쓴다면)
Make a better place for you and for me (너와 날 위해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들어봐)

삶에 신경 쓴다면 ‘heal the world’, 세상을 치유하라고? 아니, 절대 세상은 치유될 수 없어. 세상은 더 나빠질 거고 X같은 거야! 그러니 세상에 상처받은 소중한 나를 치유하겠다는 게 현대인이다. 그래서 현대사회는 굉장히 다차원적인 힐링 시스템을 구축해놓았다. 현대사회는 힐링을 파는, 힐링마켓이다. 어떻게 힐링을 누리느냐, 얼 만큼 고차원적으로, 고급지게 휴식을 즐기느냐에 따라 계급이 나눠진다. 마치 누군가는 가장자리 화덕에서 몸을 녹이고,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따뜻함을 감지하듯이. 

벌써부터 몸이 노곤해지는 몇 가지 이미지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호텔 베딩(hotel bedding)! 적당히 까슬거리고 적당히 푹신하며 산뜻한 그 느낌! 그래서 굳이 여행을 가지 않아도 주말이면 서울 시내 호텔에서 홀로 휴식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큰 휴식을 주어야할 장소는 바로 집이다. 뭐니뭐니해도 집이 최고, 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집은 편안한 장소라는 뜻이며, 편안해야 한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가구가 아닌 과학이라는 침대에 몇 백 만원을 쓴다. 왜? 현대인들이 휴식에 쓰는 돈은 더 이상 소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일 또 일하러 가야되니까, 휴식이 필요할 수밖에. 

세계적인 자동차왕, 헨리포드도 말하지 않나! “I believe even the machine needs rest!” 기계에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그리고 매일 밤 ‘과학’이라는 침대에 눕는 본인 스스로가 그만큼을 버는 사람이니 타당하다고 느낄 것이다. 
아, 물론 가장 큰 휴식은 원하는 만큼 쉬는 거겠지만!

그래, 현대인들에게 고차원적인 휴식이 ‘권력’인줄은 알겠는데, 더 효과적으로 쉬기 위해서  더 살펴볼 건 없을까? 그건 아마도 누구와 쉬느냐, 일 것이다. 
드라마 <밀회>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사회적 지위를 위하여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결혼한 오혜원(김희애 분). 그녀는 이선재(유아인 분)에게 ‘집도 직장같이 느껴진다. 집에서도 일하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그녀를 태우고 교외로 바람을 쐬러 나선 이선재의 운전하던 표정은 굉장히 복합적이었다. 오혜원은 그와 있는 것은 편한 지, 코까지 조금 골면서 잠이 든다. 
처음 오혜원이 이선재의 자취방에 왔을 때 ‘쥐 잡는 끈끈이’에 발이 붙어 애를 먹었었다. 매일 최고급의 것들만 누리는 오혜원은 어느덧 이선재의 집이 제일 편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선재의 집 옥상에서 사발면을 먹은 후, ‘뭘 이렇게 맛있게 먹었던 게 언제인지…….’라고 말한다. 그녀에게는 이선재의 허름하고 눅눅한 집이 정말 ‘집’같았던 거다. 그리고 힘들 때마다 말한다, “너네 집 가자.”

(드라마<밀회> 중에서)

‘명함’이 나쁘지 않은 중년의 남성들 중에 감히 물어 보건데, 정말 집이 편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보다 일찍 끝나 한 두 시간 정도 자유시간이 생기면, 왜 그렇게 전투적으로 ‘한잔’을 쏟아 붓고 집에 들어가는가? 물론 친구, 동료와 함께하는 시간이 즐거워서 그렇겠지!
하지만 정도를 넘어선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들었다. 과학적인 침대를 사다놓고, 최고급 소파, 거위 털 이불, 알맞은 습도, 바깥 환경과 다른 깨끗한 공기. 근데 그런 집이 무지 불편하다는 거다. ‘힐링’을 추구한다던 그들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죄다 힐링 아이템을 들여놓은 집에 안 들어가는 거다. 집이 집 같지가 않으니까. 같이 살 누군가는 정말 ‘집’ 같아야 할지도 모른다.  돈 많은 사람? 똑똑한 사람? 재밌는 사람? 에너지 넘치는 사람? 음, 다 훌륭하지만 휴식에 저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건 위에서 말한 배우자를 넘어, 친구 사이에 함께 살 때도 당연하다. 

일이 없어서 가만있는 강제적 휴식이 아니라면, 당신은 충분한 휴식을 즐길 권리가 충분하다! 당신이 화덕이 놓인 가장자리를 차지할 만큼 권력자가 아니더라도, 우선 이 현대사회에서 버티는 자체가 엄청 머리 아플 테니까. 그러니 우리는 화덕이 아니더라도, 화덕만큼 따뜻한 사람의 옆으로 가자. 그리고 잊지 말자. 화덕 옆이라도 휴식이 되지 않는 누군가와 있게 된다면 이선재의 ‘쥐잡이 끈끈이’가 깔린 집보다 못하게 된다는 걸. 화덕 옆으로 가려고 소중한 걸 잊으면 나중에 정말 마음이 아플지도 몰라, 영화 <라라랜드>에서처럼. 

(영화 <라라랜드>중에서)

날씨가 무지 춥다. 오늘도 수고한 당신은 화덕이 놓인 듯한 가장자리를 가장 잘 누리는 사람이시길. 정말로 세상은 알면 알수록 아름답지 않다, 그러니 당신이라도 제대로 된 힐링을 누리시길. 아마도 제대로 힐링된 우리는 남들을 또 치유해줄지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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