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이제와 돌이켜보면 정말 별거 아닌 것들이었다. 누군가에게 ‘그것’이 왜 지탄받아야 할 이유가 되는 건지, 또는 나는 왜 그 상황에서 피하거나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는 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니까 한마디로 ‘사회’가 그렇게 보니까 그랬던 거다. ‘우리’의 어원이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가서 안전한 ‘우리들’이 되기 위해서였다.

<죽음의 춤>, 마리아 위그먼

이를테면 내가 위에서 말하는 ‘별거 아닌 것들’중에는 ‘별거’가 시작이 될 수도 있는 이혼이 있다. 예전에 유명인들의 이혼은 지금보다 훨씬 큰 이슈거리였다. 심지어 이혼을 한 사람은 무슨 문제가 있거나 귀책사유가 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도 있었다. 하지만 이혼 자체가 죄는 아니잖아.

나 역시 어린 시절 한부모 가정에서 자랐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 반에서 나 외에 거의 한 명? 정도만 이혼 가정이었던 것 같다. 더 많았을 수도 있지만 그 아이들은 드러나지 않았고, 학급 임원을 많이 했던 내 경우엔 도저히 숨겨지지가 않았다. 1학년 때부터 찍힌 주홍글씨는 친구 놀리기 좋아하는 아이들의 단골 소재(?)가 되기도 했다.

걔네도 그렇게 나를 놀리는 것이 나쁜 줄 알면서도 ‘다같이’ 그러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던 것 같다. 그래서 애들이 밉다가도, 어떤 애들 집에 가면 하나도 안 미웠다. 특히 부모님께서 자주 싸우시는 친구들의 집에서 더 그랬다. 딸 친구인 내 앞에서 싸우시지 않더라도, 심지어 나의 부모님들은 부부 싸움 한번을 안 하셨는데(...)도 나는 단번에 그 서늘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또 나는 사실 외동딸이고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편이다. 거의 주말마다 아빠에게 꽃 선물을 받았었다. 꽃 트럭을 몰고 다니는 아빠 아는 동생분이 계셨는데, 주말에 그 삼촌 트럭을 마주치면 아빠는 내게 꼭 선물을 해주셨었다. 불과 초등학생 때 나는 평생 받을 꽃 선물을 다 받은 것 같기도 하고(지금은 주는 사람이 없다).

나는 거의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했던 것 같은데, 부모님이 이혼한 초기나 부부싸움이 잦은 가정의 아이들은 가정불화의 이유를 나중에는 본인에게서 찾는 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부모님이 싸울 때 아이들이 느끼는 공포감은 얼마나 클까. 망망대해에서 자신을 지지해주던 배가 두 동강나는 기분일 거다. 아이들은 그런 상황을 막기 위하여- 최대한 부모님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 부부싸움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 철든 척을 하기 쉽다.

<바리케이드 위의 가족>, 오노레 도미에

애는 애 다워야 한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애 답지 않은 초인적(?)인 행동을 발휘하는 데 이게 다 자신에게도 그 이유를 찾기에 가능한 것 아닐까. 하지만 이건 나중에 성인이 되면, 어느새 마음의 문제로 드러나기 쉽다.

어린 시절 뿐만이 아니다. 사춘기 시절의 어느 일화들은 이후 이성 관계에 매우 꾸준하고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성인이 된 후에도 마찬가지다. 성인이 되었다지만, 사회 안에서 우리는 ‘처음’해보는 것들도- 또 낯선 경험들을 자주 하게 된다. 사회생활도 처음, 군대도 처음, 운전도 처음, 이성 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는 것도 처음, 경찰서에 가는 것도 처음일 수 있다.

만일 그러한 ‘처음’의 상황에서 수치스러운 상황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 사람은 다시 그것을 시도할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인간에게 수치, 그러니까 부끄럽거나 창피한 감정은 대단히 중요한 감정이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역시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된다. 선악을 알게 하는 선악과라... 하와가 그 과일을 먹고 처음 느낀 감정은? 부끄러움 이었다. 벌거벗은 온 몸이 부끄러워서 나뭇잎으로 몸을 가린다. 그리하여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평생 일해야 하는 고통과 잉태하는 고통을 얻게 되었다.

<아담과 이브>, 알브레이트 듀러

서로의 벗은 몸이 부끄러워 몸을 가린 두 사람의 후손들은, 이후에 마음에 드는 누군가의 벗은 몸을 상상하기에 이른다. 수치심이란 이렇게 인간을 움직이게 하고, 고통 받게 하였으며, 살게 하고, 쾌락을 주는 아주 대단한 감정이다.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 서로를 더불어 살 수 있게 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해왔다. 여기에 도덕이나 윤리, 동정심 같은 도구들이 덧붙여졌다.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이코 패스형’에게는 ‘법’이라는 도구가 그들을 인지시키게 하였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누군가에게 ‘부끄러운 줄 알라’라는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그 부끄러움으로 인하여 누군가는- 또 누군가의 가족들은 평생 어떤 상황에서는 주눅 들며 살아야하는 지도 모른다. 또 우리는 그런 수치심을 굳이 느낄 필요가 있을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판단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얘기의 포인트는, ‘지나고 보니 별일 아니다’라는 게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혼을 예로 들자면- 이혼과정을 겪는 누군가에게 그건 별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일이 어떻게 별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다만 그것에 대해 판단하는 생각들에 대해 열어두자는 거다.

‘무법지대’라는 말을 들으면 혼돈의 카오스가 떠오른다. 아마 법이 없다면 그렇게 될 지도 모르겠다(...), 어느 정도의 법은 사회 안에서 필요하다. 하지만 그 법이 무조건 옳다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렇기에 법은 ‘개정’이라는 과정을 거칠 수 있고, 또 사회의 시대적 상황이나 문화에 따라 매우 다른 모습이다.

<도넛의 복수>, 장 미셸 바스키아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심지어 이제 우리가 어느 현안이나 어떤 사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는 커뮤니티는 단순히 지역적인 수준이 아니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가 찾아야하는 것은 ‘내 편’일까? 아니다. 다양하고 유연하게 생각할 줄 아는 방법이다.

스스로에 대한 관찰도 매우 중요하다. 단순히 어떤 큰 사건이나 상황만 가지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조선시대 여자’다워야 했다. 남편이 첩을 둔다고 해도, 질투를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아니 그게 사랑이냐구- 그런 비인간적인 처사가 어디 있단 말인가! 60년 대?에 대한민국에서는 풍기문란하게 만드는 ‘땐스광’들을 처벌했었다(...)

이런 걸 따지면 한도 끝도 없다. 그러니 스스로 무엇을 할 때에 가장 행복하고, 어떨 때에 가장 편안한 지를 관찰해야 한다. 남한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어쩌면 그것이 놀림이나 구설수의 대상이 될지 몰라도 정말 ‘잠깐’일지 모른다는 거다.

경제적, 효율적(?)으로 생각했을 때 이 편이 훨씬 우리 행복에 이롭다. 사람들은 언제나 안주거리 삼을 소재를 찾는다. 구설수의 대상이 되는 건 잠깐이다. 하지만 거기에 부끄러워하거나 상처를 입는 ‘나’는 매우 길게 지속된다.

내가 추천하는 건 스스로를 기록하는 것이다. 언젠가 ‘이때의 나는 왜 이렇게 쫄아 있었지?’하며 어이없는 웃음을 짓는 장면들이 생겨날 거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반사회적 인물이 될 필요도 전혀 없다. 거기엔 적당히- 발 맞춰주되, 당신의 행복은 한 순간도 놓치지 마시길. 행복한 순간은 사실 정말 드물고 또 드물며, 앞으로 더 드물어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공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