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신문] 지해수 칼럼니스트=사실 나는 시 외엔 멜로물들- 영화나 소설을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내가 손에 꼽게 좋아하는 몇몇 작품들엔 공통점이 있다. 그건 바로 ‘시대물’이라는 것. 시대를 반영하는 작품들엔 혁명적이고 폭발적인 ‘안달남’이 있다. 불구덩이임에도 뛰어들어야 하고, 거기에라도 결합되고 싶은 불안하고 연약한 마음들- 치열하지 않은 시대가 있겠냐만(지금도 우린 매우 치열하지 않나), 내가 겪지 않은 시대를 이야기하는 것들이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게 사실이다. 사실 모르게 때문에, 더욱 몰입이 쉽기도 하고.

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소설 중엔 로맹가리에 <레이디L>이 있다. 이전에 글에서도 이 소설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읽은 지 수년이 되었고, 이후에 다시 읽은 적은 없지만 아직도 몇몇 구절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소설의 저자 로맹가리(1914-1980)

거기 나오는 여자 주인공 레이디L은 ‘체제’ 같은 것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아르망은 달랐다. 그는 매우 열정적인 아나키스트! 그는 여기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남자였다. 그녀는? 그에게 목숨을 걸 여자였던 것이다. 심지어 여러 방면에 있어 뛰어난 능력을 선보이던 그녀였기에, 그가 기획(?)하는 여러 테러에 가담하게 되었다.

소설 속에 나오는 레이디 L은 정말- 안타깝고, 안타깝다. 아르망은 그녀에게 그다지 열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그녀에게 열정적일 때에는 아나키즘을 가르친다던지... 뭐 그럴 때 뿐이었다. 이런 남자를 사랑하다니! 심지어 그런 위험한 일에 목숨 거는 남자 때문에, 궁극에는 자신도 아나키즘을 위해 목숨을 거는 꼴이 아닌가.

여기에서 잊을 수 없는 구절이 나온다.

‘신이시여, 왜 나는 이상주의자를 사랑해야만 했을까요.
왜 나는 모든 사람들처럼 돼지를 사랑하지 않았을 까요.
그랬더라면 참으로 행복했을 텐데요!’
그러나 그녀는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다.
오히려 그녀는 그를 집어삼킨 그 불꽃의 아름다움에 끌렸던 것이다.

-소설<레이디L>중에서

나는 실제 군인이었던, 이 소설의 저자 로맹가리가 살던 19세기 유럽을 알지 못한다. 아나키즘이라던지, 사회주의, 이런 체제로 인한 불안전한 사회도 겪어보지 못했다. 종전되지 않은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러하다. 그러나 감히 예상할 수 있는 건, 레이디L은 아르망을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이 실은 무지 마음에 들었을 거라는 것!

우리나라 독립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였던 박열과 그의 연인이었던 일본의 가네코

아르망에 의하여 아나키즘을 비롯한 체제에 대한 교육을 받은 그녀의 생각은 어디로 흘렀을까? 결국 아나키즘이 위대하며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한다는 데 이를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아르망은 어떻게 보였겠는가... 아니 더 그 전으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자신의 배를 채우기 바쁜 그런 ‘돼지’들을 두고, 그녀는 왜 ‘아르망’에게 빠진 걸까? 그가 남다르게 위대한 사람으로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사랑에 빠지는 매력 포인트는 다 제각각이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 기저에는 이런 욕망이 있었을 수 있다는 거다. 라캉이 말하길, 여성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L은 그렇게 위대한 혁명가인 아르망의 인정과 애정을 받을 수 있는 여자였다. 거기에서 그녀는 꽤 오랜 시간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거기에 자신을, 아낌없이 썼던 거다. 여든 번째 생일을 맞은 영국 귀족 레이디L은, 사람들을 모아두고 젊은 날을 떠올리며 이렇게 아르망과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영화<타이타닉>중에서

여든은 그녀에게, 아르망과의 시간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건 아마도 그녀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물론 귀족인 지금의 삶과는 전혀 다른 과거-에 사람들은 매우 놀랄 지경일 거다. 결과주의적인 현 시대라면, ‘왜 그런 쓸데없는 곳에 인생 허비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것은 어쩌면 매우 큰 자랑일지 모른다. 여든의 그녀는, 그 시간에 자신을 쓴 스스로가 자랑스러울 거란 얘기다.

최근 나는 스스로를 어떻게 써야하는지- 아니, 내가 나를 어떻게 쓰고 있는 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삼십대에 들어선 후, 더 이상 단순한 호기심에 의하여 무언가를 도전하는 것이 망설여지기도 했다. 남들이 말하는 안정과 안락, 지속적인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또 현실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말이다. 거기에 나는 나를, 쓰고 있는가?

내가 ‘나를 쓴다’는 것엔 체력이나 지능, 미소, 감정, 공감과 같은 것들도 있으나... 이성적인 판단이 필요했기에 ‘시간과 돈’을 가지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는 과연 어디에 시간을 쓰고, 어디에 돈을 쓰고 있는가에 대해서- 또 어디에 쓰고 싶어 하는 가에 대해서. 그리고 나만의 작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에는 시간을- 그리고 자신이 되고 싶어하거나 갈망하는 대상에 돈을 쓴다고 말이다.

돈을 벌기 위하여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거나 음악을 듣고 춤을 추거나 하는 등의 활동에 시간을 썼다. 시간을 쓴다는 것은 그렇게 사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그런 활동에 내 시간을 쓰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거다. 이렇게 날씨가 덥지 않을 때 나는 산책을 가거나 자전거를 타러 나간다. 그것도 내가 사랑하는 활동이다. 여기에는 ‘몰입’이라는 것이 존재해서, 내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든다는 공통점이 있다. 즉, 시간과 나 사이에 ‘콩깍지’ 같은 거다.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

그렇다면 돈은 어떠한가. 20대의 나는 ‘허세’가 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거기에 돈을 썼었다. 지금도 어느 정도의 그런 끼는 남아있겠지만,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일적으로 불안정했고 수입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보이는 내가 화려해보이고 만만하지 않길 바랬었다.

지금은? 요즘도 물론 명품 옷이나 샴페인, 여행지의 쾌적한 숙소를 좋아하긴 한다. 하지만 요즘 내가 돈을 쓰는 것들엔 물질보다도 ‘지금’에 대한 것들이 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와의 식사나 시간, 안락함과 같은 것들이다. 사실 난 요즘 내가 좀 더 행복하고 편안한 내가 되는 것에 더 관심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되고 싶다.

어떤 이들은 젊어지기 위하여 돈을 쓴다. 또 어떤 이들은 섹시해지기 위하여 돈을 쓰고, 누군가는 건강해지기 위하여 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의 관심과 사랑을 받기 위하여, 돈을 쓰는 사람도 있다. 자신이 믿는 신을 숭배하는 곳에 기도하며 많은 돈을 내는 이들은 그 신에게 축복받고 사랑받는 사람이길 원한다. 거기에 사람들은 돈을 쓴다고, 생각한다.

전쟁이나 혁명의 페이지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조금 더 서둘러 자신을 써야했던 것 같다. 그러한 그들의 무모함과 광적인 모습들이... 한편으로 내게는 좀 부러움을 사기도 한다. 오늘날도 우리는 치열한 가운데에 있지만- 과연 없는 시간을 내어서 쓰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것들이 있는가? ‘되고 싶은 자신’의 기준은 또 얼마나 피상적인가... 이런 시대에도 물론 돼지가 아닌 아르망을 사랑하는 스스로를 뿌듯해하는 레이디L들은 존재하기 마련일 테지만.

<한 쌍의 연인> 에곤쉴레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의 나는 이제야 좀 정신이 드는 것 같다. 폭염이 이어지는 요즘, 나는 낮 시간 동안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밤늦게 겨우 깨어 글을 쓰는 나는, 이 새벽에 무엇을 할까? 아니, 할 수 있을까. 내가 나를 쓰고 싶은 대로, 쓸 수 있을까? 그러면 정말 행복하련만. 그나마 내가 시간을 쓰고 싶은 무엇에 대해 알고는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또 그렇지 못할 것 같아 슬픈 마음도 교차하는 어지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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